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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06. 2024

3. 드라마 (1)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보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을 잡았다. 그녀는 반쯤 뜨다 만 눈으로 알람을 꺼버리고는 벌떡 일어났다. 


월요일이었다. 쳇바퀴 같은 날들이 기다리는 일주일의 시작. 보라는 창문 쪽으로 눈을 돌렸다. 날이 흐렸다. 휴대폰을 켜서 일기예보를 확인했지만 비가 온다는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도 하늘의 색을 보면 꼭 비가 내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긴가민가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준비를 다 마친 그녀는 신발장 위에 놓인 우산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가지고 가는 것이 좋을지 아닐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 일기예보에는 비 소식이 없지만, 또 모를 일이었다. 만일 비가 오기라도 하면 당황스러울 것이 분명했다. 거리에서 비를 맞거나 필요도 없는 우산을 하나 더 사야할 테니까. 그녀는 출근용 가방에 휴대용 우산을 욱여넣다시피 하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다니는 회사는 집과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지하철을 한번 타고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도착 시간에 조금이라도 늦으면 지하철이든 버스든 매정하게 떠나버리기 일쑤였기에 그녀는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와도, 빠른 걸음으로 걸어도 이상하게 시간은 항상 부족한 듯 느껴졌다.


그녀는 분주한 마음으로 좁은 길가에 들어섰다. 그곳은 지하철역으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평소에도 자주 애용하곤 하는데 매일 동일한 시간에 지나치다 보니, 같은 시간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마주치곤 했다. 그들의 걸음걸이도 보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보다 조금 빠르거나 느릴 뿐이었다. 키가 조금 큰 여자 하나는 보라가 열심히 길을 걷고 있으면 매일 뒤에서 나타나 걸리적거린다는 듯 그녀를 쌩 지나치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면 보라는 살짝 짜증이 났다. 같은 회사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빨리 간다고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쩐지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날이라면 모르겠지만, 보라는 갑자기 기분이 확 나빠져서 가방끈을 꼭 잡고 달렸다. 아무리 걸음이 빨라도 걷는 속도가 달리는 속도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보라는 곧 앞서가던 여자를 따라잡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런데 변수가 나타났다. 덩치 크고 느릿한 걸음의 남자들이 길을 막다시피 하고 서있었다. 그들은 각각 지그재그로 걷고 있어 무작정 지나치거나 사이를 뚫고 지나갈 수 없었다. 보라는 그들 사이를 지나쳐 가는데 애를 먹었다.


그러는 새, 보라의 뒤를 따라 걷던 키 큰 여자는 바짝 뒤를 따라왔고, 솜씨 좋게 남자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결국, 보라는 다시 뒤처졌다. 그녀는 길을 빠져나온 후 화가 나서 뒤를 휙 돌아보았지만, 남자들은 이미 저마다 가야 할 곳으로 사라진 뒤였다. 


갑자기 의욕이 뚝 떨어진 보라는 천천히 걸어 역에 도착했다. 다행히 지하철이 떠나지는 않았지만, 역에 근접한 상태였기에 헐레벌떡 계단을 올라 승강장으로 가야만 했다. 월요일답게 승강장에는 사람이 가득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치이며 겨우 지하철에 올라탔다. 출근도 하기 전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몇 정거장 후에 내리는 것으로 겨우 위안을 삼았다.


지하철에 탈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잔뜩 부딪치며 역에서 내린 그녀는 또다시 빠르게 뛰어 역 바깥으로 나왔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고 있다가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다가 타야 할 버스를 놓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순발력을 발휘해 얼른 틈새를 파고들어 버스 정류장 앞에 섰다. 


지하철보다는 덜했지만, 버스에도 사람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보라는 겨우 버스 손잡이를 잡고 휴대폰을 켰다. 딱히 볼 것도 없었지만 시간을 죽이기 위해 인터넷을 켜고 아무거나 눈에 들어오는 글자를 읽었다. 화면에 뜬 신문사의 헤드라인은 대부분 비관적인 제목뿐이었다. 세계 정세가 불안하다든가 어디서 사고가 났다든가, 정치인들이 대립하여 무슨 법안이 의결되지 않았다든가. 그 와중 유일하게 긍정적인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다시 한번 기회를’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내용이었다. 보라는 헤드라인을 누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스트레스를 잔뜩 받는 월요일에 스트레스를 더하고 싶지 않았다.


뉴스를 꺼버린 그녀는 뭔가를 읽는 대신 음악이나 듣기로 마음먹고 플레이리스트를 쭉 둘러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장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싶었지만, 이곡저곡 랜덤으로 노래를 재생하는 버튼을 눌렀다. 출근길에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계속 듣다가 그 노래가 싫어진 경험이 있었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3분짜리 노래가 열 개쯤 재생되고 나자 드디어 회사에 도착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계단을 올라 사무실에 도착했다. 업무 시간은 아홉 시였기에 십 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그녀는 텀블러를 씻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기 위해 탕비실로 갔다.


탕비실에서는 동료 여직원 두 명이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즐겁다 못해 흥분돼 보이기까지 했다. 살짝 궁금해져서 귀를 기울여 보니, 주말드라마인 ‘다시 한번 기회를’에 관한 내용이 들려왔다. 드라마의 배우가 너무 잘생겼다는 둥, 연기를 잘한다는 둥, 내용이 무척 재미있다는 둥. 그들은 보라가 탕비실에 들어온 모습을 발견하자 인사를 건네며 드라마를 봤냐고 물었다. 보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컵에 물을 받아 탕비실을 나왔다.


애써 무시하다시피 했지만, 점심시간에도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두 명이 아니라는 점만이 달랐다. 동료 여직원 둘을 더해 과장과 차장까지, 팀에서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이 그녀뿐인 듯했다. 다들 주연 배우가 어떻니, 스토리라인이 어떻니 하는 와중 그녀만 어색하게 밥을 먹었다. 본래 회사에서는 말이 없는 그녀였지만 그날따라 할말이 더 없었다.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날 줄 알았다. 그러나 착각이었다. 네 반쯤, 잠시 외출했던 사장이 돌아왔다. 그는 어울리지 않게 화장품 회사 로고가 박힌 쇼핑백을 든 채였다. 쇼핑백 바깥으로는 둘둘 말린 기다란 포스터 같은 것이 하나 튀어나와 있었다.


“사장님, 그게 뭐예요?”


붙임성 좋은 여직원 하나가 그에게 묻자, 사장은 쑥스러운 듯 머뭇거리다가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 그 요즘 무슨 ‘다시 한번 기회를’인가 뭔가 하는 드라마가 유행하잖아? 우리 딸내미가 거기 나오는 배우

를 좋아하는데 이걸 사면 친필 사인 포스터를 선물로 준다고 하더라고. 요즘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느라 힘들어하는데 이런 거라도 해줘야지.”

“그거 구하기가 엄청 힘든데 어떻게 구하신 거예요?”

“친구 녀석이 여기 화장품 회사에서 요직에 있거든. 부탁 좀 해뒀지.”

“정말요? 사장님 따님 정말 부럽다. 저도 가지고 싶었는데!”

“저도요.”


여직원들이 부러운 눈길을 보내자 조금 전만 해도 쑥스러운 모습을 보이던 사장은 이내 우쭐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자연스레 모두는 드라마에 관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보라는 그때도 여전히 할말이 없었기에 괜스레 발주할 물건을 적은 주문서만 몇 번 더 확인했다. 그런데도 대화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고, 퇴근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주변이 잠잠해졌다.


월요일이라서 안 그래도 힘이 빠지는데 온종일 사람들의 수다를 견디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녀는 여섯 시가 되자마자 얼른 자리를 박차다시피 하고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좀 숨통이 트일 것만 같은 기분도 잠시, 퇴근길에 사람이 빽빽이 몰린 버스 정류장을 보니 다시 숨이 확 막혔다. 그녀는 정류장에 줄을 서서 기다리려다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아 다음 버스를 타기로 하고 근처의 서점으로 들어갔다.


서점 안은 조용했다. 사람이 많지 않아서 마음이 안정됐다. 그녀는 들어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신간 코너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요즘 한창 인기가 많은 베스트셀러와 꾸준하게 팔리는 책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책 저 책을 눈으로만 훑다가 어느 책 앞에 시선을 고정했다. 책의 제목은 ‘다시 한번 기회를 대본집’이었다. 


드라마가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대본집 발간이라니. 인기가 많아도 여간 많은 것이 아닌가 보았다. 그녀는 애써 그냥 지나치려다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대본집을 펼쳤다. 두껍고 질 좋은 종이를 몇 장 넘기자, 드라마의 줄거리가 간략히 나왔다. 보라는 빠른 속도로 줄거리를 읽어보았다.


드라마의 남주인공은 삼십 대 중반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일도 연애도 재테크도 무엇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 없는 인생. 별것 아닌 일로도 상사의 화풀이 대상이 되기 일쑤인 그는 어느 날 사장의 비밀을 목격하게 된다. 겁많은 그는 못 본 척하고 지나가려 하지만 그만, 사장과 눈이 마주쳐버린다. 이후, 사장은 괴한들을 사주해 그를 살해한다. 남주인공은 그대로 인생이 끝나나 싶어 후회하며 죽어가지만, 신기하게도 눈을 뜨니 십 년 전 과거로 돌아온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게 다시 한번 삶의 기회를 얻은 그는 인생을 새롭게 살리라 마음먹으며 미래에서 습득한 정보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줄거리를 다 읽은 보라는 책을 몇 장 더 넘겨보다 덮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서점에 더 머물렀다가는 마음이 더 답답해질 것만 같았던 그녀는 다시 바깥으로 나가 인파를 뚫고 버스를 타기 위해 줄을 섰다. 서점에서 시간을 보낸 덕분인지 버스는 금세 왔고,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녀는 서점에서 본 드라마 줄거리 외에도 근래 방영하는 드라마의 줄거리들을 떠올려 보았다. 트렌드가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들어 부쩍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는 내용의 드라마가 많아진 듯했다. 소재는 비슷해도 작가의 대본이나 감독의 연출, 배우의 연기력에 따라 드라마의 질이 달라지기에 어떤 드라마는 큰 인기를 얻고, 어떤 드라마는 소소한 시청률로 종영했다. 그래도 같은 소재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보면, 해당 소재가 사람들의 어떤 욕망을 자극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 욕망은 무엇일까? 드라마의 남주인공처럼 평범한 회사원인 보라는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평범하고 지루한 인생이 바뀌길 원했다. 현재 습득한 지식을 그대로 지닌 채 과거로 돌아가 자신을 둘러싼 불리한 상황을 극복하여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했다. 


보라는 머릿속에 생각을 주렁주렁 매단 채로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 정류장과 마찬가지로 퇴근길의 지하철역은 붐볐다. 슬쩍 보기만 해도 아침보다 사람이 더 많은 것도 같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곧장 지하철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아 역 주변을 돌다가 '시계탑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광장 한가운데는 분수대가 있었고, 그 옆에는 오랜 역사를 지닌 시계탑이 하나 서있었다. 그녀는 시계탑 근처에 놓인 벤치에 가서 앉았다. 광장 주변 번화가 쪽을 둘러보니 식당이 여럿 보였다. 배가 썩 고프지는 않았지만, 저녁을 먹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같았다. 그녀는 눈으로 식당을 둘러보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드라마 내용에 관련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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