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맛

김치말이 찜

by 수련


하늘은 회색 구름으로 두껍게 차일을 내리고 눈이 쏟아질 것같이 심술이 나있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시골집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겨울이면 많은 눈이 내렸다. 뒷산과 앞산이 하얀 이불을 덮으면 아버지와 오빠는 고무래와 삽을 들고 무릎까지 쌓인 눈을 치우느라 안마당에서 바깥마당의 눈을 치우고 윗집으로 가는 동네 길까지 한겨울에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우리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작은 빗자루로 마당을 쓸며 함께 했다. 목마르면 눈을 뭉쳐 아이스크림처럼 먹고, 눈 뭉치를 굴려 크고 작은 눈사람을 가족 수만큼 세워놓는다. 솔잎으로 눈썹을 붙이고, 대나뭇잎으로 입술을 예쁘게 만들어 주면, 등굣길 오고 갈 때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곤 했다. 처음 뭉칠 때 단단하게 잘 굴려주면 눈덩이는 소담스럽게 커지며 오래간다.

얼음판 위에서는 동네 오빠들이 팽이를 돌렸고, 우리는 썰매를 타며 신이 났다. 아버지는 일부러 커다란 논 가운데 물길을 터서 넓은 빙판을 만들어 주셨다. 동네 아이들은 그 위에 모여 얼음을 지치고, 외발 썰매와 두 발 썰매를 타며 눈 오는 날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손발이 꽁꽁 얼고 코끝이 빨개질 때까지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따뜻한 아랫목이 기다리고 있다. 발을 뜨끈한 아랫목 담요에 들이밀면 얼어붙은 온몸이 스르르 녹는다. 어머니는 노릇하게 구운 고구마와 아삭한 동치미를 내어주셨다. 노란 군고구마를 한입 베어 물면 달콤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고, 허겁지겁 먹다 목이 메면 동치미 국물을 한 모금 마신다. 그 시원하고 짜릿한 맛은 머리가 쨍한 맛이었다.


농사로 자급자족하는 시골집은 “김장은 겨울철의 양식”이라고 했다. 11월 초순부터 동치미를 시작으로 많은 김치를 만들어 항아리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 섞박지, 배추김치, 총각김치가 끼니마다 다른 김치가 밥상에 올랐다. 건넛방에는 콩나물시루가 검은 보자기를 쓰고 있고 아침, 저녁으로 물을 주면 퉁퉁하게 불은 노란 콩이 뿌리가 나면서 수북하게 올라온다.

김장김치가 숙성되어 맛이 들면 특별한 요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것을 ‘김치말이쌈’이라고 불렀다. 돌돌 말린 김치쌈을 펼치면 그 안에는 온갖 재료가 들어있었다. 다진 두부, 표고버섯, 숙주, 양파, 당근을 곱게 다져 만두소처럼 만들고, 그것을 김치잎으로 돌돌 말아 찜 냄비에 차곡차곡 쌓았다. 들기름을 두 바퀴 두르고 쌀뜨물을 부어 은근한 불에 익히면 김치의 매운맛이 부드러워지고 속 재료의 깊은 맛이 어우러져 우리 집의 담백한 일품요리가 된다.

김치찜이 완성되면 커다란 찜 접시는 밥상 한가운데 놓였고, 우리는 하나씩 집어 밥 위에 펼친다. 김치를 찢어 속과 함께 비벼 먹으면 어느새 빈그릇이다. 어린 동생들은 김치말이를 풀고 소만 골라 먹었고, 오빠들과 중학생이 된 나는 김치까지 함께 먹으며 부드러운 김치의 깊은 맛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김장김치가 알맞게 익은 요즘 기억을 더듬어 김치쌈을 만든다. 다진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반씩 섞고, 멸치육수. 사골 육수를 사용해 좀 더 깊은 맛을 내 보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어린 시절 어머니가 해주셨던 그 맛을 온전히 재현하기는 어렵다.


그 맛은 단순히 혀끝으로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만들어 주신 썰매를 타고, 오빠와 팽이 놀이를 하며 지친 몸을 녹이며 배고플 때 먹던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함께 어우러진 기억의 맛이기 때문이다

“추억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유일한 보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여 편리하고 풍족하지만 자연 속에서 놀던 그 시절에 먹은 음식은 내 삶의 정서적 지지를 담당하는 금과 같은 보물이다.

겨울이 깊어가며 거실 창으로 보이는 앙상한 나무가 쓸쓸하다. 마음은 고향의 그 시절을 떠올린다. 하얀 눈이 덮인 마당에서 논 뭉치를 굴리던 시간, 언 손을 호호 불며 썰매를 타던 순간, 아랫목에 둘러앉아 김치말이 찜을 먹던 모습. 그 모든 것이 마음속에서 다시금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김치말이 찜은, 가슴속에서 은은한 기억으로 피어오르는 그리운 음식이다.




배추김치말이 찜(김치쌈)

(재료)

김장김치 1 포기, 다진 소고기 반 근, 돼지고기 반 근, 두부 1모, 양파 1개, 표고버섯 5개,

느타리버섯 한주먹, 당근 반 개, 청양고추 2개, 숙주 1봉, 다진 마늘, 다진 대파, 소금, 후추, 참기름

(만들기)

1. 김장김치 한 포기를 물기 없이 꼭 짜준 후 이등분하여 김치의 잎 부분을 준비한다.

2. 두부는 베 보자기로 눌러 물기를 꼭 짜준다.

3. 표고와 느타리, 숙주는 끓는 물에 데쳐 물기를 제거하고 다져놓는다.

4. 당근, 양파, 청양고추 곱게 다진다.

5. 큰 볼에 다진 고기, 두부, 표고버섯, 양파, 당근, 숙주, 마늘, 대파 등을 넣고 맛소금, 후추, 참기름으로

잘 버무려 만두소처럼 만든다.

6. 도마에 김치 잎을 펼치고 만든 속을 넣고 돌돌 말아 전골냄비에 차곡차곡 담는다.

7. 들기름을 두 바퀴 두르고 육수를 붓고 김치가 투명해질 때까지 국물이 약간 있게 푹 끓인다.

* 식성에 따라 고춧가루를 위에 살살 뿌려주면 색감도 예쁘고 조리하는 동안 매운맛이 완화되고, 속 재료들의 맛이 스며들어 정말 맛있는 김치말이 찜이 완성된다.

김치말이 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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