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크루즈 (1)
크루즈 선박은 보통 정해진 항로를 따라 항해하지만 남극 지역에서는 항로를 미리 결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언제 어디에서 빙산과 마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극 바다를 항해하는 배는 날씨와 바다의 상황을 보고 그때그때 유연하게 항로를 바꾸어나간다.
남미 대륙 최남단의 도시 우수아이아를 떠나 거칠기로 유명한 드레이크 해협에 들어설 때 나는 겁을 잔뜩 집어먹었으나 의외로 바다는 생각보다 거칠지 않았다.
별 탈 없이 사흘을 항해한 끝에 갑자기 배의 전면을 비추는 TV 모니터에 멀리 하얀 땅이 나타났다. 드디어 남극 대륙이 보인다!
우리가 남극해에 도착한 때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이었다.
이 무렵의 남극은 한여름이라서 백야가 이어진다. 해는 자정이 지나서야 지고 일출 시각은 새벽 두 시 무렵이니 밤이라곤 고작 두 시간뿐이다.
낮게 깔린 구름 아래 얼음상자 같은 모양의 큰 회색 빙산이 주변에 작은 은빛 유빙들을 거느린 채 둥둥 떠 있고, 그 뒤로 눈에 덮인 산이 띠처럼 길게 펼쳐져 있다.
아직은 본격적인 남극 대륙이 아니라 북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남극 반도의 초입일 뿐이다.
남극을 향해 남진하는 크루즈에서 나는 남극 탐험에 관한 책, <미쳐버린 배>를 읽었다. 1897년 벨기에 탐험가 제를라슈는 원정대를 조직하여 해도조차 없는 남극으로 떠난다. 원정대의 범선 벨지카 호에는 당시 무명이던 노르웨이 탐험가 아문젠도 승선하고 있었다.
<미쳐버린 배>는 벨기에 원정대가 1898년 2월 남극해에 들어서고 3월부터 얼음 바다에 갇혀 극한과 암흑 속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듬해 3월 극적으로 생환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다.
크루즈선의 선상 강의에서도 제를라슈의 남극 탐험 스토리를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우리 크루즈가 항해하는 노선은 19세기말 벨기에 원정대가 남극에 진입하던 코스와 흡사하다.
지금이야 구글맵이 있으니 내가 지금 어디에 있고, 저쪽이 대륙 쪽, 이쪽이 섬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그 당시 처음으로 미지의 세계를 접한 사람들은 어디가 대륙이고, 어디가 섬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었을까.
그 누구도 가보지 못한 남극해를 항해하는 그들에게 물길은 끊임없는 위협과 도전이었을 것이다. 작은 빙산이 원래 크기의 1/8만 수면 위에 보일 뿐이고, 실상은 수면 아래 7/8이나 본 몸체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은 벨지카호가 끝없는 위험 속을 항해했다는 걸 알려준다.
저 멀리 평탄한 백색 양탄자처럼 보이는, 내 눈에는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평지도 그들이 쓴 일지에 의하면 '셀 수없는 크레바스 - 갈라진 틈과 균열로 가득'하고 '살아 움직이는 얼음들이 깨졌다 붙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남극해에 들어선 뒤부터는 아예 갑판에 올라가 바다를 관찰하며 시간을 보내던 J가 드디어 고래를 발견했다. 내 눈엔 그저 검은 형체가 물 위로 살짝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이어 물을 뿜는 모습을 보니 정말 고래다.
조금씩 늘어나던 고래들이 제를라슈 해협에 들어설 무렵에는 사방에서 물줄기를 내뿜는다. 남극 대륙으로 오는 배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1등 목적지, 이 아름다운 해협은 120여 년 전 벨기에 원정대의 대장 이름으로 붙여졌다. 배는 양쪽에 치솟은 가파른 설산 사이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해는 오래 전에 떴지만 짙고 낮은 구름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흑백 세상이다. 기온은 생각보다 낮아 두터운 파카를 입어도 춥다. 사진을 찍으려고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면 10초도 못 가 손이 곱아진다. 하지먼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세상에서 처음 보는, 말로 형언하기도 어려운 아름다운 풍경에 그저 가슴이 벅차오른다.
드디어 바람이 잦아들며 파란 하늘이 보인다. 우수아이아 항구를 떠난 이후 처음 만난 퍼펙트한 날씨다. 위대한 대자연의 풍경은 자연이 인간에게 허락할 때만 접할 수 있다. 남극 관광의 성패는 절반이 날씨라던데 그저 감사할 뿐이다.
볼만한 풍경이 나올 때마다 배에서는 방송으로 알려준다. 배의 앞쪽으로, 다시 옆쪽으로 정신없이 안내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간다.
우리는 작은 빙산 위에 올라서 있는 펭귄 떼를 보기도 하고, 고래가 유영하다 꼬리를 위로 하며 물속에 들어가는 모습, 저 멀리 바다사자가 가득한 해안 등을 구경했다. 하지만 스마트폰 카메라로는 너무 멀어서 순간 포착도 쉽지 않다.
남극의 동물도 좋지만 나는 사방이 빙산과 유빙으로 둘러싸여 있는 조깅 트랙을 걷는 게 제일 좋았다.
배는 드디어 목적지인 파라다이스 베이에 들어섰다.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잔잔하고 사방의 설산과 빙하들이 제각각의 자태와 위용으로 우리 배를 둘러싸고 있다.
해가 솟으며 냉기는 사라지고 따사로운 햇살이 하얀 눈을 비춘다. 설산으로 둘러싸인 배의 조깅 트랙을 걷다 보면 빙산과 유빙이 친구가 되어 곁에서 함께 걷는 것 같다.
천국이 바로 여기가 아닐까.
'참 좋다. 정말 좋지?'
감탄의 소리가 연신 쏟아져 나오는 그를 보며 오히려 나는 말을 잃었다.
오후가 되어 구름은 낮게 깔렸지만 바다는 어찌나 잔잔한지 마치 호수 같다.
내 마음속에 남을 최고의 장면들.
그동안 수많은 곳을 여행하면서 '가장 좋은 곳이 어디예요?'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없었다. 각기 좋은 데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좋은 곳은 많지만 최고는 남극 반도의 파라다이스 베이라고.
2024년 첫날을 남극의 바다 위에서 만났다.
이제는 꿈같이 느껴지는 제를라슈 해협의 설산과 암벽, 흘러내리는 빙하, 유빙 조각들, 바다 바로 위에 낮게 드리워진 구름들은 일몰 때까지 창문 앞에, 바다 위에 나를 붙잡아두었다.
그토록 좀 더 머물 수 있기를, 시간이 흘러가지 않기를 고대하는 날이 또 있었던가.
사실 진짜 남극권은 위도 66도부터 시작이니 우리는 남극 대륙에는 가 봤지만 남극권에 들어가지는 못한 셈이다.
비싼 남극 크루즈 중 우리가 구입 가능한 코스를 찾았기 때문에 남극 대륙 초입에 하루 머물렀다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음날 가는 엘리펀트 섬은 남극 대륙과는 떨어진 남위 62도 사우스 셰틀란드 제도에 있어 남극이란 말을 붙이기도 민망할 정도다. (사우스 셰틀란드 제도에 있는 킹조지섬에 세종과학 기지가 있다)
고작 하루일 뿐이지만 이런 최고의 날씨를 선사해 준 남극의 하늘, 남극의 바다, 남극의 바람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