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그 많던 매미 소리가 사라진다. 파릇파릇한 잎사귀들은 힘없이 축 쳐지고, 하늘은 저 위로 새파랗게 질려 달아난다. 곁엔 아무도 없다. 바닥에 밟히는 나뭇잎마저. 실내화가방을 들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린다. 무섭다. 무서울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더 이상 무서운 일이 없을 걸 알면서도 불안하다. 심장박동은 점점 빨라지고 호흡도 가빠진다.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걸까? 내가 알게 뭘까? 이제 과거일 뿐인 그 일은 잊고 싶다. 잠깐 혼자이고 싶어서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이고 싶어서 혼자 노래를 부른다. 그러다 갑자기 외로워진다. 매미는 짝을 찾아 떠났고 잠자리는 둘씩 붙어 다니는데 옆에서 나를 봐주는 사람은 왜 없는 걸까. 아니, 어쩌다가 없어졌을까?
내 인생에도 그런 아이가 있었다. 언제나 나만 바라봐주면서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던 아이. 그러면서도 자기주장은 언제나 확고하게 말했던 아이. 나는 그 아이랑 있을 때 가장 행복했고, 가장 즐거웠다. 뭐든지 털어놓을 수 있었고, 비밀이 새어 나갈 걱정은 일절 하지 않았다. 매일 그 아이와 붙어 다녔다. 잠깐도 떨어지고 싶지 않고 항상 붙어 다니고만 싶었다. 어쩌면 그 감정은 그 아이를 소유하고 싶다는 소유욕이었을지도 모른다. 오직 나랑만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마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일을 내고야 말았다. 그 아이의 머리카락을 필통 속에 있던 가위로 잘라버렸다. 찰랑거리던 긴 머리카락이 엉켜있는 짧은 머리카락으로 변하는 건 진짜로 한순간이었다. 그 아이는 그 상황에서도 아무 말 않았다. 날 바라보던 눈빛이 싸늘해졌을 뿐이었다. 아직도 내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던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충동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의 철없는 행동. 그 후로 나는 다른 아이들과 더 많이 놀기 시작했다. 그 아이와 있을 때보다 더 크게 웃고, 더 자주 몰려다녔다. 그러면서 나는 슬슬 그 아이를 피해 다녔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그 아이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티 나지 않게. 나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에게는 다른 많은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를 반겨 주었고, 환영해 주었다.
그렇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알 수 있었다. 날 반기던 그들의 웃음과 그들의 행동이 전부 다 거짓이었다는 것을. 난 그 사실을 너무나 정확히 알았기에 더 과장되게 웃고, 더 과장되게 행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이가 그날 이후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괜찮아. 나는 괜찮아.”
아직도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서는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 순수한 웃음이 너무 소름끼치게 느껴졌다. 사실 너무나 정겹고 그립게 느껴졌다. 나는 그 웃음만을 기다려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아이의 순수한 웃음을 한번만 더 보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다시 웃어주지 않고 오히려 그 아이를 벌레 보듯이 째려보았다. 그 후로 어떤 뒷담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거짓말쟁이’, ‘유치한 애’ 라는 별명과 함께 들려왔던 그 애의 뒷담이었다. 아직도 그 애와 함께 노는 아이가 있으면 나는 앞장서서 뒷담을 깠다. 다른 애들 보란 듯이 그 애가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듯이. 어깨를 치고 지나가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곤 했다.
시간이 더 흐른 후에 뒷담은 걔가 아닌 나에게로 돌아왔다. ‘너무 나댄다.’,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라는 내 뒷담이 내 귀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전처럼 물건을 집어던지며 그들을 째려볼 수 없었다. 어쩌면 맞는 말일수도 있었고, 그보다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나와 친했던 아이들 모두가 나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도, 내가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데도 그 아이만은 내 뒷담에 단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다. 때늦은 후회와 절망감이 나를 울렸다.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나오려 했지만 절대 그들 앞에서는 울지 않고 참았다.
용기를 내어 하교하는 길이나 등교하는 길에 그 아이를 쫓아가며 말을 걸어봤지만 그 아이는 무표정으로 일관했고, 입은 절대 열어지지 않을 것처럼 꾹 잠겨 있었다. 그 아이를 원망도 해보고 미워해 보려고도 했지만 내 잘못인 것을 너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나는 하루 만에 그 생각을 그만두고서 그 아이가 그래주었던 것처럼 그 아이를 기다렸다. 그런 상황은 그 애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이어졌다.
그 아이는 전학을 간다고 선생님 교탁 옆에 멀뚱히 서서 잘 있으라는 딱딱한 안부 인사를 반 전체에게 건넸다. 반 아이들 모두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그저 멍하니 교실 앞을 쳐다보기만 했다. 얼른 박수를 치라는 담임선생님의 재촉어린 목소리에 그제야 마지못해 하나둘씩 두 손뼉을 맞닿아 두드렸다. 그렇게 성의 없는 배웅을 받은 그 아이는 여전한 무표정으로 교실 앞문으로 향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봐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아이의 얼굴엔 얕지만 선명한 미소가 펼쳐졌다. 나를 위한 것이 분명한 그 미소. 그 짧은 순간을 끝으로 나는 그 아이를 다시는 볼 수 없었다. 특히나 그 아이의 밝고 그저 순수했던 그 웃음을. 너무나 늦었었다. 그 아이가 나를 향해 웃어주었을 때 나도 같이 웃어줬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주지 못했다. 내 욕심이었다.
나는 이제는 떠난 그 아이를 더 이상 붙잡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 아이를 추억할 것이다. 상상력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행복이라는 그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