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기항지에서 유용한 소소한 팁 하나.
크루즈 여행을 하기 전에 영문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 오는 게 좋다. 여권이 필요한 입국심사 절차가 있는 기항지(내 기억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항지에서는 영문 운전면허증만 있으면 여권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 북유럽 대도시에서 시니어 할인을 받을 때, 승선시 신분증이 필요한 페리 등을 탈 때도 여권 대용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지중해 크루즈는 노선이 다양하고 가성비도 좋아서 선택지가 많다. 이탈리아 반도의 기항지들은 경우에 따라 동서 어느 쪽이든 포함시킬 수 있지만 편의상 이탈리아 반도의 동쪽, 에게해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의 섬들과 그 주변을 동지중해 지역,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과 남프랑스, 시칠리아 섬 주변을 서지중해 지역으로 나눠보겠다.
아름다운 에게해를 항해하는 동지중해 크루즈 기항지 중 그리스의 아테네, 산토리니, 미코노스섬과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그리고 튀르키예의 쿠사다시 등 내가 방문했던 도시들을 하나하나 톺아보려고 한다.
고딕,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이 어우러진 고풍스러운 시가지와 그곳을 둘러싼 성벽으로 유명한 두브로브니크는 크루즈 포트에서 버스 한 번만 타면 구시가지로 갈 수 있다. 아드리아해를 배경으로 성벽 위를 걷는 둘레길은 최고의 산책로이다. 올드타운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위에서 내려보다 성 안으로 내려가면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아테네에서는 파르테논 신전이 있는 아크로폴리스에서 로만 아고라, 하드리아누스 도서관까지 고대 그리스의 향기를 마음껏 음미하며 산책할 수 있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서양문명의 발상지답게 인기가 높은 관광지이므로 인터넷으로 입장권을 미리 예약해 두는 것이 좋다.
튀르키예의 항구인 쿠사다시에서 에페소스 유적지까지는 20km가량 떨어져 있어 택시를 이용하거나 패키지 투어를 통해 찾아가야 한다.
에페소스는 고대 그리스의 식민 도시에서 시작하여 로마 시대를 거치면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어 성지 순례의 주요 코스이기도 하다.
켈수스 도서관을 비롯한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방대한 유적들은 지금 그 원형을 찾기 어려운 모습으로 남아있지만 지금의 규모와 흔적 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가치가 넘친다.
그리스 에게해의 섬 산토리니와 미코노스는 동지중해 크루즈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산토리니에서는 큰 배가 항구에 접안을 할 수 없으므로 텐더 보트(크루즈 배와 기항지를 이어주는 작은 배)를 이용하여 상륙하게 된다.
보트에서 내리면 케이블카나 도보로 급경사 절벽 위에 있는 피라(Fira) 마을까지 올라가야 한다.
피라는 상점과 레스토랑이 즐비한 산토리니의 중심 마을이지만 사진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산토리니 풍경은 버스를 타고 섬의 북쪽에 있는 또 다른 마을인 이아(Oia)까지 가야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이아 마을에 내려 찬란한 태양 아래 대리석길이 이어지는 거리를 걷다 보면 마법과도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푸른 돔을 머리에 얹은 교회들, 눈부시게 새하얀 집들이 이어지는 골목길에서 에게해를 내려다보며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잊을 수가 없다.
실제로 그리스의 섬들 중에 산토리니섬은 가장 인기가 높은 관광지이다.
그러나 나는 미코노스섬이 더 좋았다.
미코노스 구항구 근처엔 아기자기한 골목길, 풍차, ‘리틀 베니스’라고 불리는 예쁜 구역이 있어서 산책하기 좋다.
그러나 미코노스의 백미는 페리로 30분이면 닿는 근처의 섬, 델로스에 있다.
델로스는 세계사의 첫 장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 문명이 시작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우리나라가 역사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고조선 시대였을 때 델로스는 이미 국제 항구 도시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고작 남북으로 5㎞, 동서로 1.3㎞에 걸쳐 뻗어 있는 이 작은 섬의 평균 인구가 당시 2만 5천 명에 달했다 한다.
아폴로 신에게 바쳐진 성지인 델로스에서는 4년마다 체조, 승마, 음악, 연극 등의 축제가 펼쳐지는 델로스 제전이 열렸다. 그러나 델로스의 영광도 기원전 69년 아테네가 힘을 잃고 그리스가 주도했던 해상 무역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끝이 나고, 6세기에 가서는 완전히 버려진 섬이 되었다.
그 이후 1872년이 돼서야 체계적인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델로스는 조금씩 옛날의 위대한 모습을 되찾고 있다. 섬 전체 95ha에 달하는 유적 중 고작 25%만 발굴되었을 뿐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옛날의 영화가 넉넉히 짐작된다.
미코노스에서 10시 배를 타고 들어갔다가 1시 반 배를 타고 돌아와야 하니 델로스에서 주어진 시간은 세 시간, 그래도 항구에서 가까운 지역 위주로 발굴이 진행되어 주요 코스는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델로스의 상징인 사자의 테라스는 낙소스 인들이 아폴로 신에게 바치기 위해 세운 것이라 한다.
남쪽에 있는 원형극장의 좌석은 6천5백 석. 3 천년 전에 6,500명이 들어가는 원형극장이라니! 상상의 나래를 펼쳐 그 당시의 델로스 섬을 떠올려본다. 에게해가 내려다보이는 이 극장에 수천 명의 그리스 옷을 입은 관객이 가득 찬 풍경을.
원형 극장과 이어지는 극장 지구는 그 당시 귀족들이 살았는지 집의 규모가 상당하고 화려한 모자이크가 곳곳에 남아있다.
델로스 사람들은 대체 저 거대한 돌을 어떤 배로 어떻게 이 섬까지 운반한 걸까?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미스터리의 현장이었다.
동지중해의 기항지들은 대부분 따가운 태양 아래 그늘 한 점 없이 유적지를 걸어 다녀야 한다. 기온이 높은 계절이라면 양산과 선크림, 충분한 수분 섭취로 컨디션을 조절하여 여행에 지장이 없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