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 프라이 옆에서도 기죽지 않는 명랑하고 씩씩한 달래양념장이 되고 싶어
모두가 소중할 수는 있어도 모두가 특별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아버렸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평범한 나로도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 요즘 제가 가장 열심인 일은 바로 이 것입니다. 달걀 프라이 옆에서도 기죽지 않는 명랑하고 씩씩한 달래양념장이 되고 싶어요.
- 하현, <어느 맑은 날 약속이 취소되는 기쁨에 대하여> -
어렸을 때 나는 위인전을 읽으며 내가 뭔가 특별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며 내가 (여전히 소중하지만) 특별히 남과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았다. 그러다 어쩌면 나는 다른 의미로 특별한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일반적이라고 하는 경험에서 소외된 채 좀 다른 삶을 살게 될 것 같다고 생각하니 억울함과 슬픔이 몰려왔던 것 같다. 에잇 다 글렀어.
요즘 내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자주 말해주는 것은 그 어떤 고난과 비교도 내 존재가치를 흔들만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못 가졌다고 해서, 내가 되고 싶은 것이 못 되었다고 해서 온전하고 존엄한 나의 가치가 반토막 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일상이 무너지도록 힘이 빠진다면 이는 오해일 뿐 아니라 내 손해이다. (요즘 많은 이들을 울리는 중식이 밴드의 <나는 반딧불>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습성이라 어쩔 수 없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것을 거부해 보았자 나만 특별히 봐주지 않는다. 운이 좋았을 때 감사해야 할 뿐 힘든 시기가 왔을 때 이를 피하려고 하거나 한탄해 봤자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오히려 울상 짓는 내 모습이 못났는지 더 큰 시련이 닥칠 때도 있다. 이래도 울고만 있을 거냐고 다그치듯 말이다.
나의 존재 가치를 외부로부터 증명받으려고 할 때 우리는 괴로워진다. 지금의 이 부스스한 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껏 꽃단장을 해도 마음 한편이 허할 수 있다. 그래서 하현 작가의 표현이 마음에 더 와닿는다. 달걀 프라이 옆에서도 기죽지 않는 달래장이라. 적어도 그런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는 것은 여전히 선택지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