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의 맛

청춘은 바로 지금! - 가을여행

by 수련

어제까지 내리던 가을장마가 아침 무렵 그쳐 다행이다. 비 갠 흐린 하늘은 여행자에게는 강복이다. 계절은 어느새 가을의 한가운데로 깊어가고, 바람은 투명하게 살랑인다.


지난 주말, 'ITX 청춘열차'를 타고 춘천을 다녀왔다. 한 달 전에 예약한 여행이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상담사 들과 함께 떠나는 ‘청춘열차’. 이 열차는 과거로 가는 회귀선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고임도 머뭇거림도 없는 시간의 궤도였다.


오전 아홉 시, 수원역 플랫폼. 주말 여행객으로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열 명의 상담사가 모였다. 서로 손을 잡고 따뜻하게 포옹한다. 환한 미소는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 오랜만에 만나는 존재의 확인 같았다.


상담사들의 전직은 다양하다. 30년간 유치원을 지키던 S, 교단에서 수많은 청춘을 키운 Y, IT 기업의 정점에서 퇴직한 B. 이제 그들은 시니어 상담사로 제2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나도 지난 2월부터 시니어 상담사로 합류했다. 연금공단, 복지관, 고용센터 등 공공기관에 파견근무하며 자기 경험을 타인의 빛으로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 일터를 벗어나 이름도 생기 넘치는 ‘청춘열차’를 타고 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ITX 청춘열차’는 2012년에 개통된 경춘선 준고속열차로, 청평과 가평을 지나며 빼어난 경관을 감상할 수 있다. 국내 최초로 2층 객차가 도입된 이 열차는 의자와 실내가 깨끗하고 조용했으며 일찍 예약한 덕분에 2층에서 오붓하게 스쳐가는 창밖 풍경을 즐길 수 있었다.


청재킷과 스카프, 멋진 선글라스와 모자로 멋을 낸 복장은 한층 더 활기 있고 젊어 보였다. 단순한 멋이 아니라 “여전히 관리 잘하고 있다”라고 보여주듯 건강미가 돋보인다.

Y가 말했다. “여행이 기대되어 새벽 세 시에 깼어요.” 말없이 끄덕이며 모두가 웃는다. 나이 든다는 건 설렘과 호기심을 잃는 일이 아니다. 설렘의 이유를 더 깊게 알 수 있는 나이니까.


ITX 청춘은 용산을 떠나 경춘선을 따라 달렸다. 강이 굽이돌고, 산은 하얀 구름 모자를 쓰고 있다. 그 풍경은 마치 인생의 단면 같았다. 흐르고, 굽이치며, 멈추지 않는 삶의 길. 대성리 부근에서 북한강을 따라 나란히 달릴 때, 모두가 조용해졌다.


대학생 시절 M.T를 떠올렸다. 푸르고 반짝이던 20대 초, 그때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른 채 객기와 피 끓는 열정을 믿었다. 지금은, 두려움을 알지만, 여전히 가능성을 믿는다. “보이차 한잔하세요.” A가 건넨 따뜻한 차 한 잔이 그때의 나를 현실로 데려왔다. C는 가방에서 쑥개떡과 과일을 꺼내 나눴다. 사소한 나눔 속에서 우리는 깨달았다. 삶은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미소와 온기가 오가는 배려하는 순간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춘천역에 내려 예약된 숯불 닭갈빗집으로 향했다. 은은한 숯불향이 몽실몽실 추억처럼 퍼졌다. 춘천의 명물 닭갈비. 소금구이는 담백한 맛, 간장양념은 달달한 맛, 고추장 양념은 매콤 달콤한 맛으로 취향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 건강한 맛 소금구이를 양파절임과 청양고추 한 조각을 얹고 쌈채소와 싸 먹는 맛도 일품이다. 숯불 위에서 튀어 오르는 불꽃은 우리 마음처럼 살아 있다. 연장자인 D가 잔을 들며 선창 한다. “청바지! 청춘은 바로 지금!” 모두 잔을 들고 큰 목소리로 후창 한다. 화끈한 분위기 속엔 살아온 흔적과 훈장이 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마음속 피어나는 열의가 뜨겁다. 세월은 주름을 남기지만, 청춘의 열정은 마음의 근육처럼 계속 자라난다.


식사 후, 우리는 소양강변을 걸었다. 바람이 갈대를 스치고, 갈대는 “늙은 댄서”처럼 백발을 우아하게 흔들며 춤을 춘다. 은빛 갈대는 흔들리지만 꺾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습과 닮아 있다. 유연함 속에 단단함이 있다. 간혹 감정이 흔들림을 당면할 때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때때로 흔들리지만 더 깊이 뿌리내리는 법을 이제 알고 있으니까.


두루미 한 쌍이 강 위를 지나간다. 그 자유로움에 혼자 속삭인다. “저 새처럼 가볍게, 망중한을 느끼며 유연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란 넓고 긴 무대에서 나답게 살기 위해, 스스로를 직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카페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와 감자빵 한 조각이 입안에서 천천히 녹는다. 감자처럼 소박하지만 쫄깃하고 부드러운 맛이 커피와 조화를 이루며,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모두 품고 있다.


시내버스를 타고 춘천역으로 가는 길, 창밖으로 담황색 들판이 흘러간다. 그 속에서 동행한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퇴직 후에도 배움을 이어가기 위해 대학원에 다니며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20대 학생들과 소통하는 P, 섬세한 민화를 그리며 화가의 길을 준비하는 B, 손글씨로 전시회를 꿈꾸는 E. 그들은 ‘퇴직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다음 장을 설계하는 ‘신중년’이다.

춘천.jpg

한 선배는 “배움은 젊은이의 특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의 본능이다.” 라며 평생학습관을 놀이터 삼아 요즘은 "생성형 AI"를 배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사는 삶을 즐기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100세 시대를 부담이라 하지만, 길어진 생을 짐이 아닌 기회로 본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그 시간이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이다. 시니어는 더 이상 사회의 뒤안길에 선 존재가 아니다.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세상을 지탱하는 뿌리다. 고목의 마지막 잎은 떨어지지만, 뿌리는 새로운 잎을 틔우고 가지를 밀어 올린다. 삶의 마감은 끝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는 지속적인 순환이다.


용산역에 도착할 때, 하늘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다. 노을이 건물의 유리창마다 스며들었다. 한강에 울렁이는 해넘이를 보면서 인생의 본질을 생각한다. 태양이 내일을 위해 붉은빛으로 스러지듯, 우리의 삶도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을 향해 흐른다. 여행을 통해 앙상하던 영혼이 몽실하고, 놀랍도록 많은 에너지가 충전된다. 돌아오는 길, 또 다른 건배사가 떠올랐다. “통통통! 의사소통, 운수 대통, 만사형통!” 이 단순한 건배사 안에는 오래된 바람이 담겨 있다. 잘 통하고, 잘 흐르고, 앞날이 통쾌하게 풀리기를 바라는 진정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가을의 중심에서, 삶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선배의 열정을 가슴에 새겼다. 청춘은 바로 지금!!!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18화가을의 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