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와 아욱국
비 오는 날, 숲 속은 다른 세계의 문을 연다.
며칠째 내리는 가을비가 숲길을 적신다. 우산을 받쳐 들고 걷는 발걸음마다 낙엽이 물기를 머금고 축축하게 가라앉는다. 몸도 마음도 묵 지근하다. 우산살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속삭이듯 다정하지만, 나뭇잎에 부딪히는 소리는 어딘가 쓸쓸하고 차갑다.
우산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물기에 젖어 더 선명하다. 나뭇잎에 동그란 빗방울들이 투명하게 달려 있고, 바람 따라 떨어지는 낙엽들은 그동안 제 몫의 임무를 완수한 듯한 표정이다. 연둣빛 새순으로 태어나 한여름 열정적인 푸르름을 자랑하던 잎들이 조용히 퇴장을 준비하는 이 계절, 숲의 시간을 바라보며 정년을 맞이하고 지내는 나의 인생과 겹쳐 보인다.
비 맞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문득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이들은 차가운 빗물을 맨몸으로 맞는 기분이 어떨까. 여름의 땀 흘린 흔적이 씻겨 나가서 시원하고 개운한 걸까, 아니면 차가운 한기에 몸을 움츠리며 버티는 중일까. 산책길의 나무들은 가을 준비로 분주하다. 청설모 부부가 오르락내리락하며 도토리를 옮기고, 말 없는 숲 속 친구들은 늘 그 자리에 묵묵한 존재감으로 나의 사소한 푸념을 들어주며 힘든 하루를 위로해 준다.
지난 계절 폭우와 태풍, 뙤약볕을 이겨내며 살아온 그들이 이제는 울긋불긋 다양한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다. 그 변화를 바라보며 퇴직 후 시니어 상담사, 문화해설가, 브런치 작가, 학습관 학생등 요일별로 다채로운 옷을 갈아입고 바쁘게 살아가는 나의 일상생활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예쁜 꽃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수명을 다하지만, 예쁜 단풍잎은 눈이 가고 손이 간다. 몇 개를 주워 책 속에 보관하고 가끔 들여다본다. 나의 인생도 화사한 봄을 지나 열정의 여름을 보내고 황금빛 가을로 접어들었다. 젖은 낙엽이 아니라 곱게 물든 가을 단풍꽃 되어 책갈피에 담아두는 가을을 맞고 싶다.
숲 속 친구와 눈 맞춤 시간이 길었나 보다. 몸이 굳은 듯하여 걷는 걸음에 변화를 주었다. 체온을 올리기 위해 빠르게 걷기를 하고, 힘들면 보폭을 넓게 하면서 천천히 걷다가 가볍게 뛰다가 숨이 차오르면 정자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본다. 짙은 구름이 늘어진 하늘 아래 새들은 낮게 날갯짓하고 노란 단풍 하나가 살포시 내려와 운동화 위에 앉는다. 저 무게감 있는 하늘 아래 혼자 앉아 있는 지금 단풍을 집어든 손은 마르고 굽은 고목처럼 앙상하다. 말 한마디 없이 동네 분들이 걸어간다. "안녕하세요? 가을이네요." 인사를 건네본다. 그들 또한 속으로는 계절의 변화에 쓸쓸함과 낭만을 가득 품고 있을 것이다.
산책길 흠뻑 젖은 분위기에 빠져 자신과 심오한 대화가 길어졌다. 잠깐의 방심이 감기를 부른 듯하다. 따뜻하게 커피를 내릴까, 잠시 멈췄다. 오후 4시를 넘긴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 분명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한다. 몸도 데워지고 열을 내주는 생강차를 선택한다.
작은 주전자에 김이 올라오고, 따뜻한 차 한 잔이 손끝에 닿자 스르르 몸이 풀린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매콤하고 알싸한 그 온기에 마음마저 아득해진다. 뜨거운 차 한 잔이, 온종일 말하지 못한 깊은 감정까지 다독여준다.
뒷산 숲길을 걷다 보면 길 끝에 주말농장이 있었다. 쪽파와 고구마, 무, 고추, 아욱들이 아직 푸른빛으로 반짝인다. 농장에서 바라보던 싱그러운 아욱이 눈에 아른거린다.
어린 시절 찬 바람이 불던 날, 어머니는 텃밭에서 따온 아욱으로 된장국을 끓여주셨다. 손끝으로 바락바락 문지르며 "이건 살살 씻으면 안 돼"라던 말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쌀뜨물에 된장을 풀고 마른 새우, 아욱, 양파, 호박을 넣으면 구수하고 달큼한 가을이 국물 속에 녹아든다.
기억을 더듬어 아욱 된장국을 끓인다. 예로부터 "가을 아욱국은 싸리문을 걸어 잠그고 먹는다"라고 했다. 그만큼 귀하고 보약 같은 따뜻한 밥상이다. 따뜻한 쌀밥 한 덩이 말아먹으면 몸이 후끈해지고 속이 든든하다. 딸은 '국물이 구수하고 담백하다며 할머니 하고 같이 먹던 맛이다'라고 엄지 척을 해준다. 일교차가 큰 환절기에 먹으면 열감이 확 오르면서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짧은 가을이 가기 전 아욱 된장국을 자주 식탁에 올려야겠다.
가을은 조용히 일상 속으로 들어온다. 마음 깊은 곳에 살며시 다가와 속삭인다. "혼자여도 괜찮아. 너만의 고독과 낭만적인 가을을 천천히 즐겨봐."
비 내리는 숲길에서 나이 듦에 대한 잊고 있던 감정과 기억을 다시 꺼낸다.
빗속의 나뭇잎처럼, 단풍비가 내리는 날에 오색의 단풍은 내년을 약속하며 삶의 끈을 놓는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젊은 날의 조급함을 내려놓는 일이다. 한 그릇의 따뜻한 된장국처럼 마음을 데워주는 여유와 사색의 시간을 갖는 일이다. 가을비는 여전히 내리고, 빗소리 속에서 나만의 계절을 곱게 물들이는 방법을 고민하는 밤이다.
아욱된장국
(재료)
아욱 한 단, 마른 새우 1컵, 애호박 반개, 양파 반 개, 청양고추 1개, 쌀뜨물 5컵,
된장 2큰술, 고추장 반 큰 술, 대파 1개, 마늘 1큰술
(만들기)
- 아욱은 줄기 끝의 두꺼운 부분을 꺾어 껍질을 벗긴다. 물에 담가 손으로 바락바락 주물러 초록 물을 여러 번 헹궈 물기를 꼭 짠다.
- 마른 새우는 프라이팬에 기름 없이 볶아 비린내를 날려준다.
- 애호박은 반달 썰기, 양파 반 개를 채를 썰고 청양고추는 곱게 다져놓고 대파는 어슷하게 썬다.
- 냄비에 쌀뜨물을 붓고 아욱과 된장, 고추장을 푼다. 마른 새우를 넣어 끓인다. 바글바글 끓어오르면 중간 불로 끓인다.
- 소금으로 간을 하고 대파와 마늘을 넣고 한소끔 더 끓이면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