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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맛

내 손이 비어야 잡을 수 있다

by 수련

오래된 집의 시간

햇살이 기울어 창문 틈새로 스며들면, 벽의 액자와 바랜 커튼, 마루의 냄새까지 세월의 그림자처럼 느껴졌다. 가을하늘은 괜스레 마음을 흔든다. 이젠 삶의 변화를 줘야 하는 때이다. 지난 주말, 큰 결심을 하고 30년을 살아온 집을 정리하고 이사를 했다.


이사를 위한 짐 정리를 하면서 화장대 옆 작은 서랍을 여니, 아이들이 어릴 적 써준 편지들이 한가득이다. 어버이날의 감사 편지, 생일 축하 카드, 삐뚤빼뚤한 연필로 꾹꾹 눌러쓴 “엄마, 사랑해요.”라고 적힌 문장. 그 글씨를 보는 순간 초등학생이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원지에서 바이킹을 타다 무섭다고 울던 아이, 운동회 날 상장을 받으러 뛰어가던 뒷모습. 사진 한 장, 글자 하나마다 소중한 추억의 시간이 묻어 있다.

그 겁쟁이 아이는 이제 아버지가 되었고, 딸은 독립해서 자기 삶을 꾸리며 살기 시작한 지 오래되었다.

아이들은 떠났지만, 그들의 흔적은 여전히 집 안에 남아 숨 쉬고 있었다. 그 시간들을 관리하며, 실은 ‘지나간 나’를 붙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집은 젊은 날부터 지금까지 일상의 흔적이며 삶의 희로애락을 모두 담고 있었다.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독박육아와 남편 내조에, 외출 한 번 마음대로 못하던 시절, 그래도 살림하는 재미에 빠져 집 안 구석마다 정성을 쏟았다. 예쁜 소품으로 집안을 꾸미고 철 따라 화분을 갈아주고, 귀한 광주요 다기 세트를 구매한다고 먼 길을 달려가고, 어렵게 구한 청자 동백 다기에 세작 녹차를 내려 가족과 향을 나누던 순간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었다. 여주 도자기 축제에서 고민하며 고른 장인의 식기세트, 백화점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구입한 뷔페 접시. 그 시절의 물건들은 내 삶의 기록이자 자취였다. 하지만 예쁜 그릇들은 이제 너무 많아 집안을 잠식하고 세월의 무게가 되어 나를 짓누른다.

버리기 어려운 건 물건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아이들이 독립하면서 ‘집을 줄이자’ 다짐한 지 5년 만에야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서재에 앉아 묵은 상자를 열 때마다 기억이 먼지처럼 코끝을 찔렀다.

“이건 아이 유치원 때 쓰던 거니까…”, “이건 남편이 출장에서 사 온 거니까…”

그렇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대면서 미루는 사이, 많은 물건이 집안곳곳에 파고들어 나를 지배했다.


정리하지 못한 사진, 초등시절부터 모아둔 두 아이의 상장, 신혼 때 배우던 요리책 전집, 영어회화 테이프, 다기 세트, 접시들. 모든 것에 체온이 스며 있었다. 그러나 정작 버려야 했던 것은 ‘물건’이 아니라 ‘예전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네 명의 가족이 시끌벅적하게 떠들고 함께 밥을 먹던 따뜻했던 지난 시간.


이제는 놓을 때가 지난 것 같다. 동생이 알려준 중고 가게 앱을 설치하고 뷔페용 접시, 다기 세트, 커피잔, 라탄 유리 테이블, 빈티지 청동 촛대를 내놓았다. 무료 나눔과 만원, 오천 원.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손에서 떠나는 걸 보며 시원섭섭했지만, 누군가 그 물건을 다시 써주길 바라며 정성 들여 황금색 보자기로 포장하여 마음을 전달했다. 행복해지려고 산 물건들이, 이젠 나누고 버림으로써 나를 자유롭게 했다. 아이들이 떠난 집은 조용했다. 낮엔 텅 빈 햇살이, 밤엔 절집 같은 고요함이 너무 커서 낯설었다. 집과 물건들을 붙잡고 있었지만, 사실은 ‘지나간 시간’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작아진 집, 가벼워진 마음

이삿짐을 옮기던 날, 창밖으로 바람 따라 낙엽이 흩날렸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털어낸 내 마음 같았다.

넓은 집에서 작은 집으로 옮긴 첫날, 공간은 좁고 낯설었다.

습관적으로 전등 스위치를 찾다 헛손질하고, 수납공간이 부족해 어수선하고 불편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 불편함이 여유로 변했다. 청소할 공간이 줄어들었고, 움직이는 동선이 짧아지자 몸이 가벼워졌다. 무릎이 시큰한 나이에 이만하면 충분했다.

예전엔 손님을 초대하면 내방하신 분의 이미지를 고려해 그릇을 고르고 식탁을 꾸미는 게 즐거움이었다. 이젠 간단하게 식탁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버릴수록 공간이 생기고, 덜 가질수록 마음이 넉넉해진다. 차를 좋아하고 취미로 모은 많은 다기 세트도 나눔으로 가벼워졌다.


가을 햇살 아래 창가에 앉아 책 한 권을 펼치면, 그 순간이 하루를 채운다.

일상의 부피는 줄이는 만큼 깊어진다.

종일 짐 정리하느라 제때 끼니를 챙기지 못해 갑자기 허기를 느낀다. 호박과 두부가 들어간 엄마의 손맛, 짭조름한 된장찌개가 문득 그리웠지만, 끓이지 않고 새 부엌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비움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다

살면서 나를 무겁게 한 건 물건이 아니라, 그 물건에 꼬약꼬약 매달린 감정이었다. 못 버린 건 짐이 아니라 미련이었다.

거실 가득 햇살이 드는 오후, 작은 책상 위에 노트북과 책 두 권, 노트 한 권, 따뜻한 차 한 잔이면 충분하다. 살림이 단출해지자 일상이 가볍고, 여유로움 속에 마음이 고요하고 평화롭다.


다가 올 겨울엔 따뜻한 거실에 앉아 햇빛 받으며 털실로 대바늘 뜨개질을 하여 목도리를 만들 예정이다.

포근한 목도리를 아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보내려 한다. 그 안에 엄마의 시간과 사랑, 고국의 겨울 햇살 한 줌을 담을 것이다.

엄청난 살림살이 대부분을 비우고 나니 비로소 나의 공간이 보인다.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내려놓아야 현재의 온전한 나로 살아갈 수 있다.


적당하게 아담하여 두 명이 살아가기 따뜻한 집, 조촐한 살림, 그 안에 깃든 시간과 마음. 이것이 노년에 지향하는 미니멀 라이프, 단순함 속에 풍요로운 삶이다.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선, 내 손이 비어 있어야 한다.”

30년 만의 이사는 묵은 짐을 비우고 나누는 작업이 힘들었지만 소중한 진리를 가르쳐주었다. 텅 빈 집이 아닌 작고 아늑한 집에서, 비워진 손으로 오늘을 잡는다. 매 순간 감사하며, 가볍게, 나답게 살아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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