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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남미, 남극 크루즈 기항지 (2)

남미의 기항지 계획 없이 다니기

by Bora

하룻밤에 수십만 원이 넘는 비싼 돈을 내고 남극 크루즈를 탄 이상 기항지에서 뭔가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강박감이 승객들 모두에게 기본적으로 생기게 된다. 대도시 같으면 선택지가 많으니 스스로 찾아 나설 수 있으나 교통이 불편하고 정보가 별로 없는 외딴 항구에서는 기항지 투어나 택시 투어, 혹은 렌터카를 빌릴 수밖에 없다.


대중교통이 발달한 유럽의 도시들과 달리 남미의 도시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는 쉽지 않다. 다른 곳에서 나의 길잡이가 되어준 구글맵도 이 동네에서는 속수무책이다.


20년 전에 왔을 때 택시를 대절해서 다녔던 항구들을 이번에는 버스로 다녀봤다. 제대로 된 정보도 없이 노선도 깜깜이인 채 시내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아무 버스나 집어타고 종점까지 가보는 것. 탔다 내렸다를 반복할 수 있는 홉온홉오프 관광버스가 별 건가? 그렇게 시내버스로 구경 다닌 남미의 두 도시를 소개한다.


아르헨티나 푸에르토 마드린

•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






1) 파타고니아의 시작점, 푸에르토 마드린

지구 남쪽 끝, 세상과 동떨어져 대자연의 황량함이 가득한 파타고니아.

남아메리카 대륙의 남위 40도 부근을 흐르는 콜로라도 강 이남 지역을 파타고니아라 부른다.

짙은 색이 파타고니아


마젤란이 '거인족'이라고 묘사한 현지 부족, 파타곤 족의 이름에서 유래한 파타고니아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광대한 건조 지역이다. 기온이 낮고 바람이 거세 탐험가들은 이곳을 '폭풍우의 대지'라고 부르기도 했다. 토레스 델 파이네 산군의 독특한 산악 풍경과 빙하가 펼쳐지는 서쪽 칠레 영토와 달리 동쪽 아르헨티나령 파타고니아는 드넓은 초원과 메마른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다.


크루즈선이 도착한 푸에르토 마드린 항구는 깎아지른 절벽이 해안선을 따라 이어지는 대서양 연안 남위 42도에 위치한 도시로, 동부 파타고니아의 시작 지점에 위치한다.


인터넷에서 푸에르토 마드린을 검색해 보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다. 고작해야 '1865년 영국 웨일스 이민자들이 세운 도시이고, 고래와 바다코끼리, 바다사자들이 서식하는 인근의 발데즈 반도가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는 정도다.

푸에르토 마드린 시내 풍경


발데즈 반도는 20년 전에 아들과 함께 온 크루즈 여행에서 푸에르토 마드린에 기항했을 때 택시를 대절하여 다녀왔다. 푼타노르테에 가서 바다사자를 보고, 펭귄전망대에서 마젤란 펭귄을 관찰한 다음, 마지막으로 바다코끼리를 보는 코스였다. 푸에르토 마드린에서 발데즈 반도까지는 교통이 좋지 않아 편도 2시간이 넘어 걸린다.


크루즈에서 신청하는 발데즈 반도 투어는 1인당 249$이고, 항구에서 만나는 일반 여행사 버스투어는 1인당 120$에 발데즈 보호구역 입장료 20$를 따로 받는다고 한다.


렌터카를 빌릴까 하고 도착 며칠 전부터 푸에르토 마드린 인근의 렌터카 회사들에 연락해 봤지만 하나같이 예약이 꽉 찼다는 대답이다. 그도 그럴 것이 크루즈선에서 동시에 3천여 명의 승객이 하선하니 렌터카가 남아있을 턱이 없다.

일반 택시는 발데즈 반도까지 공정 가격이 250$인데 200$까지 해주겠다고 사전에 담합한 가격으로 입을 맞춰 말한다.


어쩔까 둘이 의논하다 발데즈 반도는 포기하기로 했다. 내 기억에 발데즈 반도의 바다사자와 바다코끼리 서식지는 100미터가량 멀리 떨어져서 구경하는 것이고, 마젤란 펭귄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동안 마젤란 펭귄이라면 너무나도 많이 봐 왔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동네 버스 투어.

명색이 인구 13만 명에 달하는 곳에 대중교통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구글맵을 꼼꼼히 살펴보니 푸에르토 마드린 시내에 버스터미널이 하나 보인다. 항만에서 10분도 안 되는 거리다. 천천히 거리 구경을 하며 터미널로 갔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다. 터미널 안에는 푸에르토 마드린 주변 지도가 붙어 있었다. 발데즈 반도 초입에 푼타 피라미데(Punta Piramide)라는 장소가 있고 바다사자 그림이 그려져 다.

옳거니, 여기를 가야겠다 하고 표를 사려했지만 하루 한 번 출발, 시간이 맞지 않는다.


할 수 없이 터덜터덜 나오는데 바로 앞이 시내버스 종점이다. 마침 출발하려고 시동을 건 2번 버스에 올라타서 기사와 대화를 시작했다. 통역은 구글 번역기.


"버스 요금 얼마예요?"

"어디에 가려는 건데요?"

"그냥 버스 타고 시내 한 바퀴 돌려고요."

"아하, 90페소 내세요."


우와 90페소라면 우리 돈으로 130원!

200달러에서 130원으로, 1/2000로 줄어든 투어 요금을 내고 시내 투어를 시작한다.

버스는 시작부터 출입문을 내내 열어놓고 꼬불꼬불 시내를 달린다. (더워서 그런 건가? 아니면 문이 고장 난 것일까?) 길은 널찍한데 참 볼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집들의 연속이다.


구글맵으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덜컹덜컹 달리다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 해수욕장 앞에 버스가 섰을 때 기사님에게 돌아가는 차가 언제 오는지 물어봤다. 차는 한 대 밖에 없고, 자기가 종점까지 갔다가 1시간 반 후에 다시 여기를 지난다고 한다.

그럼 구경을 좀 하다가 다시 같은 버스를 타자.


기사에게 손을 흔들고 해수욕장으로 들어섰다. 썰물로 갯벌이 멀리까지 퍼진 해수욕장에 성탄절 휴일을 맞은 주민들이 가득이다.

해수욕장 한편에는 플라밍고 떼가 보인다.

그 뒤로 멀리 우리 크루즈선의 모습이 배경이 되었다.


해파리가 널브러진 갯벌길을 따라가며 가까이서 플라밍고를 본 후 바로 옆 절벽에 올라 고래꼬리가 붙어있는 푸에르토 마들린 표지판을 살펴봤다. 바로 옆에는 이곳이 바로 웨일스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시간에 맞춰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버스가 나타났다. 아까와 같은 기사님. 반갑게 인사하며 다시 90페소를 내니 아까 낸 걸로 됐다며 요금을 받지 않는다. 완전 홉온홉오프 버스다!


오후엔 버스 터미널에서 다른 버스를 타보기로 했다.

전에는 외국에 나가면 버스의 경우 어디서 내릴지를 몰라 확실하게 노선을 확인할 수 있는 지하철만 탔었다. 그러나 구글맵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는 버스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곳의 버스는 구글맵에조차 정보가 전혀 없다. 버스 정류장이나 노선도는커녕 버스가 다닌다는 표시도 없다.


그럼 종점까지 한 바퀴 도는 거지 뭐.

바로 출발하려고 하는 4번 버스에 올라 기사에게 한 바퀴 돌겠다고 얘기하고 버스값을 내려하니 현금은 안 받고 카드만 받는 버스라고 한다.


"그럼 어떡해요?"

"다음에 타는 승객에게 카드로 대신 내달라고 할 테니 그 승객에게 돈을 주세요."

문제까지 해결해 주는 친절한 기사 아저씨.


몇 정류장 지나 어떤 아가씨가 탔다. 기사가 설명을 하자 아가씨가 카드로 우리 버스비를 태그 해 줬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200페소를 줬더니 손사래를 치며 됐다고, 구경이나 잘하라고 한다. 아이고, 이제 히치하이킹까지.


4번 버스는 남쪽으로 돌던 오전의 2번 버스와 달리 곧장 서쪽으로 달린다. 비포장길이 나타나면서 집들이 점점 허름해진다. 멀리 정면에 황톳빛 절벽이 보이는 양편에 시멘트블록을 붙여놓은 것 같은 단조로운 집들이 계속된다. 황량한 비포장길에 먼지가 풀풀 날리니 미국 서부의 루트 66이 생각난다. 황량한 대평원은 파타고니아 지형의 전형이다.


구글맵에서 도로가 끝나갈 즈음 정류장이 나타났다. 종점인가? 버스를 기다리던 수십 명이 동시에 우르르 올라타면서 졸지에 만원 버스가 됐다. 타는 사람마다 운전기사와 아는 사이인지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백인은 하나도 없고 거의 다 원주민으로 보이는데 휴일을 맞아 해수욕장으로 놀러 나가는 차림새들이다. 접이식 의자나 비치타월 등 보따리를 한가득 안고 탄 승객들은 시내의 해변 가까이까지 와서야 모두 내렸다.


황량한 마을과 집들, 황토 먼지 속의 풍경이 무척이나 인상 깊은 버스투어였다. 자연 유산도, 동물 구경도 좋지만 나는 사람 사는 풍경이 더 좋다. 다른 코스로 한 번 더 돌고 싶었으나 한 바퀴 도는데 1시간 20분 걸린다고 하여 크루즈 승선 시간 때문에 포기하고 배로 향했다.


푸에르토 마드린 항구는 바다 깊이가 얕아 큰 배가 들어올 수 없어서 배가 정박하는 장소로부터 부두까지 600미터가량의 다리를 놓았다. 부두에서 배까지는 셔틀버스가 다닌다.

다리가 시작되는 부두 근처에는 넓은 해수욕장이 펼쳐져 있다.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몰려들어 해변이 북적북적하다.


사람 구경을 하며 배가 정박한 곳까지 다리를 따라 걷기로 했다. 배에 가까이 갈 즈음 사람들이 다리 아래를 내려보고 있다.


바다사자들이 다리 밑의 부둣가 구조물이 만든 그늘에 수십 마리 이상 모여 옹기종기 쉬고 있었다. 다리 밑을 따라 백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인다.


쉬던 바다사자들이 물속으로 뛰어들면서 멸치 떼를 따라 먹이사냥에 한창이다. 물속엔 먹을 것이 한가득에 다리 밑은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니 인근에서 최고의 서식지로 동네방네 소문이 났나 보다.


비싼 돈 내고 두 시간 이상 보호구역까지 차를 타고 가서 100미터 이내로는 접근이 금지된 바다사자를 볼 일이 뭐 있을까. 바로 5미터 아래에서 헤엄치는 바다사자를 실컷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정신 승리를 하며 배에 오르는 줄에 섰다. 배 옆 좁은 그늘에도 바다사자 몇 마리가 있다. 수백 달러를 내고 발데즈 반도 투어를 하고 온 승객들이 바로 앞 바다사자 몇 마리를 보곤 탄성을 지른다.


"저기 몇십 미터만 가면 다리 아래에 바다사자가 수백 마리 있어."

승선 시간이라 줄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사람들 얼굴이 긴가민가 싶은 표정이다.

믿거나 말거나.



2) 리조트 도시, 우루과이 푼타 델 에스테

'동쪽의 곶'이란 뜻을 가진 푼타 델 에스테는 1907년 우루과이의 수도 몬테비데오에서 동쪽으로 100 km 정도 떨어진 해안에 만들어진 리조트 도시다.


리조트 도시라니 거리나 사람들보다는 비치와 요트, 별장과 휴양지들이 가득 찬 도시일 거라 상상했던 그대로의 풍경이 나타났다. 집집마다 운치 있는 건물에 정원 조경도 멋지다.


1800년대 중반에 건설된 등대는 특이하게 해변이 아니라 길 한가운데 세워져 있다. 나지막한 언덕 위라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온다. 옆에 있는 성당은 소박하기만 하다. 항구에서 등대까지 이어지는 바닷가 산책로는 예쁘지만 따가운 태양이 너무 강하다. 게다가 볼거리도 별로 없다.


푼타 델 에스테를 상징하는 브라바 해변(Playa Brava)의 손가락상 '라 마노(La Mano)'사람들이 웅성웅성 이는 것을 보면 얼마나 이 동네에 볼거리가 없는지 알 수 있다. 해변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3m 높이의 시멘트 조각상이 조형적으로 나쁘지는 않지만 오죽하면 다들 이 정도를 보려고 모여들까 싶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시내버스 투어나 하기로 했다. 문제는 구글맵에 정류장 표시만 나올 뿐 버스 노선은커녕 버스 번호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럴 땐 푸에르토 마드린에서 성공한 '아무 버스에나 올라타고 한 바퀴 돌기 작전'이 딱이지.


제일 먼저 등장한 52번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는 푼타 델 에스테 해변을 따라 달리다가 옆동네인 말도나도(Maldonado) 쪽으로 방향을 튼다.


말도나도의 모습은 화려한 푼타 델 에스테와 완전히 다르다. 오래된 집과 낡은 가게들. 그래서 더욱 정겨운 풍경이 이어진다.


이제는 돌아가면 좋겠건만 버스는 점점 더 외곽으로 달려간다. 오늘은 2시 반까지 배에 승선해야 하는데 벌써 1시다.


지난번에도 버스 배차가 1시간 반 정도였으니 여기서 내려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는 건 더 위험하다. 우버 택시를 잡기도 너무 먼 거리에 인터넷 신호마저 들락날락한다. 만약에 두시 반까지 항구에 못 가면 여기서 낙오되는 건가?


둘이 눈을 마주치며

'어쩌지?' 했지만 둘 다 걱정하는 기색이 별로 없다.

"우린 참 겁도 없지?" 하며 서로 웃었다.


버스는 이제 비포장길을 달려 숲이 우거진 낡고 허름한 집들이 있는 마을에 들어서면서 드디어 종점에 도착했다. 휴 다행이다.

버스 종점의 기사 아저씨


담배를 피워 문 기사가 10분 후 출발한다며 어디까지 가냐 하길래 푼타 델 에스테에 도로 간다니까 110페소를 다시 내란다.

푸에르토 마드린의 기사 아저씨는 안 받았는데 여긴 다르군.


이 황량한 곳에 그래도 버스 종점이라고 낡고 작은 가게가 하나 었다. 맥주 한 캔 사며 콜라를 함께 사서 기사에게 줬더니 '그라시아스!' 하며 좋아한다.


종점에서 출발한 버스는 다시 말도나도를 지나 손가락상을 거쳐 목적지인 부두 가까이까지 가서 내려줬다. 돌아올 때는 내내 승객이 우리 둘 뿐이었으니 전세버스를 탄 셈이다. 에어컨은 나오지 않아도 더위에 지친 몸을 쉬며 동네 한 바퀴 잘 돌았다.


푼타 델 에스테 시내의 고급 리조트나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먼 외곽 지역에 살면서 시내의 직장을 오가겠지. 출퇴근 시간이면 이 버스에도 사람이 가득 찰 것이다.

옆 마을 말도나도까지 한 바퀴 돌고 오니 푼타 델 에스테의 리조트들이 더욱 화려해 보이며 작고 낡은 집에 사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차 없는 이들의 필수 이동 수단인 버스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지역을 찾아다닌다. 버스 운행이 원활해야 외곽에도 거주할 마음이 들 수 있는 법.

지방소멸을 걱정하는 정부라면, 인구 많은 곳뿐 아니라 외곽 지역에서도 누구나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교통망을 갖추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목적 없이 버스로 돌아다니는 건 현지인들의 모습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어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다. 파타고니아의 황량한 풍경도, 화려한 리조트 도시 옆 마을의 소박한 정경도 시내버스 안에서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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