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야학에서 3번째 학기를 보내고 있는 은이 씨에 대한 이야기다. 2년 전 은이 씨의 첫인상이 지금도 기억난다. 은이 씨는 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들게 하는 학생이었다.
입학식 날이었다. 작은 체구의 그녀가 책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그렇게 힘겨워 보일 수가 없었다. 다리힘이 부족한지, 난간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겨우겨우 한 발씩 떼던 그녀의 모습.
'내가 이 분과 함께 1년을 보내야 한다고? 계단 오르내리는 것도 힘든 분과? 이게 맞는 건가?'
이리 유약하신 분을 데리고 공부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게 영 부담스러웠다. 짐을 떠안은 느낌이었다. 자기 몸도 가눌 힘이 없으신 분에게 공부를 머릿속에 넣어줄 수 있을까. 아니, 이거 공부가 아니라 그녀에게 벌칙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은이 씨의 학교생활은 첫인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대체로 조용했다. 자기주장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다른 학우들과 마찰도 일으키는 일이 없었다. 그저 우리 주위에 흔하디 흔하게 있는 내성적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집안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옛날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과도 닮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은이 씨는 계속 신경이 쓰인다. 그녀의 작은 목소리만큼이나 은은하게. 학생이 많다 보면 은이 씨 같은 유형의 학생들에게는 신경이 덜 쓰게 된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속담처럼 주장이 강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분들에게 관심을 더 가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녀는 예외다. 희한하게 조용한 그녀가 잊을만하면 내 시야에 들어온다. 판서를 하다가 뒤를 돌아본다. 은이 씨의 눈빛을 본다. 과연 그녀가 이해를 하고 있는 건지 불안해서다. 나는 왜 은이 씨를 신경 쓸까. 그녀의 인상 때문이다. 유약한 그녀를 그냥 두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실 것만 같아서 불안하다. 실제로도 은이 씨가 우등생은 아니다. 그녀는 남들보다 10초가 느리다. 내가 교과서를 펴라고 하면, 남들이 다 교과서를 챙기고 10초가 지나야 그녀는 교과서를 찾는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서 도와주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 수학문제를 푸는 시간이었다. 남들은 벌써 5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은이 씨는 아직도 두 번째 문제와 사투 중이다. 대체 어디서 막히는 건지 보려고 그녀가 문제를 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끼자 그녀의 연필은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는 "선생님, 계속 보고 계시면 부끄러워요. 머리에 아무 생각도 안 나요."라고 고백하신다. 그녀를 어쩌면 좋을까. 멘탈 개복치 그녀, 쉽지 않은 상대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닌 것 같다. 깍쟁이 연지씨도 은이 씨를 챙겨준다. 새침한 연지씨가 누구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건 처음 봤다. 느릿한 은이 씨가 칠판의 필기를 다 못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옆에서 연지씨가 대신 필기를 해준다. 은이 씨가 수학 문제를 못 풀고 헤매면, 옆에서 연지씨가 가르쳐준다. 볼수록 신기할 노릇이다. 이렇듯 은이 씨는 사람들을 친절하게 만드는 재주를 타고났다.
예전에는 걱정이 많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은이 씨가 이 생활을 즐기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은이 씨는 야학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소풍 때 은이 씨와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은이 씨, 매일 저녁에 공부하시는 게 안 힘드세요?"
"괜찮아요 선생님. 저는 야학에서 공부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해요."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빈말이 아닌 게, 그녀는 학습속도를 빼고는 야학생활에 누구보다 모범적이다. 그녀는 출석률이 무척 좋을뿐더러, 모든 야학행사를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동네 이웃사촌을 신입생으로 데려왔다. 본인이 야학생활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지인을 데려오지는 않았을 거다. 이뿐만이 아니다. 가끔 선생님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한다. 오래 결석하는 학생이 있으면 은이 씨가 자진해서 연락해 보고, 결석자의 근황을 선생님들께 전하기도 한다. 이렇듯 그녀는 우리 야학의 우수사원이자, 영업사원이다. 그녀의 느린 학습속도가 갑갑한 건 나 자신이지, 정작 본인은 학교생활을 즐기고 있는 중이다.
은이 씨는 지금 재수생이다. 저번 검정고시에서 불합격해서, 같은 내용을 두 번째 공부하고 있다. 동급생들이 상급반으로 올라갈 때 기운이 빠질 수도 있지만, 은이 씨는 밝다. 수업하다가 은이 씨의 혼잣말을 들었다.
"다음반으로 안 올라가서 다행이야. 지금 하는 공부도 이렇게 어려워하는데, 다음반에 갔으면 어쩔 뻔했어. 여기서 기초공부를 다시 해야지."
이런 마음가짐은 나에게 귀감이 된다. 과정이 아무리 훌륭했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아서 좌절하는 건 나도 예외가 아니기 때문이다. 회사의 보고서에는 내 업무의 결과만 적힌다. 내가 어떤 고민과 과정을 겪었는지 적을 공간이 없다. 나도 점점 보고서같이 사고하는 사람이 되어간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녀가 고맙다. 그리고 다음 시험에서는 합격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과, 시험의 합격여부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동시에 들어서 마음이 복잡해진다.
시험을 연달아 불합격하면 많은 학생들이 포기해 버린다. 아마 창피하기도 하고, '해봤자 안되더라'라는 무력감도 들것이다. 부디 은이 씨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지금처럼 시험의 합격여부 때문에 기죽지 않게, 결과보다 과정을 즐길 수 있게, 그녀의 즐거움을 응원하는 게 내 역할이다. 우리의 목표가 '시험 합격'이 아니라, '학교생활의 즐거움'이란 것을 그녀가 계속 보여줬으면 좋겠다. 그녀가 계속 야학에서 행복하다면, 나도 내 생활에서 결과에 얽매이지 않고 과정을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 내 노력을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삶의 동기부여를 나 스스로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