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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ive Sep 28. 2024

그는 어린 자신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었다

 그는 어린 자신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었다. 그와 만날 때 나누는 대화에서는 생기라든가 엉뚱함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농담이나 웃긴 얘기를 들어도 형식적인 미소만 지을 뿐 크게 웃는 일이 없었다. 누군가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딱딱한 무표정으로 위로의 말을 건넸다. 그에게는 진정한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고, 그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또한 없었다. 그도 그런 상황이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어려운 일이 생겨도 다른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거나 다가가는 일은 매우 드물 정도로 사람에 대한 정이 없는 그였다. 


 나는 어느 날 거리를 걷다가 카페 창문으로 그를 보았다. 친구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해 줄 때 그는 ‘감정이 없는 사람’, ‘성공한 사람’등으로 불렸었다. 문득 나는 그가 궁금해져서 문을 열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싸구려 느낌이 나는 둔탁한 종소리가 울리며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일하는 직원분은 그날도 형식적인 미소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초코 라떼 하나 주세요.”

간단히 주문을 끝낸 나의 눈은 이제 그를 찾고 있었다. 그는 카페 구석, 큰 창이 있는 곳 옆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있는 테이블에 앉으며 매고 있던 가방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렇지만 그는 옆을 돌아보기는커녕 움찔하는 기색조차 비치지 않았다. 


비싼 명품 옷에, 좋은 대학, 잘 생긴 외모까지 갖춘 그가 부족할 게 뭐가 있을까. 


“초코 라떼 하나 나왔습니다.”

쟁반을 든 직원분이 다가오자 일부러 그의 앞쪽으로 나가서 음료를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책에만 눈을 고정해 둔 채였다. 그가 시킨 따뜻한 커피는 한참 앞쪽에서 버림받은 채 식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마냥 그가 나를 알아차리길 기다리다가는 나도 저 커피처럼 되겠다 싶어서 그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어... 저도 같은 학교 다니는데..”

그제야 그가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그보다는 고개를 돌렸다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잠깐 마주친 눈빛에서는 사람의 온기라고는 찾아볼수조차 없었다. 

“아. 그렇군요. 무슨 일로..?”

그가 아까와 똑같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로 내게 물었다. 

“음.. 책 좋아하시나 봐요?”

“뭐,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냥 보는 것 같아요.”

정말 이 사람은 감정이 없는 걸까? 싶을 정도로 우리가 10여분간 더 나눈 대화에서 그가 좋아하는 것이나 취미,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재미있었어요. 이렇게 사람하고 오래 대화를 나누는 거, 오랜만이네요.”

그가 가방을 다시 집어 들며 자리를 떠나려는 나에게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말했다. 그러고선 그는 나에게 그의 전화 키패드를 내밀었다. 나는 이 잠깐의 고요를 즐기려는 듯이 느릿하게 내 전화번호를 찍었다. 그는 내 전화번호가 찍힌 핸드폰을 건네받고서 그 고요에 보답한다는 듯이 느릿하게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장해둬요. 언제 한번 다시 만나요.”

그는 이제는 차갑게 식은 커피를 들고 홀연히 카페를 나갔다. 걸리자마자 바로 끊어져버린 이 짧은 전화는 내 핸드폰에 그의 전화번호를 남겼다. 빠르게 그의 전화번호를 저장하고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와 다시 만나는 날이 오기는 할까?


 그가 말한 언제는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다가왔다. 그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었거나, 우연이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다음주 일요일 저녁에 그에게서 문자 한통이 왔다.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로 나와줄 수 있냐고 묻는 문자였다. 나는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뒤 집 앞으로 나갔다. 저녁이 되어 날씨는 선선해졌고 하늘은 빨갛게 물들었다. 저 멀리 그네에 앉아 있는 그가 보였다. 나는 얼른 그네로 뛰어갔다. 

“어렸을 때 그네 많이 타봤어요?”

그가 나를 보고는 물었다. 

“그때는 많이 탔었죠. 서서 타면 얼마나 재밌었다고요.” 

나는 그를 따라서 그네에 앉았다. 그는 그네가 신기한지 요리조리 살펴보다가 힘껏 발을 구르며 그네를 높이 띄웠다. 

“무슨 일 있어요?”

나는 갑자기 나를 불러낸 그가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해서 그와 같이 그네를 띄우며 물었다. 

“있죠. 아주 많이요!”

그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옆에 계시던 경비 아저씨와 길 가던 아이가 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아랑곳않고 그네를 더 높이 띄웠다. 

“세상은 저한테 왜 그러는 걸까요? 어릴 때는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해서 공부 열심히 했어요. 입시와 취업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거에만 매달렸다고요! 그래서 저한테 남은 게 도대체 뭘까요? 인생에 가장 소중한 20년을 버렸는데도 어른들은 뭐라는 줄 아세요? 성공한 인생이래요! 성공한 인생의 기준은 도대체 누가 정해 주는 거죠? 내가 행복하면 된 거 아닌가요?”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가 그저 감정에 서투른 사람이리라 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는 좋은 학교를 다니고 있고 경제적 여유도, 번듯한 외모도 지니고 있었기에 나 역시 그를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웃고 있었다. 그네를 타고 있는 이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듯 환한 웃음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간 빛이 저물고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옆에선 그의 웃음소리와 풀벌레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나도 그제서야 생각했다. 사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이렇게 평화로운 지금이 아닐까. 나도 그네에서 일어서서 힘껏 발을 굴렀다. 십여년 전 친구들과 웃으며 그네를 타던 내가 어느샌가 이곳에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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