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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02. 2024

1.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는 긴 주택가의 끝이자 상가가 시작되는 장소에 있었다. 바로 앞에 건널목과 교차로가 있었기에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많았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때는 출근시간이었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 준비한다고 한들, 출근길은 언제나 분주한 법이었다.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지하철 시간에 맞추기 위해 달리면서도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 앞에서는 멈춰 서곤 했다. 그 이유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가게에서는 언제나 달콤한 냄새가 났다. 초콜릿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쉽게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냄새였다. 가게가 역 근처였기에, 당연히 근방을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다.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도 가게가 문을 열었길 바라며 주변을 기웃거렸다.


이온은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의 직원이었다. 다른 직원은 없으니까 유일한 직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가게 문을 열기 전부터 수많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진열장을 정리하고 바닥을 청소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개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곤 했다. 아주 맛있는 초콜릿이 눈앞에 있을 때, 부모님이나 어른에게 하나만 달라고 간청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온은 그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살짝 안쓰러웠다. 마음 같아서는 진열장에 초콜릿이 다 채워지기 전이라도 가게 문을 열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그럴 수는 없었다. 가게의 영업시간을 자신이 정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장인 시에나는 장인이라고 불려도 좋을 사람이었다. 그는 판매할 초콜릿을 다 판매하기 전까지는 조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정각 아홉 시, 늦어도 아홉 시 십 분이 되기 전에 조리실에서 나왔다. 월요일 아침, 아홉 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조리실에서 나온 시에나의 볼에는 초콜릿이 묻어있었다. 초콜릿을 만드는 데 열중하다가 볼을 살짝 문지른 모양이었다. 이온은 계산대 앞에 놓인 티슈를 뽑아 시에나에게 가져갔다.


“사장님, 볼에 초콜릿이 묻어있어요.”

“아, 그래? 고마워.”


시에나는 티슈를 받아들고 엉뚱한 곳을 닦았다. 이온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 살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볼을 가리켰다.


“거기 말고 더 아래쪽이에요.”

“아, 그랬나?”

“네, 조금 전에는 완전히 잘못 짚으셨어요.”

“그러게.”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제대로 얼굴을 닦아냈다. 그런 다음, 안경을 벗어 안경알을 입으로 살짝 불었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 색은 신비했다. 얼핏 맑은 호수의 표면과 같은 빛깔인 듯하면서도 도시의 어스름 같은 색을 띠기도 했다. 이온은 가만히 그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리실로 들어가 완성된 초콜릿을 가지고 나왔다.


월요일의 초콜릿은 얼핏 평범해 보였지만 강력한 느낌이었다. 시에나는 월요일에는 가게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초콜릿만을 만들곤 했다. 그중에서도 헤이즐넛, 다크, 캐러멜 소금, 땅콩버터, 바닐라 커스터드 다섯 가지가 바로 가게의 매출을 책임지는 일등 공신이었다. 이온은 미리 준비해 둔 유산지들 위에 초콜릿을 하나씩 올려놓고 진열장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하나 닫힐 때마다 초콜릿에서 풍겨 나오는 달콤한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달콤하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향은 조금씩 달랐다. 특히 헤이즐넛이나 땅콩버터 같은 견과가 섞인 초콜릿들은 냄새만으로도 고소한 풍미를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진열장이 다 채워지자, 이온은 일에 열중하느라 굽혔던 허리를 쭉 펴곤 계산대 앞으로 가서 섰다. 시에나는 그 모습을 보고는 ‘영업 중’이라는 글귀가 보이도록 가게의 팻말을 돌렸다.


팻말을 돌리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손님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들은 손바닥보다 조금 큰 트레이를 들고 원하는 초콜릿을 위에 담아 올렸다. 완제품이나 선물 세트도 꾸준히 판매되었지만, 역시 가장 인기가 많은 것은 당일에 만든 초콜릿이었다. 덕분에 이온은 쉴 틈이 없었다. 그녀의 주요 업무는 계산이었으나, 가끔은 음료를 만들 때도 있었고 시에나가 잠시 가게를 비우면 음료 만들기와 계산을 함께 하기도 했다. 다행히 그녀는 숙련된 직원이었기에 실수는 거의 하지 않았다.


눈 깜짝할 새 시간이 지난다는 관용구는 다분히 누군가의 경험을 반영한 것이 틀림없었다. 월요일은 그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이온은 가게 문을 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덧 하늘의 색이 변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그날따라 하늘의 색이 무척 예뻐서 더 눈길이 갔다. 해가 지며 주변의 구름을 주황색과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덕분에 하늘은 마치 언젠가 시골길에서 보았던 물결치는 갈대밭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그쯤 되니 오후 두 시 반쯤부터 한가해졌던 가게는 다시 분주해졌다. 가게의 마감 시간을 기억하거나 퇴근길에 찾아오는 손님이 늘어나서였다. 이온은 잠시 하늘과 구름을 감상하던 것을 멈추고 다시 열심히 일했다. 그럴수록 진열장의 초콜릿은 점점 줄어들었고, 손님들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마감 시간인 다섯 시가 가까워지자, 놀랍게도 오전에 시에나가 만든 초콜릿의 대부분이 소진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바닐라 커스터드 초콜릿 다섯 개와 땅콩버터 초콜릿 하나, 다크 초콜릿 두 개가 전부였다. 완제품은 어느 정도 재고가 있었으나, 원하던 초콜릿이 모두 팔려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는 손님들도 생겨났다.


막 다섯 시가 되었을 때였다. 이제 진열장에 남은 것은 바닐라 커스터드 초콜릿 두 개와 다크 초콜릿 하나가 전부였다. 시에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시계의 분침이 다섯 시 정각을 가리키자, 가게의 팻말을 돌려 ‘영업 종료’ 글귀가 보이도록 하려 했다. 그 순간, 마지막 손님이 가게에 발을 들였다. 그는 가게에 들어오자마자 진열장을 둘러보았다. 진열장이 텅텅 빈 모습에 실망하려던 그는, 아직 남아있는 초콜릿 세 개를 보며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그는 얼른 트레이와 집게를 가지고 와서 남은 초콜릿 모두를 담아 계산대로 왔다.


“이거 계산해 주세요.”

“네.”


이온은 그가 담아온 초콜릿을 집게로 집에 작은 종이상자에 담아 건넸다. 상자를 받아 든 그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이 느끼기에는 기쁨과 슬픔, 괴로움과 안도감이 한데 뒤섞인 표정 같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는 한동안 계산대 앞을 떠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이온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괜찮냐는 질문을 던지려 했다.


막 입을 열려는데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보다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는 살짝 슬프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초콜릿을 꼭 먹고 싶었어요. 매번 지나치기만 하고 들어오지 못했었는데 참 잘한 것 같아요.”


그의 말을 들은 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게는 다섯 시가 마감이라 초콜릿이 웬만큼 소진되었다 싶으면 문을 닫거든요. 오늘도 그러려고 했는데 마침 잘 오셨어요.”

“네, 종류는 상관없었는데 뭐라도 남아있어서 다행이네요. 완제품도 상관없긴 하지만, 매일 사장님이 직접 만드신다는 초콜릿을 꼭 먹어보고 싶었거든요.”


그는 말을 마치며 초콜릿을 든 상자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더니 상자를 열어 바닐라 커스터드 초콜릿 하나를 꺼내 맛보았다. 아마 초콜릿이 녹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슬픔이 지배적이었던 그의 얼굴에 차츰 편안함이 자리 잡았다. 경직되었던 볼과 입매가 느슨해지고, 처졌던 눈썹도 본래의 자리를 되찾았다.


“듣던 것처럼 정말 맛있네요. 다음에는 조금 더 일찍 와야겠어요.”


그는 한결 홀가분해진 표정으로 가게 문을 나섰다. 이온은 그의 뒷모습을 얼마간 바라보다가 진열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말은 정리지만, 매일 재고가 거의 남지 않았기에 설거지와 청소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그녀는 진열장 안의 커다란 트레이 여럿을 하나로 겹치며 생각했다.


세상에는 많은 직업이 있지만, 초콜릿 하우스의 점원으로 일하는 것은 꽤 보람찬 일이었다. 물론,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는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가게의 초콜릿을 먹은 사람이 진심으로 기뻐하거나 힘든 일상에서 위로받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언제나 마음 한편을 찡하게 하는 데가 있었다.


생각과 함께 트레이를 차곡차곡 겹쳐 놓은 이온은 진열장 문을 모두 닫았다. 트레이를 들고 조리실로 향하려는 그녀의 눈에 시에나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팻말을 돌려놓은 후에도 마지막 손님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온 쪽으로 다가와 그녀가 든 트레이를 제 손에 옮겨 들고 조리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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