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정 반대편인 이곳과 한국은 12시간 시차가 있다. 자고 일어나니 한국에서 선배들이 일한 메일들이 쌓여있다. 내가 저질러 놓고 온 업무 실수를 수습하고 계셨더라. 아유 아직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올해 인생 농사는 완전히 흉년이다. 11월에 돌아보니 이룬 것이 없다. 지금쯤이면 프로젝트도 척척 진행하고, 따고 싶은 자격증도 수월하게 딸 줄 알았다. 여자 친구도 생겨서 폴 킴 연말 콘서트 티켓을 살 궁리도 할 줄 알았지. 헬스도 1년쯤 하면 몸이 좋아질 줄 알았는데, 왜 아무도 내가 헬스 하는 걸 모르나요?!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수확물 없는 농부의 심정이 이럴까. 시간이 더 이상 내 편이 아닌가 보다. 날이 갈수록 직장도, 연애도, 내 마음건강도, 무엇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부에노스 아이레스 여행에 나선다. 오늘은 무료 도보투어에 참여할 셈이다. 참가비는 따로 받지 않고, 투어 후에 만족한 만큼 팁을 주면 된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는 첫날 가이드 투어를 적극적으로 고려한다. 도시의 주요 관광지와 그에 대한 배경지식을 습득하면 이후 여행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는 한국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한국어 지원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오늘의 투어도 다국적 관광객이 참여하는 영어 투어다. 사실 영어 투어는 반도 못 알아듣지만, 아예 듣지 않는 것보다는 듣는 게 도움이 된다. 투어를 들면서 이해를 못 하는 내용은 그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이해를 보충하기도 한다.
오늘의 도보투어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주요 관광지가 모여있는 곳을 세 시간가량 걸으면서 설명을 들었다. 오벨리스크, 마요 광장, 대통령궁, 의회 건물 등 널찍한 공원과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인상적이다. 분위기는 유럽인데, 사람들의 문화는 남미라서 오묘한 매력이 있다. 오늘 투어에서 가이드가 설명해준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특히 재미있었다. 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유럽풍의 건물양식들이 많은지, 아르헨티나인들이 사랑하는 역사적 인물들, 그들의 문화를 다방면으로 들으면서 여행의 맥락이 생겼다. 어디 그뿐인가. 어디서 먹어도 맛있는 아사도, 정열적인 탱고, 친근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이곳에 온 내 결정을 후회하지 않게 한다.
투어를 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아르헨티나의 문화, 건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구나. 스페인의 식민지, 세계를 주름잡는 경제대국, 여러 독재정권과 그에 맞선 시민들의 세월을 거쳐 지금의 매력적인 나라가 되었다. 이민자들이 고된 삶을 달래기 위해 추던 춤인 탱고는 지금 세계적인 춤의 장르가 되었다.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희생자들의 어머니들이 벌이는 목요집회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집회는 현재 여행자들까지 참여할 정도가 되었으니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다. 아르헨티나는 이런 역사의 흥망성쇠를 수차례 거치고 나서야, 내가 여행 오고 싶은 국가가 되었다. 이 과정은 현재 진행 중이기도 하고. 내 삶도 그런 게 아닐까. 매년 좋을 수는 없다. 좋은 시절도, 슬픈 시절도 섞여서 내 삶이 만들어질 것이다. 좋은 시절만 있는 나라는 없을뿐더러, 있다한들 여행하는 재미도 덜할 것이다.
창덕궁에 은행나무가 생각난다. 이 나무는 워낙 크기도 하고 주변 궁궐과 잘 어우러져서 사람들의 주요 사진 촬영 장소가 된다. 창덕궁에 간 사람 치고 이 은행나무에 시선을 주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나무가 매년 은행열매를 잘 맺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긴 세월 동안 이 나무가 살면서 만들어낸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한다.
매년 내가 많은 걸 수확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너무 의기소침하지 않으려고 한다. 좋은 시절, 슬픈 시절의 세월이 쌓여서 만들어진 내 모습이 제법 멋졌으면 좋겠다. 지금의 좌절은 훗날을 위한 좋은 양분이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어쩌면 시간은 내 편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