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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크루즈와 책

배에서 만난 두 권의 책

by Bora

일주일 이상의 크루즈 일정이라면, 하루쯤은 기항지에 들르지 않고 바다 위를 항해만 하는 날이 있다. 이런 날을 ‘앳 시(At Sea)’라고 부른다.


‘앳 시’ 날에는 승객들이 갑판 위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탁구·농구·헬스 같은 운동을 하기도 하고, 선상에서 열리는 다양한 이벤트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내가 꼽는 크루즈 여행의 참맛은 갑판 위 조용한 자리를 찾아 집에서 가져온 책을 읽는 시간이다. 푸른 바다 위에서 펼치는 책 한 권은, 그 어떤 오락보다 더 깊은 여운을 준다.


나는 여행을 떠날 때마다 그 지역과 관련된 책을 찾아서 가져간다.

일반적인 여행에서는 바쁘게 돌아다니느라 책을 펼칠 시간을 내기도 어렵지만, 크루즈에서는 다르다. 시원한 갑판 그늘에 누워 느긋하게 책을 읽다가, 고개를 들어 망망대해를 바라볼 때. '행복이란 이런 거지.' 하는 마음이 절로 솟아오른다.


물론 여행지와 잘 어울리지 않는 책을 가져간 때는 책 무게가 괜히 짐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곳과 어울리는 책을 읽을 때면 감상과 몰입의 농도가 달라진다. 책이 여행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해 주고, 애정도 더해주게 되니까.


내가 크루즈 여행 중 선택한 책들 중 특히 만족스러웠던 것들을 소개해 본다.


지중해 크루즈에서는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이 제격이었다. 『로마 멸망 이후의 지중해 세계』, 『전쟁 3부작(콘스탄티노플 함락, 로도스섬 공방전, 레판토 해전)』, 『베네치아, 바다의 도시 이야기』 등은 지중해 도시들의 옛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 주었다. 그리스 섬을 방문했을 땐, 무라카미 하루키가 미코노스 섬에서 생활한 경험을 써놓은 『먼 북소리』딱 들어맞았다.


발트해 크루즈에서는 발트 3국의 아픈 역사를 다룬 『회색 세상에서』가 가장 인상 깊었다.


남극 크루즈에서는 『미쳐버린 배』가 너무도 안성맞춤이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배 위에서 만난 두 권의 책


1. 발트 3국 여행자에게 권하는 책

루타 서페티스의 『회색 세상에서』


인터넷도 전화도 끊긴 선상.

나는 이런 단절이 좋다. 이제 책 읽기에 완벽한 시간이다.

이 책은 발트 3국을 여행하는 중이거나 여행을 다녀온 이들에게 완벽하게 어울리는 책이다.

읽다가 눈물을 터뜨려 눈이 부을 정도라는 게 유일한 단점일지도 모르겠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 루타 서페티스의 이력부터 마음을 끈다.

1967년생. 미국 미시간 주 출생. 리투아니아 이민자의 손녀로 태어나 오페라를 공부하다 유럽에서 국제금융을 전공했다. 44세에 첫 장편 『회색 세상에서』를 발표했다. 스탈린의 인종청소 작전 직전 리투아니아를 탈출한 할아버지의 실화를 접하고, 2천만 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반세기 넘도록 침묵에 가려졌던 역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르포르타주 형식의 소설이다.

저자는 두 차례 리투아니아를 방문해 가족과 생존자, 정부 관계자, 역사학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주인공은 16세의 소녀 리나.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 살던 평범한 지식인의 딸로, 그림에 재능이 있던 리나는 어느 날 가족과 함께 시베리아행 열차에 강제 탑승하게 된다.


그들은 기차에 갇혀 최소한의 식사도 제공받지 못한 채 한 달 넘게 이동해 우랄산맥을 넘어 카자흐스탄 북쪽의 알타이 강제수용소에 도착한다.


비슷한 시기에 일제 치하에서 사할린 등으로 넘어갔던 우리 동포 고려인들도 같은 처지로 끌려와 카자흐스탄 일대에 던져졌었다.


『회색 세상에서』는 최악의 상황이 계속되었던 추방 열차에서의 삶을 함께 견뎌낸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잔잔하게 펼쳐낸다.


도중에 만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심지어 핀란드인들도 같은 처지였다. 알타이 수용소에서 8개월을 지내며 간신히 적응하나 싶었던 리나의 가족은 다시 시베리아를 지나 멀리 떨어진 북극권 오지 마을까지 끌려가게 된다. 무려 440일에 걸쳐 펼쳐지는 이 장정이 소설의 줄기다.

리나의 대장정 코스

마지막에 북극권에서 리나가 만나는 조사관 사모두로프 박사는 그 당시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린 실존 인물이라 한다.


소설에서 리나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작가는 전한다. 추방되어 십 년 이상을 힘들게 지내다 천신만고 끝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1991년 독립할 때까지 소련 치하에서 KGB의 눈치를 보며 숨죽여 살아야 했던 긴 세월을.


에스토니아 탈린의 ,KGB 건물

책은 절제된 문체로 절망의 순간을 견디는 사람들의 연대를 그린다. 추천사의 표현대로 "인간 존엄과 사랑의 온기로 되살려낸 감동의 연대기"다.


이 책은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역사의 그늘 속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목소리다.

발트 3국과 그 역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권하고 싶은 책이다.



2. 남극으로 가는 배 위에서

줄리언 생크턴의 『미쳐버린 배 – 지구 끝의 남극 탐험』


하버드에서 유럽사를 전공한 줄리언 생크턴은 인류 최초로 남극 탐험에 나섰던 벨기에 탐험대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남극으로 향하는 배 위에서 읽기에 이보다 적절한 책은 없었다. 다만 제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원제는 Madhouse at the End of the Earth. ‘미쳐버린 배’라니, 탐험대원 몇 명이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는 것은 핵심도 아닌데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


책은 1897년 벨기에의 젊은 귀족 아드리안 드 제를라슈가 남극 탐험대를 조직하면서 시작된다. 해안선이 64km에 불과한 나라에서 바다를 꿈꾸던 그는 벨기에 해군에 들어가 범선 벨지카호를 이끌고 남극으로 향한다.


주요 인물은 원정대의 수장인 31세의 제를라슈 사령관, 24세의 로알 아문센(훗날 남극점 최초 도달), 그리고 북극 탐험 경험이 풍부했던 외과의사 프레더릭 쿡이다.


벨지카호는 남극 반도 인근 미지의 해협—훗날 ‘제를라슈 해협’이라 불리게 된—에 들어선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좌초와 지체된 일정 탓에 거기서 남극의 겨울을 맞게 된다. 제를라슈는 위험을 무릅쓰고 의도적으로 더 남쪽으로 항해하며, 남극에서 최초로 겨울을 난 원정대가 되기를 택한다.


결국 배는 얼음에 갇히고, 태양이 완전히 사라지는 70일을 포함해 1년간 얼음 바다에 고립된다. 괴혈병, 우울증 등으로 선원들은 극한 상황에 놓이지만, 의사 쿡은 펭귄 생고기를 통한 비타민 공급, 인공조명 치료 등으로 대원들을 살려낸다.


탈출의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은 쿡과 함께 선장 르콩트다. 얼음을 폭파해 탈출로를 만들었고, 배는 마침내 살아 돌아온다.


크루즈의 선상 강의 중 남극에서는 최초로 겨울을 난 벨기에 탐험대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의 순위를 매겼다. 1등은 쿡, 2등은 아문센, 3등은 제를라슈로 평가되었지만, 나는 제를라슈가 공동 1위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원정대를 조직하고 지휘한 그의 결단과 평화주의적 이상은 그 어떤 공로에도 뒤지지 않는다.


제를라슈는 귀국 후 자신의 이름이 붙은 해협에 대한 벨기에의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남극은 지금까지도 영토 분쟁 없는 협력의 대륙으로 남았다. 그 선례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남극 바다를 향해 가며, 나는 자꾸 벨지카호의 시선을 빌리게 되었다. 눈앞의 고요하고 순백의 풍경 속에 도사린 위험과 그 치열했던 겨울의 기억들. 가장 매혹적이면서도 비참했던 그 모험의 이야기는, 이번 남극 크루즈 여행의 최고의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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