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겨울의 맛

이모의 꾸러미

by 수련

1990년대 초, 지금처럼 배송이 빠르지도 않고 다양하지도 않으며 택배라는 단어에 익숙하지 않았다. 대신 사랑과 인심은 고속버스를 타고 왔다. 가을 추수가 끝나갈 무렵이면, 충남 공주에 살고 있는 이모는 농산물 상자를 버스 짐칸에 실어 보내셨다. 집 전화로 연락을 받고 터미널에 나가 버스를 기다리며 번호를 확인하고 기사님께 많은 짐을 건네받는다.


쌀포대와 땅콩상자를 열면 일 년 동안 이모의 땀과 햇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윤기 나는 햅쌀, 신고배의 단단한 살결, 대파의 매운 향, 깻잎과 청양고추, 늙은 호박, 참기름 그리고 된장과 청국장. 세상 어디에도 팔지 않는, ‘이모표 인생 꾸러미’였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매년 가을이면 농사꾸러미를 보냈고 특별히 서리태 청국장을 만들어 건조해서 보내주시고 우유에 넣고 갈아먹으라며 보내기도 했다.


어느 해엔 라면 상자에 동그랗게 숨구멍 세 개를 뚫어 살아있는 씨암탉을 넣어 보내신 적도 있다. 구멍 사이로 닭의 숨결이 새어 나오던 그날, 가족들은 깜짝 놀랐고 키울 수도 없고 더구나 닭을 잡아본 적 경험이 없던 우리는 동네 정육점으로 들고 가 부탁을 드렸다. 그 겨울, 식탁 위로 피어오르던 닭백숙의 하얀 김과 함께 이모의 깊은 정이 퍼졌다.


아버지의 생신은 음력 9월 말, 양력으로는 11월 말 또는 12월 초순이 된다. 그때면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고, 이모는 손수 만든 생강식혜며 동부팥으로 만든 인절미등을 바리바리 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오셨다.


남편을 일찍 여의고 다섯 아들을 홀로 키워낸 분이다. 아버지가 조카들을 서울로 불러올려 공부시키고 취업까지 챙긴 은혜를, 이모는 평생 갚지 못할 빚처럼 마음에 담고 사셨다.

“딸이 없어 외롭다.”라는 말을 푸념처럼 하셨다.

아들 오 형제를 혼자 키우느라 고생한 마음을 한숨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잘 자라준 자식 자랑을 할 때마다 눈가가 젖어있었다.


큰아들은 시골에서 쌀농사와 과수원을 하면서 봄에는 딸기를 키우고, 둘째는 서울의 유명 호텔 주방에서 요리사를 하고 있다. 부지런함과 야무진 성품은 어머니의 유산처럼 자식들에게 고스란히 옮겨갔다.


결혼 후 첫 시제 날, 집안 어른들과 선산에서 제를 지내고 이모 댁에 인사드리러 갔다. 과수원 옆 안채는 아들 내외가 사는 현대식 양옥이었고, 이모는 그 옆 황토 흙집에 따로 지내고 계셨다.


도배도 안 된 벽에는 볏짚과 황토의 결이 살아 있었고, 한지로 바른 장판은 콩기름이 스며 반들반들 윤이 났다. 아궁이에 장작불로 덮인 아랫목은 그 자체로 포근한 품이었다.

“흙집이 사람을 살려, 나는 여기가 좋아”라고 하셨다.


이모는 집에서 키우던 암탉을 잡아 볶음탕과 손수 만든 청국장찌개를 만들어 주시며 반찬이 마땅치 않다고 걱정하셨다. 된장국만 먹고 자란 나에게 처음 보는 청국장을 밥에 비벼주시고 총각무를 얹어주셨다. 그때는 무슨 맛인지 모르고 냄새만 고약하다고 생각했다. 몸에 좋은 거야, 이모는 순박하게 말씀하시며 웃으셨다. 그 웃음은 땅의 냄새처럼 따뜻하고, 묘하게 오래 남았다.


그 땅이 그녀를 품기엔 너무 고단했다. 어느 해, 무리한 농사일 끝에 이모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반신이 마비된 몸으로도 지팡이에 의존하며 농사일을 하고 때때로 신흥사에 다니며 자식들을 위해 108배를 올리셨다. 기도가 끝나면 무릎은 퉁퉁 부어 있었지만, 표정은 언제나 인자하고 고요했다.


팔순이 넘어 거동이 불편하여 요양원으로 모셨을 때, 찾아뵈었다. 이모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와줘서 고맙다. 애들 고생 안 시키고, 날씨가 사납지 않을 때 가고 싶다.” 그 온기가 아직 손끝에 남아 있다.

그 겨울이 지나고, 진달래가 피던 봄, 이모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돌아가시면서도 자식들 불편할까 봐 걱정하시는 분이었다. 평생 땅을 일구며 손가락마저 굽어버린 그분의 손길이, 이제는 은은한 별빛이 되어 어두운 밤 빛으로 내려앉는다.


오늘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손끝이 시리고 머리까지 얼얼한 퇴근길이다.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청국장을 꺼냈다. 지난 9월, 용문사 여행길에 우연히 들른 양평 한정식 식당이 유명한 맛집이었다. 직접 손두부를 만들고 청국장을 띄운다고 하여 사 온 것이다. 냄비에 육수를 넣고 청국장을 풀자, 이모의 과수원 별채 흙방이 떠올랐다.


볏짚을 덮은 발효된 콩에서 뻗어 나오던 하얀 실, 절구에 찧던 거친 손길, 그리고 “질부, 많이 먹어” 하시던 목소리. 이모 덕분에 청국장을 알게 되었고 매년 만들어 보내주셔서 그 냄새가 이제는 익숙하다. 아이들은 어릴 적 냄새가 고약하다며 코를 막고 도망가더니, 이제는 냄새는 좀 그래도 “콩알이 부드럽고 고소하여 은근히 맛있다”라고 말한다.


세월이란, 결국 이상한 냄새조차 편안하게 만드는 마법 같다.

청국장이 끓는 냄비 속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쿰쿰한 냄새가 이모의 손끝처럼 부드럽게 마음을 감싼다.

이모가 처음 청국장 먹는 법을 가르쳐 준 대로 밥에 슥슥 비벼 총각김치하나 올려 본다.


“이모, 아드님들도 손주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하늘에서 편히 쉬세요.”


오늘 저녁, 과수원 별채 이모의 황토방을 그리며 정겨운 풍경을 끓인다.

따뜻한 청국장 한 그릇 속에, 겨울의 맛과 그리움이 깊게 스며 있다.

청국장.jpg





[청국장찌개]

〈재료〉

청국장 2스푼, 느타리버섯 한 줌, 양파 반 개, 청양고추 2 개, 두부 반 모, 대파 반 개, 마늘

〈만들기〉

1. 감칠맛을 내는 다시마를 찬물에 담가 우려낸 뒤 끓기 시작하면 바로 건져낸다.

2. 끓는 물에 데친 느타리버섯과 양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넣고 끓인다.

3. 청국장 두 숟가락을 넣고 콩알이 퍼질 때까지 적당히 끓여졌다면 두부를 넣고 조금 더 끓인 후 청양고추와 마늘, 대파로 마무리한다.

4. 오래 끓이면 텁텁할 수 있고 향이 진하므로 살짝만 끓여줍니다.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1화가을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