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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May 01. 2023

별 거 아닌 것들

야학 졸업식 후기

 올해 졸업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야학에 오신 지 10년이 넘으신 E선생님이 이런 건의를 했다.


 "졸업하지 않는 분도 다 학사모를 쓰고, 가운을 입고 사진을 찍으면 좋겠어요. 예전에 한 어머님께 졸업이 아니라 가운을 안 입혀 드렸는데, 그 해에 돌아가셨어요. 그게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우리 야학은 3개의 학급을 운영 중이다. 그중 가장 높은 반인 고등반을 마친 학생만을 졸업으로 인정한다. 초등반과 중등반 이수자는 '수료증'을 주지만 졸업장은 주지 않는다. 그리고 여태껏 졸업자에게만 학사모, 졸업가운을 입혀드렸다. 수료자는 어차피 야학에 계속 오셔야 하기 때문이다. E선생님은 이게 못내 아쉬우셨나 보다. 생각해 보면 E선생님 말이 맞다. 어린이집도 3살짜리 아이한테 학사모를 씌워주는데, 우리가 못할 게 뭔가. 어려운 게 아니니 나도 동의했다. 하지만 하루 빌려도 한 벌에 3만 원에 달하는 그 비용이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나보다 훨씬 야학 경험이 오래된 E선생님도 이런 내 속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E선생님은 내 허락을 구한 그날부터 중고거래 플랫폼을 뒤지기 시작했다. 3일쯤 지났을까. E선생님이 당근마켓에 올라온 졸업가운 무료 나눔글을 보여주셨다. 한 기관에서 쓸모가 없어진 졸업가운을 대량으로 무료 나눔 하는 글이었다. E선생님은 직접 졸업가운과 학사모 스무 세트를 받아서 의기양양 들고 오셨다.



 나는 즐거운 졸업식을 만들고 싶었다. 엄숙한 분위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경건한 세리머니보다는 북적거리는 잔칫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책상에 다과, 떡, 술을 깔았다. 일부러 졸업식을 제시간보다 10분 늦게 시작했다. 그사이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다과는 긴장을 풀어주길 바랐다. 나의 기대와 다르게 미순 씨는 다과를 쳐다만 볼 뿐, 손을 대지 않으셨다. 졸업가운이 어색하신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낯선 걸까. 내 작전이 실패인가. 그 순간, B선생님이 다이소에서 산 개당 2000원짜리 샴페인잔을 두 손 가득 들고 나타났다. 그리곤 마치 역전 신문팔이처럼 이렇게 외치며 교실을 누빈다.


 "자, 오늘 학생분들은 이 잔에 샴페인을 드셔야 해요."


 다과에 손을 대지 않던 미순 씨는 반사적으로 이렇게 외치셨다.


 "어머, 난 저 예쁜 잔에 마셔야겠어."


 B선생님이 나보다 한수 위다. 금세 분위기는 화기애애해졌다. 인순 씨가 수료증을 받으러 나오셨는데, 얼굴이 이미 발그레해져서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샴페인이 입에 맞으셨나 보다.



 올해는 개근상을 준비했다. 수업과 야학 행사를 빠지지 않고 참여해 주신 학생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마련했다. 마련이라는 말도 민망하다. 종이 한 장에 글씨 몇자 적은 후, 가벼운 선물을 고르면 뚝딱 만들어진다. 나와 같이 수업했던 미영 씨도 개근상을 받았다. 그녀는 충분히 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많은 급우들이 공부를 포기할 때, 꿋꿋이 미영 씨는 그 자리를 지켰다. 점점 휑해지는 교실에 등교하는 미영 씨의 심정이 어땟을지 나는 알고 있다. 수상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미영 씨는 상기된 채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래 나는 개근상을 줘야지. 내가 비가 와도 미끄러운 내리막을 겨우겨우 걸어서 학교에 왔는데. 안 주면 서운할 뻔했어!"


 이 수상소감에서 어머님의 기쁨과 회한이 느껴져서 나도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자신의 노고를 타인에게 인정받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얻어온 공짜 학사모, 싸구려 술잔, 종이 한 장이면 만드는 개근상. 정말 별 거 아닌 것들이다. 이 별거 아닌 것들이 나를 열심히 하고 싶게 만든다. 나도 선한 사람이라고 아주 잠깐 착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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