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그리움을 빚는 날
새벽부터 어머니의 부엌은 소란스럽다. 식혜 끓는 냄새가 마당까지 번지고, 무쇠 칼에 밤을 깎는 소리가 똑똑 경쾌하다. 파를 송송 썰면 매운 향이 코를 찌르고, 깻잎을 씻으면 짙은 향이 손가락 사이에 물든다. 냄비에서 고깃국이 보글보글 익어가며 고소한 김을 내뿜는다. 그 모든 소리와 냄새가 뒤섞여 '명절'이라는 풍경을 만든다.
여름이 물러나면 들판이 먼저 옷을 갈아입는다. 햇볕에 익은 벼가 고개를 숙이고, 나뭇잎이 누렇게 물든다. 선선한 바람이 마을 어귀를 스칠 때, 대 명절 추석의 시간이다. 송편을 빚고 조상의 산소로 향하던 그날은, 우리 집의 가장 길고 분주한 하루였다.
어린 시절의 추석은 집 앞 감나무의 붉은 얼굴에서 시작된다. 까치가 쪼아 먹은 자국이 선명한 홍시가 가지 끝에 매달려 햇살 아래 반짝인다. 대추는 제 몸 안에 가을 햇살을 한 움큼씩 담아 갈색으로 얼룩진다.
추석 전날이면 어머니는 대바구니를 내밀며 말씀하신다.
"솔잎 좀 따오너라."
집 뒷산으로 올라가 오빠가 소나무 가지를 당기면, 나는 까치발을 들고 손을 뻗어 솔잎을 뜯는다. 송진이 손끝에 묻어 끈적거린다. 산속 공기는 서늘하고, 발밑의 낙엽은 바스락거린다.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양 볼에 불룩하게 물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불안한 눈동자를 굴린다.
바구니에 솔잎이 가득 차면 우리는 산 둔덕을 따라 비탈길을 내려왔다.
"이걸 넣고 송편을 쪄야 떡이 빨리 쉬지 않고 향도 좋아."
두 살 터울인 오빠는 어른들한테 어깨너머로 귀담아 들었던 말로 아는 척을 한다. 솔잎 향이 바구니에서 피어올랐다.
아버지는 자전거 짐칸에 쌀 함지박을 싣고 읍내 방앗간으로 향하신다. 햅쌀과 저장해 둔 쑥, 치자를 들고 떠나는 뒷모습에는 조상님 차례상을 준비하는 정성이 어려 있다. 돌아오실 때면 자전거 짐칸에 흰 쌀가루, 쑥빛 가루, 노란 치자색 가루가 보자기에 나뉘어 담겨 있다. 손끝에 닿는 쌀가루는 눈처럼 보드라웠고, 쑥 가루는 봄날의 기억을 품은 듯 진한 향을 풍긴다. 치자 가루는 가을 햇살을 담은 것처럼 곱고 선명하다.
점심 무렵, 온 식구가 마루에 둘러앉아 송편을 빚는다.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라고 쌀가루 반죽을 치대며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우리는 그 말에 웃으며 송편 하나하나에 정성을 담는다.
밤 소는 삶은 햇밤을 설탕과 소금을 넣고 졸인다. 주걱으로 저을 때마다 달콤한 향이 피어난다. 콩 소는 방콩을 삶아 소금으로 간했고, 해콩의 구수한 냄새가 들큼하다. 참깨 소는 볶은 참깨를 절구에 넣고 설탕과 소금을 적당히 버무려 대충 빻아놓으면 집안에 고소한 향이 풍긴다.
작은 손으로 반죽을 떼어내면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진다. 동그랗게 주물러 펴주고 소를 꼭꼭 눌러 넣고 반달 모양으로 빚으면 완성이다. 쑥 송편은 은은한 초록빛으로, 치자 송편은 노란빛으로 빛난다. 동생은 송편에 콩으로 눈과 입을 붙여 토끼를 만들었고, 우리는 토끼가 아니라 꿀꿀이라고 우기며 놀려댄다.
무쇠솥에 물이 끓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솥뚜껑을 열고 솔잎을 한 줌 한 줌 깔아준다. 그 위에 송편을 가지런히 놓고 뚜껑을 덮으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 가득 솔향이 번진다. 산속의 맑은 공기처럼 은은하고 청정한 향이다.
솥뚜껑을 열면 하얀 김이 확 피어오르고, 그 속에서 색색의 송편이 모습을 드러낸다. 솔잎을 떼어내고 참기름으로 목욕을 시키면 송편은 반짝거리며 윤기가 흐른다. 깨 송편 한입 베어 물면 겉은 쫄깃하고 속은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혀 위에서 스르르 녹아내린다. 어른들은 콩 송편을 좋아하고 동생과 나는 달달한 깨송편과 밤송편을 골라먹는다. 입천장에 닿는 그 부드러운 촉감, 씹을수록 배어 나오는 깨의 고소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마당에서는 사촌들이 윷놀이하며 시끌벅적하다.
"모! 모났다!" 환호성이 터질 때마다 가을 하늘은 더 높아지는 듯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담장 너머로 울려 퍼지고, 어른들의 담소가 마당 한 편에서 이어진다.
추석 아침, 대가족의 발소리가 마당을 가득 메운다. 작은아버지, 당숙, 사촌, 조카까지—삼십여 명이 모여 차례를 올린다. 상에는 햇과일이 정갈하게 놓이고, 송편은 빛깔별로 줄을 맞춰 담겨있다. 정성껏 부친 전이 한 접시 가득 쌓이고, 정종은 작은 잔에 받아 두 손으로 세 바퀴를 돌리고 올린다. 향을 피우면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고, 매캐한 향이 집 안을 휘감는다.
우리는 차례로 절을 올리며 조용히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무릎이 마룻바닥에 닿는 소리, 이마를 조아리는 소리, 가만히 숨 쉬는 소리만이 대청마루 안을 채운다. 그 정적 속에는 깊은 경건함이 있다. 차례를 마치고 나면 어른들은 작은 술잔을 기울이며 덕담을 나눈다. "올해 벼농사도 풍년이고" "아이들이 참 많이 컸지요." 그런 말들이 오가는 사이, 우리는 송편과 과일을 집어 먹으며 친척들 사이를 뛰어다닌다.
어린 시절의 추석은 흙냄새와 사람 냄새로 가득하다. 아궁이의 연기가 굴뚝을 타고 올라가고, 부엌에서는 반복해서 상차림하는 소리가 이어진다. 친지들의 웃음과 자식자랑이 뒤섞이고, 아이들은 마당을 뛰어다니며 숨바꼭질한다. 어른들은 평상에 모여 앉아 막걸리잔을 부딪치며 한 해의 농사 이야기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 모든 소리와 냄새와 웃음이 한 폭의 풍경이 되어 가을 하늘 아래 선명하게 머문다.
세월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지금의 추석은 한결 조용하다. 도시의 집들은 차례 대신 여행을 떠나고, 송편은 떡집에서 산다. 고향 방문 대신 영상통화로 안부를 전한다. 명절은 점점 가벼워지고, 전통적인 명절 풍경은 기억 속으로만 남았다. 이제는 편리함이 풍요를 대신하고 사람 사이의 온기는 줄어들었다. 몸의 고단함은 현저하게 줄었지만 마음은 허전한 명절이다.
그럼에도 명절기분을 내기 위해 한번 먹을 만큼 전을 부치고, 잡채를 만들고, 갈비찜을 한다. 달걀 물에 대구포를 담가 부치면 지글거리는 기름 냄새 사이로 어머니의 손길이 되살아 난다. 손에 익은 그 동작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숨결을 닮았다. 어머니와 함께 추석을 준비하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명절 음식에 지친 속을 달래기 위해 맑은 뭇국을 준비한다. 무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소고기를 듬뿍 넣어 끓이면 투명한 국물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하얀 무가 투명하게 떠오르고, 그 사이로 가늘게 찢긴 양지와 사태고깃국은 어린 시절에는 명절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국물을 떠 맛을 보면 개운하고 깊은 맛이 혀끝을 감싼다. 무의 단맛과 고기의 구수함이 어우러져 한 숟가락만 떠먹어도 속이 따뜻하다. 밥을 말아 갓 담근 김치를 올려 먹으면, 이게 바로 명절의 마지막 맛이다. 국자를 들 때마다 어머니의 손목이 떠오른다. 그 주름진 손으로 떠주던 따뜻한 밥과 국 맛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식탁에 앉은 가족들이 한입 떠먹으며 말한다.
"아 개운하다. 역시 이 맛이지."
그 말에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어머니는 계시지 않지만, 손맛은 여전히 내 밥상 위에서 김을 내고 있다. 그분의 정성과 향이 지금도 내 손끝을 통해 가족들에게 전해진다.
한가위 보름달이 떠오르면 그 둥근 빛 안에 어머니의 얼굴이 문득 비친다. 송편처럼 매끈하고, 국물처럼 따뜻하며, 내 삶을 지켜주는 등불 같은 단아한 모습. 오늘도 송편을 빚듯 그리움을 빚는다.
[소고기뭇국]
(재료)
소고기(양지 600g, 사태 600g) 무 1개, 대파(흰 부분), 다진 마늘, 조선간장, 소금, 후추,
(조리 방법)
- 무는 매끄럽고 단단한 것을 준비합니다.
- 양지와 사태를 준비하여 핏물을 빼고 1시간 동안 푹 삶아줍니다.
- 젓가락으로 찔러보아 핏물이 안 나오면 고기를 건져놓고 국물에 무를 나박나박 썰어 넣고 10분 정도 더 끓여 줍니다.
- 끓으면서 생기는 거품은 걷어내고, 조선간장 한 숟가락으로 간을 하고 나머지는 소금을 넣어 간을 맞춘다. 간장을 많이 넣으면 국물 색이 갈색이 되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 마늘과 파를 넣고 한소끔 끓여주면 완성입니다.
- 식혀놓은 양지고기는 결대로 찢어놓고 사태는 얇게 썰어 준비합니다.
- 큰 볼에 고기를 담고 조선간장 마늘 대파 후추를 넣고 조물조물 무쳐줍니다.
- 그릇에 맑은 국물을 담고 양념한 고기를 듬뿍 올려주면 완성입니다.
*행복한 추석 연휴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