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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고래와 펭귄의 낙원, 남극 엘리펀트 섬

남극 크루즈 (2)

by Bora

제를라슈 해협을 빠져나온 배는 북서쪽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로 향한다. 세종과학 기지가 있는 킹조지 섬을 지나 제도의 최북단에 있는 엘리펀트 섬까지 밤새 이동한다.


세종과학기지를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 있을까 희망했지만 배는 킹 조지 섬 해안에서 꽤 멀리 떨어져서 항해를 한다. 구글 지도를 보고 '저기 저쯤에 세종기지가 있겠네' 하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파라다이스 만의 절경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에 다음날 방문하는 엘리펀트 섬에 대한 기대는 별로 하지 않았다. 가기 전 인터넷을 찾아봐도 특별한 정보가 없어 그냥 멀리서 대충 해안선만 둘러보고 지나가겠거니 했다.


그러나 여기는 남극해.

선상 프로그램으로 섀클턴의 남극 원정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흥미가 생겨난다.


영국의 어니스트 섀클턴은 벨기에 제를라슈 남극탐험대가 돌아온 후인 1914년, 인류 최초로 남극 대륙 횡단에 도전했다. 그는 탐험에 나서면서 원정대의 범선명을 '인내'라는 뜻의 '인듀어런스'로 이름 지었다.


섀클턴이 당시 탐험대를 모집하기 위해 낸 신문 광고는 솔직하고 과장 없는 내용으로 유명하다.


- 구인 -
위험한 여정, 적은 임금, 혹한, 몇 달간 완전한 어둠, 끊임없는 위험, 무사귀환 불확실, 성공 시 명예와 영광


섀클턴의 인듀어런스 호는 제를라슈가 남극 탐험에 타고 갔던 범선 벨지카호와 생김새가 흡사했다고 한다.

인듀어런스 호

인듀어런스 호는 남극 대륙 앞바다 웨델 해에서 벨지카 호가 그랬던 것처럼 얼음 바다에 갇히게 된다.

무사히 탈출에 성공한 벨지카 호와 달리 인듀어런스 호는 이듬해 봄 해빙의 팽창으로 선체가 우그러들면서 남극해 속으로 고스란히 침몰해 버렸다.

얼음에 갇혔다 침몰하는 인듀어런스 호

침몰하는 배에서 빠져나와 피신한 섀클턴 일행이 세 척의 조각배를 타고 도달한 곳이 바로 엘리펀트 섬이었다.

엘리펀트 섬

내가 탄 크루즈선은 엘리펀트 섬의 해안을 따라 천천히 운항하면서 바다 동물들을 관찰할 시간을 주고, 마지막으로 섀클턴의 인듀어런스호 선원들이 4개월 넘게 버텨냈던 피신처 '포인트 와일드'에 들른 다음 남극해를 떠나게 된다.


섬의 생김새가 코끼리 얼굴 모양이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엘리펀트 섬 앞바다엔 정말 고래가 많았다.

섬에 도착할 즈음부터 선내 방송에서 '9시 방향! 11시 방향!' 하고 알려주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면 시원하게 물줄기를 뿜어 올린 고래가 잠시 육중한 몸을 드러냈다가 다시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배는 엘리펀트 섬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계속 해안선을 따라 이동한다. 과장을 좀 보태서 엘리펀트 섬 앞바다는 물 반, 고래 반이라 이런 진풍경이 없다.


여기저기서 물이 분수처럼 솟아나며 고래들이 나타난다. 우리가 보는 고래는 '핀 고래'로, 여러 고래 종류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종류라고 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봤으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고래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흥분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던 우영우의 얼굴이 떠오른다.


바다에서 먹이 활동을 하던 펭귄들은 배가 다가오자 해안선 쪽으로 헤엄쳐 도망간다. 날아오르듯 수면 위로 솟아올랐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정말 활기차고 귀엽다.


가만히 서 있는 펭귄, 뒤뚱거리며 걷는 펭귄은 그동안 많이 봤지만 물에서 날쌔게 유영하는 펭귄을 본 건 처음이다. 어쩌면 저토록 유연하게 물의 흐름을 타며 날아오를 수 있을까? 볼수록 펭귄은 최고의 서핑 선수들이다.


점심을 먹은 후 커피잔을 들고 바다를 보러 가는데 선상 방송이 나왔다. 9시 방향 작은 유빙 위에 올라선 펭귄들이 보인다고 한다. 커피를 내려놓고 뛰어가 보니 정말 떠내려가는 유빙 위에 펭귄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울 수가!

유빙 위의 펭귄 가족

엘리펀트 섬의 펭귄은 남반구 육지에서 볼 수 있는 꼬맹이 마젤란 펭귄과는 크기와 기품이 다른 젠투 펭귄이다.


바다에서 고래와 펭귄이 번갈아가며 때론 제각각, 때론 함께 솟아오르고 뛰어오르니 눈을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가끔씩 먼 빙산 위에 줄지어 서있는 펭귄 떼도 멋지다. 하얀 빙산 위의 검은 펭귄들은 멀리서 보면 깨소금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섬의 북서면을 돌아 섀클턴 탐험대 피난처인 포인트 와일드(Point Wild) 앞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지금까지 지나친 엘리펀트 섬 해안은 모두 절벽과 빙하 뿐이었고, 이곳에만 겨우 작은 배를 댈 만한 공간이 있었다.

포인트 와일드의 펭귄 서식지

포인트 와일드 근처에 거대한 펭귄 서식지가 있다. 거리가 멀어 검은 점처럼 보이지만 수천 마리의 펭귄들이 모여 있다.


엘리펀트 섬에 도착하여 다섯 시간 정도 원 없이 고래의 유영과 펭귄의 점핑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기대를 뛰어넘었던 남극의 둘째 날이었다.






그동안 모든 크루즈가 만족스러웠지만 나에게 최고의 코스는 남극 크루즈였다.


내가 좋아하는 크루즈 여행은 필연적으로 항공편 이용을 수반한다.


여객기와 크루즈선 둘 다 탄소를 가장 많이 내뿜는, 지구 온난화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주범들이다. 선상에서 참가한 지구 온난화 강의에서는 남극의 빙산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현실을 과학적인 근거를 들어가며 설명해 준다.

줄어드는 빙하

줄어드는 빙하, 올라가는 해수면, 펭귄 개체 감소 등의 문제점을 들으며 일말의 죄책감이 들지만 그저 일상에서 재활용 등 환경오염 줄이기 정도를 실천할 뿐 내가 좋아하는 크루즈 여행을 줄일 수는 없을 것 같으니 어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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