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루에 담긴 기도
장독대 위 시루에서 피어오르던 하얀 김을 떠올리면 집 안의 시간이 잠시 멈추고 다른 세상이 열린 듯하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광 속에 농사지은 곡식이 넉넉해지면 어머니는 망설임 없이 고사떡을 안쳤다. 하얀 찹쌀가루 위에 고슬고슬하게 만든 붉은 팥고물을 얹어 홀수의 켜를 단단히 쌓아 올리는 순간, 어머니는 떡이 아니라 일 년의 안부와 숨결을 빚어내고 있었다.
고사 준비는 집을 새로 짓는 일처럼 시작되었다. 초가지붕의 이엉을 다시 얹고, 방마다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집안을 털어내는 손길은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봄, 여름, 가을을 무탈하게 지나고 겨울을 맞이하는 감사하는 의식이었다.
음력 10월 상달이 오면 어머니는 시루를 꺼냈다. 새벽 첫물에 떡쌀을 담그던 장면은 시간이 흘러도 경건하게 남아 있다. 햇볕에 말린 호박고지를 검지 마디만큼 썰어 쌀가루와 섞고, 작은 시루에 쌀가루와 팥고물을, 켜를 반복해 올렸다.
찹쌀만으로 만든 시루떡은 차지기 때문에 조금 식혀두면 찰떡이 낭창거린다. 쫄깃한 찹쌀 시루떡을 보며 어머니의 삶도 저 떡처럼 보드랍게 흔들리면서도 끝내 무너지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는 삶을 살아내셨음을 보여주었다. 호박고지의 달큼함과 팥의 고소함은 어머니의 정성과 기도가 깃든 맛이다.
떡시루의 작은 가마솥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시루 본을 꼼꼼히 붙이고 경건한 마음으로 불 앞을 지켰다. 부정 타면 떡이 설익는다고 했다. 부엌을 가득 채운 팥 냄새와 김은 겨울의 냉기를 밀어내는 오래된 우리 집의 체온 같았다.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쌀가루가 묻어 있지 않으면 잘 익은 것이다. 어머니는 시루를 통째로 장독대에 옮기고 정화수를 떠 놓고 두 손을 모은다. 한동안 침묵은 조상님을 향한 인사이면서, 풍년의 감사함을 전하는 고백이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 떡을 담은 접시들은 대청마루, 광, 마당, 헛간, 우물가에 놓인다. 그 장소들은 사람이 머무는 자리가 아니라 ‘시간이 앉는 자리’였다.
이웃에게도 떡을 내밀며 “올해도 평안하길 바라네” 하고 정을 나누던 어머니는 덕담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삶을 덮어주는 가족 같은 마음이다.
“붉은팥은 잡귀를 막아주고, 찹쌀은 따뜻한 기운을 돋운다.”
어머니는 그 말 한 줄로 가족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붙들었다. 곳곳에 뿌려지던 팥 한 줌은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내쫓고 싶었던 어머니의 기도였다.
전통시장 떡집 앞에서 붉은팥시루떡을 보면, 광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던 어머니의 작은 시루가 떠오른다. 육 남매를 거두며 농사와 살림을 버텨낸 몸으로도 어머니는 늘 아담한 시루 앞에서 우리 삶을 뜸 들였다. 방앗간에서 떡을 손쉽게 살 수 있었던 시절에도 어머니는 마다하고 손수 떡을 집에서 만드는 정성을 택했다. 그 고집은 삶을 지키기 위한 한 인간의 가장 단단한 무기였을 것이다.
한 겹 한 겹 쪄 올린 떡 속에는 한 사람의 시간이, 그리고 가족을 지키려는 마음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 장거리 인생길에 결국 누군가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오래 뜸 들이는 기도의 시간을 사랑이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