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8월, 검정고시날이었다. 나를 포함해 3명의 중등반 선생님들이 응원을 나갔다. 우리는 학생분들이 시험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같이 귀가했다. 아침 일찍 시작된 시험은 오후 3시가 돼서야 끝났다. 우리는 후련한 마음으로 고사장이었던 남천중학교 학교문을 나왔다. 우리 엄마 뻘이었던 학생 애은씨는 날도 더운데 시원한 거를 먹고 가자고 권하셨다. 선생님들은 한사코 사양했으나 애은씨의 의지는 강했다.
"여기까지 와서 어째 그냥 가노. 아 먹고 가자니까는. 안 그래도 더운데 길에서 실랑이 할끼가?"
하긴. 거절한다고 물러날 애은씨가 아니다. 선생님들을 뭐라도 먹여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게다. 나는 마지못해 근처를 둘러봤다.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일요일 학교 앞이니,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들은 문을 닫았다. 그 와중에 작은 분식집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 앞에 있을법한 전형적인 가게다. 허름하지만 정 많은 사장님이 운영할 것 같은 그런 곳. 많이 걷지 않아도 되고, 가격이 비쌀 리가 없는 가게. 딱 적당하다. 우리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가게 안에 에어컨도 없었다. 주인장 할머니는 우리가 오니 선풍기를 틀어주셨다. 유감스럽게도 선풍기로 해결될 날씨가 아니었다. 푹푹 찌는 더위를 선풍기 하나로 6명이 참으면서 주문한 팥빙수를 기다렸다. 연로하신 할머니가 6그릇의 얼음을 갈아내는 게 꽤 시간이 오래 걸렸다. 5분쯤 기다렸나. 더운 날씨에 음식을 기다리는 선생님들이 마음에 쓰이셨을까. 성격 급한 애은씨가 일어나면서 팔을 걷어붙이신다.
"아이고 안 되겠다. 이러다가 한세월 기다리겠네. 내가 도와줘야겠다."
애은씨는 사장님을 거들어 팥빙수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직접 만드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물은 셀프가 맞는데, 음식도 셀프라니. 생경한 장면이다. 사장님이 곱게 얼음을 갈아내면 애은씨는 팥과 고명을 올린다. 누가 보면애은 씨가 사장인 줄 알았을 거다. 처음 온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익숙해 보였다. 야학에서 공부할 때는 애은씨의 똑 부러진 모습을 보기 힘들었는데, 주방에서는 눈과 손이 빠르시다.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수저는 어떻게 찾으셨는지. 자신의 구역에서 보이는 전문성이란. 덕분에 우리는 팥빙수를 오래 기다리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선생님, 지하철 역 쪽에 가면 시원한 커피숍들 많드만. 왜 덥게 이런 데를 가자고 했어요."
가게를 나와서 애은씨에게 이런 핀잔을 들었다. 그러게나 말이다. 좀 더 걸어가서 스타벅스에 갔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반팔옷을 꺼내는 계절이 오면 그날 먹었던 팥빙수가 생각난다. 요즘 유행하는 눈꽃 얼음, 갖가지 토핑이 올라간 팥빙수가 아닌 옛날 스타일. 오히려 그런 평범한 팥빙수를 더 찾기 힘든 요즘이다. 사실 애은씨가 만들었던 팥빙수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맛은 평범했을 것이다. 그래도 내 평생 먹었던 팥빙수 중 가장 기억에 남아있는 여름 간식이 되었다. 여러모로 뜨거운 팥빙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