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남극 크루즈 (3)
20년 전 일 때문에 남극으로 들어가는 J를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부러웠었다. 언젠가 나도 남극을 가보리라 하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남극 여행은 너무 비쌌다. 칠레 남단에서 남극으로 들어가는 항공권만 해도 편도 1만 불이 훌쩍 넘으니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하지만 뜻이 있다면 길이 생기는 법, 비행기로 못 가면 배를 타고 가야지, 틈만 나면 남극 크루즈를 검색했었다.
남극 크루즈 가격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오랜 검색 끝에 그중에서도 도전할 수 있는 가격의 코스를 찾아냈다.
남극을 다녀온 J도 대륙 자체는 온 사방이 눈과 얼음덩어리 뿐이라며 차라리 배를 타고 남극의 해안선을 보는 게 더 나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결정한 남극 크루즈는 17일간의 일정 중 절반을 기항지에 내리지 않고 배에서 보낸다.
아르헨티나 남단 우수아이아에서 남극으로 내려갔다가 포클랜드 제도에 도착하기까지의 4박 5일 동안은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아 모든 세상과 끊어지는 단절의 시간이다.
기항지에 내리지 않고 배에서 하루 종일 지내려면 지루할까 싶지만 볼거리가 끊이지 않아 이리저리 구경 다니느라 하루에 적어도 만 오천보 이상은 걷게 된다.
밤이면 공연도 보고, 낮에는 남극의 자연이나 극지 생물에 대한 강연도 쫓아다녔다.
저녁마다 어디에서 먹을까 하는 행복한 고민도 빠뜨릴 수 없다. 우리가 탄 배는 꼭대기의 뷔페식당 말고도 정찬 식당 두 곳에 아시안 식당 하나까지 무료로(크루즈 비용에 포함된 것이므로 무료는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이 든다) 이용할 수 있다. 전채와 메인, 디저트까지, 마음에 드는 메뉴가 있으면 얼마든지 더 시킬 수 있다. 어디에서 가격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정중한 대접을 받으며 매끼를 먹어볼 것인가.
배에서의 시간도 쏜살같이 흘러갔다.
비글 해협을 지나 기상 악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스쳐 지나간 푼타아레나스와 배에서 본 남극 항해길을 소개한다.
파타고니아 초입 푸에르토 마드린을 지난 배는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거의 하루 반 가까이 대서양 연안을 항해하다 좁은 해협으로 들어서게 된다.
마젤란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의 폭이 2km이고 대서양 쪽 입구는 4km에 달한다.
1520년 마젤란은 범선을 타고 이 해협을 지나갔다. 그래서 이름이 마젤란 해협.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70여 년 전에 오직 바람의 힘으로 이 거친 해협을 지나 세계를 한 바퀴 돌다니, 크루즈선처럼 거대한 배에서도 세찬 파도를 맞으면 속이 울렁거리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이제까지 23 도를 오르내리던 낮기온은 해협에 들어서자마자 10도로 떨어지면서, 남극대륙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뱃전을 때린다. 조깅 트랙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니 바람의 세기가 차원이 다르다.
마젤란 해협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통로로 이용되다가 파나마 운하가 뚫리며 현재는 주로 칠레에서 아르헨티나까지 가는 항로로 이용되고 있다. 워낙 폭이 좁고 날씨가 험악하여 항해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더니 우리가 거기에 딱 걸려버렸다.
새벽에 배가 마젤란 해협에 들어설 무렵 동이 터오고 파도가 좀 더 세게 출렁이기 시작한다. 네 시간가량 해협을 항해하면 남극으로 가는 관문 기지로 유명한 칠레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다.
푼타 아레나스는 칠레가 마젤란 해협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세운 칠레 최남단의 계획도시다.
푼타 아레나스는 부두에 배를 접안할 수 없어 텐더보트(항구와 크루즈배를 오가는 작은 배)를 이용해 항구로 가게 된다. 하선 예정 시각이 10시라서 한창 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9시 40분에 방송이 나왔다.
알려드립니다. 현재 푼타 아레나스 항의 기상 상황 악화로 상륙이 금지되었습니다. 오늘 일정은 모두 취소되었으며 배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바다로 나갑니다.
'헐. 파도는 좀 거세지긴 했지만 이 정도로 상륙을 못해?'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꼭대기 층에 올라가 상황을 살펴보기로 했다. 방을 나서자 하선을 위해 두꺼운 옷으로 중무장을 한 승객들이 눈을 마주칠 때마다 외친다.
"모두 취소래! All cancelled!"
만나는 사람마다 울 듯한 얼굴이다.
우리야 오래전이지만 푼타 아레나스를 다녀갔기에 망정이지 기대에 가득 차 칠레 쪽 파타고니아 남부를 보려던 사람들은 얼마나 속이 상할까.
배는 단호하게 푼타 아레나스를 지나쳐 마젤란 해협을 항해하고 있다.
점심을 먹고 12층 데크로 나가니 비바람이 몰아친다. 강풍에 날아갈 수 있는 야외 의자와 비치 의자는 모두 로프로 꽁꽁 묶여 있고, 조깅 트랙은 출입 금지가 되었다.
원래 예정으론 오후 늦게 푼타 아레나스에서 출항하여 해질 무렵에 지나게 될 칠레 피요르드 산군을 한낮에 만난다. 점심을 먹으며 보니 창밖은 모두 설산이다.
배는 거대한 산군 사이로 아름다운 피요르드를 헤쳐나간다. 마젤란 해협의 피요르드는 뉴질랜드 밀포드 사운드나 스톡홀름 앞의 해협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게 아니라 거대하고 웅장하다. 파도는 높이 솟기보다 넓게 너울 치며 출렁거린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힘에 압도되는 느낌이다.
거센 바람과 함께 눈인지 비인지가 사정없이 흩뿌리며 설산과 바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때로 구름이 걷히면서 넓게 퍼진 무지개를 만나기도 했다.
현재 위도는 남위 54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회색빛 황량한 파타고니아 산군에 눈이 쌓인 풍경이 중첩해 나타나는 칠레 쪽 마젤란 해협을 항해했다. 만일 푼타 아레나스에 기항했다면 컴컴한 한밤중에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지나갔을 것이다.
지구가 생성된 후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아본 적이 없을 무수한 산군을 바라보며 대자연 위대함의 끝은 어디일까 싶다.
안전한 배 안에서 내려다보는 파도는 그저 전날보다 좀 더 많이 출렁거린다는 정도인데 배가 입항도 하지 못했으니 남극에 가까울수록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흥미진진하다. 마젤란의 항해가 새삼 존경스러운 하루였다.
마젤란 해협과 비글 채널을 빠져나온 크루즈선은 남극 대륙을 향해 드레이크해협으로 들어선다. 수많은 난파선을 만들어낸 거칠기로 악명 높은 바닷길이다. '남미 대륙과 남극 대륙 사이의 바다'라고 해서 '해협'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너비가 8백 km에 달하니 그 의미가 무색한 곳이다.
남극으로 갈수록 해가 길어지며 밤은 점점 줄어든다.
새벽 3시에 밝아진 바다는 하루 종일 해무에 덮여 하늘과 하나가 된 듯 경계가 모호하다.
파도가 세지면서 누워 있는 몸이 출렁이고 창가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도 제법 날카롭다.
식당을 가려고 나서면 중심을 잡을 수 없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걷게 된다.
배 뒷전을 산책하다 알바트로스를 만났다. 한참 동안이나 배를 따라온다. 쫙 편 날개에 거침이 없는 멋진 비행.
50년에 달하는 수명을 산다는 새, 1년에 단 하나의 알만 낳는 새, 일생에 단 한 번만 결혼한다는 바로 신천옹이다.
(나에게) 모든 크루즈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남극의 섬에서 만난 천상의 풍경은 다음 편에 별도로 써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