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맛

손두부의 숨결

by 수련

20년 지기 친구들과의 연말 모임으로 만난 곳은 광교산 자락에 자리한 한옥 기와집이다. 식당은 마치 오랜만에 찾아온 시골집처럼 우리를 반겼다. 낮게 드리운 처마, 나무 냄새, 기와 사이로 스미는 겨울 햇살까지….

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마음이 스르르 풀리고 방에서 바라보는 큰 창문으로 밭둑에 서 있는 자작나무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식탁 위에 차려진 샐러드와 고등어구이, 도토리묵무침등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반찬들, “직접 만든 손두부”라는 말과 함께 등장한 들기름 두부 지짐, 뽀얀 비지장, 김이 모락모락 바글바글 끓는 뚝배기의 구수한 청국장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따뜻해진다. 두부 지짐의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코로 들어오고 한입 베어무는 순간 입안에 감기는 고소한 맛은 어린 시절의 부엌 풍경이 떠올랐다.


새벽 찬 기운을 등지고 서서 콩을 갈고, 하얀 거품이 끓는 솥을 지켜보며 두부를 만들던 어머니의 모습.

부엌 커다란 가마솥에서 용의 형상처럼 피어오르는 흰 김을 바라보면, 안갯속의 부엌 공기는 콩물이 끓는 뜨거운 숨으로 하루를 열었다.


아궁이 속 장작불은 오래된 이야기를 태우듯 주홍빛을 피우고, 그 온기는 어머니의 이마와 벽에 걸린 낡은 일력 위에 스며든다. 두부는 한 계절의 산물이 아니라, 한 해의 시간이 응고되어 만들어지는 음식이었다.


봄날 아버지가 밭에 뿌리던 콩 한 알이 햇빛과 비와 바람을 받아 잎을 틔우고, 여름의 땀 속에서 잡초를 이겨낸다. 가을 햇살 아래 콩깍지는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고, 마침내 마른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면, 아버지는 콩가지를 거둔다. 아버지와 동네 어른 2~3명이 낫으로 콩가지를 베거나 뿌리째 뽑기도 한다. 자른 콩 가지는 밭둑에 넓게 드러눕히거나 동그랗게 세워놓아 가을 햇살과 바람에 바짝 말린다.


콩타작 하는 날, 마당에는 아버지가 짚으로 짠 멍석이 깔리고 그 위에 콩깍지가 터지며 멍석 위로 쏟아지던 노란 콩알들. 도리깨 1)가 공기를 가를 때마다 아버지와 아저씨의 팔뚝에는 시퍼런 힘줄이 서고 ‘어야 어야–’ 하는 기합이 리듬을 탄다.


멍석 위에는 노란 콩이 무덤을 만든다. 오래되어 덜덜거리는 커다란 선풍기로 콩 껍질의 꺼끄러기를 날리고 한쪽에서는 어머니가 쭉정이 콩을 키로 까부르며 선별한다. 우리는 노란 콩을 바가지에 가득 담아 콩 자루에 담는다. 쏴아 쏴아 파도치듯 쏟아지는 소리에 배를 잡고 깔깔거린다. 그렇게 모인 콩은 곳간에서 겨울을 맞이한다.


두부를 만드는 날, 전날 깨끗이 씻어 불린 노란 콩을 맷돌 위에 물 반 콩반 한국자씩 올리면 어처구니를 잡은 손끝에서 시간이 둥글게 돌아간다. 천천히 콩은 반쪽으로 으깨지고, 몇 번을 반복하면 맷돌 사이로 흘러나온 콩물은 어머니의 고운 품성처럼 정숙하고 군더더기 없는 맛을 품는다.


한나절 동안 물을 붓고 면포를 쥐고 짜내던 어머니의 손등에는 고단한 핏줄이 파란색으로 툭툭 솟아 있다.


가마솥의 콩물이 끓어오를 때 간수 2)를 살살 돌리며 고르게 떨어뜨리면, 솜뭉치처럼, 혹은 뭉게구름처럼 말없이 몽글몽글 응고되어 순두부가 된다.


어머니는 따끈한 순두부를 국수그릇에 담아 양념간장 한 숟갈 넣고 “따뜻할 때 얼른 먹어라.” 하고 건네셨다.

한 숟갈 떠먹으면 목구멍을 타고 부드럽게 넘어가며 뱃속까지 짜르르 따뜻해진다.


나무틀에 천을 깔고 순두부를 가득 담아 광목천을 덮고 누름돌을 눌러 한나절 기다리면 정사각형의 판두부가 완성되기까지 그 안에는 밭에서부터 이어진 시간, 눅진한 손의 온기, 기다림이라는 시간, 그리고 어머니가 조용히 건네던 사랑이 담겨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날, 손두부는 우리 가족이 한 해를 살아냈다는 기록이고,

고된 농촌 생활 속에서도 서로를 지키던 겨울의 풍경이었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이던 날이면 아궁이 앞에서 웅크리고 바짝 마른 장작을 밀어 넣던

어머니의 손동작이 느릿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그저 끼니를 준비하던 몸짓으로 보였지만

지금 돌아보면 가족을 지키느라 잰걸음도 재촉하는 어머니의 고단하고 따뜻한 사랑이었다.


살을 에는 한파가 찾아오면 어머니는 광에서 콩을 꺼내 물에 담그고 기다리며, 건져 올리는 일을 묵묵히 반복했다. 그 반복은 곧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참된 온기는 아궁이의 불이 아니고 어머니의 평생을 들여 지켜온 ‘정성’이라는 시간에서 왔다.


지금 그 부뚜막의 활활 타던 불꽃도, 솥 위의 용트림하는 흰 김도 사라졌지만 어머니가 남기고 간 두부를 만들던 기억 속의 맛과 모습은 여전히 내 삶 한가운데서 조용히 나를 데우고 있다.




1) 도리깨: 콩이나 보리 등 곡식의 낟알을 떠는 데 쓰는 농기구로 긴 작대기 끝에 서너 개의 휘추리를 달아 휘두르며 치는 것이다.

2) 간수: 습기가 있는 소금 가마니에서 저절로 조금씩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모은 소금물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25화겨울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