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지 김치
초겨울이 오기 전, 가장 먼저 집 안을 흔드는 건 바람도 찬기운도 아닌 진득한 흙냄새였다. 땅이 얼기 전에 아버지와 오빠가 뒤뜰로 나서 삽을 꽂는 순간, 겨울의 문턱이 비로소 열렸다. 둔탁한 쇳소리가 흙 속으로 울려 퍼질 때마다 우리 집의 겨울 준비는 따뜻하고 든든해진다.
냉장고가 흔치 않던 어린 시절, 장독대 옆의 토굴은 한 해 농작물을 품어내는 또 다른 움집이었다. 햇빛과 바람을 머금고 자란 대파, 감자, 밤, 생강, 배추, 무가 굴속에서 짚으로 이불을 덮고 길고 조용한 겨울잠을 든다. 11월의 바람이 갑자기 날을 세우면 집안은 분주해졌다. 동치미, 총각김치, 무청김치, 배추김치까지 온 집이 붉고 희고 노란 김칫소로 뒤섞일 때, 밭 가장자리에는 속이 차지 못한 못난이 배추 몇 포기가 남아 있다. 어머니는 그 배추를 따로 모아 김장 소란이 가라앉을 즈음 늙은 호박김치, 호박지를 담갔다.
호박지는 단단한 늙은 호박과 배추, 무를 손끝의 결대로 썰어 가볍게 만드는 담백한 겨울김치다. 노란 속살의 호박이 배추와 어우러질 때 풍겨오는 색감만으로도 이미 따뜻한 한 끼가 완성된 듯했다.
봄이면 아버지는 당진포구에서 살아있는 칠게를 양동이 가득 사 왔다. 깨끗이 씻긴 칠게는 천일염을 뒤집어쓰고 항아리 속에서 오랜 시간을 견디며 젓국으로 다시 태어난다. 귀한 꽃게 대신 흔한 칠게를 삭혀 만든 이 칠게장은 충청도 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맛이다. 항아리에서 한 해를 견딘 칠게장을 절구에 곱게 갈아 김칫소에 넣는 순간, 바다의 진한 향과 감칠맛이 깊게 스며들었다. 아무 말 없이 그 젓국을 더하던 어머니의 손끝에는 오래된 경험에서만 나오는 비법이다.
호박지는 서둘러 먹는 김치가 아니다. 부뚜막 위 작은 항아리에서 사흘 정도 숨을 들이면 비로소 맛이 깨어난다. 숙성이 끝난 호박지를 노란 냄비에 담고 들기름을 빙그르르 둘러 끓이면, 가마솥에서 밥 짓는 소리와 함께 집안 가득 고소한 향이 퍼졌다. 가을 무의 단맛, 들기름이 스며든 부드러운 배추와 호박의 촉감은 가족을 자연스레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밥 한 숟가락 위에 올려 먹던 그 한입은 겨울밤의 만찬이다.
이제 어머니의 손길은 부엌을 지키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겨울 초입이 오면 호박지를 담근다. 칠게장을 갈던 절구 소리, 들기름 향이 피어오르던 노란 냄비, 뒤뜰에서 들리던 삽질 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포개진다. 그 기억들이 한데 모여 김장철의 그리움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 맛을 떠올릴 때마다, 사라진 손길까지도 다시 내 곁에 앉아오는 듯한 따뜻함이 천천히 가슴을 채워온다.
오늘의 그리운 음식이야기는 충청도식 '호박김치'입니다. 호박지라고도 합니다.
호박지는 늙은 호박과 배추우거지·무 등을 소금에 절여 칠게장 젓국으로 최소한의 양념으로 가볍게 만듭니다. 한 번에 많이 하지 않고 조금씩 만들어 부뚜막에 놓아 익힌 뒤 밥솥에 쪄 먹거나 쌀뜨물을 넣고 찌개로 끓여 먹는 충청도 당진, 우리 집의 별미김치입니다. 서산지역은 게 젓국으로 불리며 유명합니다.
[호박김치 만들기]
(재료)
늙은 호박 1kg, 소금 2컵, 배추 한 포기, 무 반 개, 쪽파 100g,
(양념)
- 다진 마늘 2큰술, 다진 생강 1큰술, 고춧가루 반 컵, 새우젓 3큰술, 칠게 젓국(액젓) 반컵,
소금 약간 섞어 양념을 만듭니다. 칠게 젓국이 없을 때 홍게 간장(액젓)을 써도 됩니다.
- 노란 호박을 도독하게 썰고 무, 배추도 적당한 크기로 썰어 30분 정도소금에 절여줍니다.
- 절인 호박, 배추, 무, 쪽파를 양푼에 섞어 양념을 넣어 버무려 주고 항아리에 담아 이. 삼일 정도 실온에서 숙 성합니다.
- 냄비에 호박김치를 넣고 쌀뜨물을 반 컵정도 또는 채수를 넣고, 들기름을 두르고 자작하게 끓이면
호박이 투명해지고 김치가 부들부들 충청남도식 호박김치입니다.
(버섯이나 야채를 넣고 채수를 넉넉히 부어 전골처럼 끓이면 게 젓국이라고 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