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가 있는 중간방
베란다 구석에 놓인 고구마 한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오래 두면 금세 상한다는 걸 알기에 네 개를 꺼내 찜통에 올렸다.
김이 오르기 시작하자, 문득 어린 시절의 겨울이 떠올랐다.
시골에서 자란 어린 시절,
고구마 보관 장소는 우리 집 ‘중간방’, 바로 내 방이었다.
방 한쪽에는 짚으로 엮은 커다란 둥지가 있었고,
그 안에 고구마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리를 쭉 뻗으면 발끝이 닿을 만큼 가까웠다.
왜 하필 내 방이냐며
괜히 입을 뾰로통 내밀던 아이였다.
가마솥 아래 아궁이에서는 군고구마가 익어가고,
동생과 나는 문지방에 나란히 앉아
턱을 괴고 그 시간을 기다렸다.
침이 먼저 고이던 겨울 저녁이었다.
고구마는 쪄 먹고, 삶아 먹고, 말려 먹었다.
햇볕 좋은 날이면 엄마는 삶은 고구마를 소쿠리에 널어 말렸다가
간식으로 내어주셨다.
맛있게 먹으면서도
어린 나는 불편한 것들만 먼저 보았다.
좁은 방, 자주 드나드는 이웃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던 공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다.
고구마는 밖에 두면 쉽게 썩고,
자주 옮기면 더 빨리 상한다는 것을.
아파트에 살며 보내주신 고구마를 이리저리 옮겼다가
한 상자를 통째로 버린 적이 있다.
그제야 부모님의 지혜가 떠올랐다.
겨울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우리 집 안방에 모였다.
따뜻한 구들장은 마을 사랑방 같았다.
고스톱을 치고, 윷을 던지고, 하루 종일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
‘왜 우리 집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오는 걸까.’
저녁이 되면 내가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문을 활짝 열고 방을 청소하는 일이다.
엄마는 저녁준비로 바쁘셨고, 아버지는 그 일을 내게 맡기셨다.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집에 사람들이 안 왔으면 좋겠어요.”
엄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럼 못쓴다. 사람 사는 집에는 사람이 많이 와야 하는 거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얼마나 큰 마음이었는지.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고구마를 삶아 내놓고, 수제비를 끓여 대접하셨다.
아버지는 집안 곳곳에 땔감을 가득 쌓아 두셨다.
먹을 것이 생기면 꼭 이웃과 나누셨다.
그 겨울은 가난했을지 몰라도
마음만은 넉넉했다.
추운 날, 아랫목에 앉아 먹던 노란 고구마.
땅속 항아리에서 꺼낸 동치미의 시원한 맛.
김장김치를 쭉 찢어 얹어 먹던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
이제는 고구마로 피자를 만들고, 수프를 끓여 먹는다. 다이어트 식품으로 각광을 받는다.
사계절 언제든 사 먹을 수 있는 식재료가 되었지만
그 시절의 맛은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그 겨울의 마음은 남았다.
찜통의 김이 잦아들 무렵
고구마를 접시에 담았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 말해 주고 싶다.
그때는 불편하고 싫기만 했던 풍경이
사실은 너를 지켜주던 울타리였다고.
사람 냄새 가득한 그 방이
너를 단단하게 키워 주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는 내가 그 사랑을 기억한다.
그리고 자식과 손자를 바라보며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닮아 보려 한다.
오늘도 이 겨울을 글로 남긴다.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시간을
다정하게 안아주기 위해서다.
그리고 오래도록 부모님의 살아오신 성품을 닮아가고 싶어진다.
한 줄 요약
그 겨울의 넉넉한 마음이 오늘의 나를 사랑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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