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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24. 2022

권태기가 왔다

※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요즘은 야학에 가는 발이 무겁다. 아무래도 야태기에 빠진 것 같다. 그냥 내가 방금 지어낸 말이다. 야학 권태기. 증상은 이렇다. 우선 수업할 때 예전보다 힘이 빠진다. 의욕이 덜 생긴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야학 가는 버스길이 길고 지루하다. 수업이 끝났을 때, 느끼는 보람이 예전만 못하다. 학생들에게 느끼는 책임감도 덜하다. 이제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 만나던 사람들을 만나서 하던 공부를 하고, 늘 가던 길로 집에 들어간다. 이걸 우리 학생들이 모를 리가 없다. 수업에서는 의연한 척 힘을 내 보지만 '선생님, 어째 오늘 평소와 좀 다르네요?' 같은 걱정을 듣는다. 역시 인생 만렙 학생들이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야학활동을 왜 하고 있을까? 내가 없어도 야학은 잘도 돌아간다. 야학은 과연 이 시대에 의미 있는 기관일까? 2022년에 야학은 왜 있을까? 야학이 없어도 세상은 잘 굴러갈 텐데. 지금 계시는 학생분들도 복지관이나 다른 교육센터를 안내해 드리면 될 일이다. 그곳들이 우리 야학보다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왜 굳이 나는 스스로 야학에 오고 있을까. 아무도 안 시켰는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했다. 며칠 전, 야학 선생님 5명이 밤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그 자리에 있는 선생님들은 3년 이상 야학활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3년이면 야학의 희로애락을 느껴봤을 시간이라, 그들의 생각이 내 야태기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나는 조심스레 내 야태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께 왜 여기에 있는지 물어봤다. 그들도 나처럼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텐데. 4명의 선생님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 질문에 성의 있게 대답했다.


 "내가 아는 것을 나눠줄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다른 데서는 이런 느낌을 받는 게 쉽지 않잖아요." -은행원 A 씨. 정제된 말투 구사. 은행원 직업병인가

 "선생님 이제야 야태기 왔어요? 나는 야태기가 몇 년째 지속되는 거 같네요. 야학에 오기 싫을 때도 많고요,  그럴 때는 심지어 도착해서 수업자료 복사할 때 까지도 이게 맞나 싶어요. 그래도 수업하는 그 순간에는 너무 힘이 나요." -공공기관 재직 중인 B 씨. 책임감이 많은 편

 "나는 요즘 진짜 회사일이 바쁘거든요. 올해는 야학을 쉬려고 헸는데, 야학에 과학 선생님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교무 선생님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오고 있어요. 야근을 해야 하는데, 야학에 와야 할 때면 화가 나기도 해요. 그래도 수업할 때는 재미있어요. 선생님들이랑 이런 얘기하는 것도 재밌고." -마케터 C 씨. 까칠하지만 야학에 대한 애정이 묻어남


D 선생님은 한 문장으로 대답했다.


 "저는 야학에 오는 게 재밌어서 해요 ㅎㅎㅎ"


 너무 단순하다. 단지 재밌어서 하고 있단다. 대답을 들은 내 표정이 만족스럽지 않았는지 그녀는 대답을 이어갔다.


 "저는 직업이 중학교 선생님인데요. 처음에는 교사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장학사나 사기업에 인사분야처럼 교육학이 도움이 되는 다른 직업을 얻으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그런데 대학교 4학년 때 교생실습을 나갔는데요. 너~무 재밌는 거예요. 이게 제 일이다 싶었어요. 그래서 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거든요. 야학도 그래요. 야학에서 학생들 가르치는 게 재밌어요."




 A부터 D까지 모든 선생님들은 재밌으니깐 야학에 오고 있다고 한다. 보람을 느끼는 것도 재미의 일부분이다. 재미로 봉사활동을 한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다. 나도 야학이 아무 재미가 없으면 활동을 하지 않았을 거다. 넷플릭스를 보는 사람,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 프라모델을 조립하는 사람,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재미를 위해서 한다. 봉사활동도 다른 취미들처럼 재밌어서 해야 한다. 자아실현이나 인생의 가치 같은 고차원적인 것들은 그다음 이야기다. 봉사활동도 의욕, 사명감, 책임감보다 중요한 건 '재미있게 활동하기'였다. 애초에 재미가 없으면 무엇도 할 수가 없으니깐. 나는 왜 이 점을 놓치고 있었을까.


 나는 이 활동이 재미가 있나? 매번 반복되고 있지만,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아직까지는 재미가 남아있다. 학생들의 성장을 보는 게, 새로운 선생님들과 소통하는 게. 이들과 함께하며 내 안의 여러 감정을 마주치는 게. 버겁기도 하지만, 스스로 성장함을 느낀다. 그래서 재밌다. 적어도 집에서 모르는 사람의 SNS 포스팅을 보는 것보다는 야학에서 일하는 게 재미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1년 전에 교무 선생님과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나 : "사실 저는 큰 사명감을 야학활동을 하지는 않거든요. 감정적으로 학생들을 대하지 않고 덤덤하게 하려고 노력해요."

교무 선생님 : "그게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해요. 예전에 의욕이 넘치는 신입교사가 온 적이 있었어요. 오자마자 자신의 포부를 일장 연설하고 명함을 나눠주더라고요. 기대가 컸어요. 그런데 그분이 3달 만에 잠적했어요. 아무 말도 없이 수업을 안 나오더라고요. 큰 목표를 가진 사람일수록 좌절도 크게 하는 거 같아요. 의욕과 책임감은 또 다른 얘기 같고요."

 

 교무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눴던 걸 보면, 나도 과거에는 '재미가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거 같기도 하다. 자, 이제 야태기를 극복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은 명확해졌다. 다시 예전처럼 재미에 초점을 맞춰서 활동하면 된다. 그러다가 재미가 완전히 없어지면 그때는 활동을 그만두겠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최대한 야학을 즐겨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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