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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09. 2024

5. 드라마 (3)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드라마의 매력에 빠져든 그녀는 언젠가부터 홀로 각본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을 쓰거나 만화를 그리는 친구들과 달리, 반 친구들에게 노트를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혼자 계속해서 각본을 썼다. 그러다 가끔 연극부에서 주최하는 공모전에 직접 쓴 각본을 제출해 당선되기도 했다. 당선 자체도 기분 좋았지만, 직접 쓴 각본이 연극으로 탄생하는 모습을 보면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벅차올랐다. 계속 열심히 글을 쓰다 보면, 자신의 각본이 언젠가 드라마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러 진로를 정하는 시기가 찾아왔다. 그녀는 한참을 고민하다 부모님께 꿈에 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 보았다. 조금은 응원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부모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드라마 작가 같은 건 직업이 되지 못하며, 밥 굶기에나 좋다고 그녀를 말렸다. 일단 직업을 가지고 취미로 해 보다가 잘 되면 전향해도 늦지 않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잠시 말도 안 되는 꿈을 꾸었던 것이 부끄럽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아갈 미래가 두려웠다. 꿈과 현실은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글을 쓴다고 누가 바로 돈을 주거나 밥을 주는 건 아니었다. 당장 집안 형편이 나아지지도 않았다. 게다가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들도, 벌써 유명한 작가인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그들과 어깨를 견줄 만한 작품을 쓴다는 건 감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녀는 성적에 맞춰 취업에 연관된 학과에 진학했다.


처음 대학에 들어간 보라는 갈팡질팡했다. 수업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공부했다. 자꾸 각본을 쓰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녀는 공부하는 한편으로 짬이 날 때마다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 응모했다.


공모전에 작품을 접수하는 순간에는 언제나 기대감에 부풀었다. 만약 당선되면 직접 쓴 각본이 드라마가 되어 방영될 수도 있었고, 그러다 보면 좋아하는 일을 해 보며 살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하다 못해 괴팍했다. 예상했던 대로 세상에는 각본을 잘 쓰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항상 주인공을 차지했다. 양보란 것은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각본 쓰는 속도가 느려졌다. 시작은 하는데 도무지 완성하지 못하고 흐지부지된 작품만 쌓여갔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공모전에도 작품을 내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새로운 드라마는 계속 나왔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는 드라마도 몇 있었다. 보라는 TV를 트는 게 괴로웠다. 인터넷이나 휴대폰에 인기 드라마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것도 보기 힘들었다. 방영하는 모든 드라마와 벽을 쌓고 홀로 완성하지 못한 각본만 붙잡고 늘어졌다.


한창 생각이 계속될 때쯤, 음식이 나왔다. 스테이크 파스타는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과거의 그녀는 배가 아주 고팠는지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다. 그녀와 달리 보라는 깨작거렸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서인지 밥맛도 별로 없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접시를 비우는 속도에는 차이가 생겼다. 보라는 과거의 그녀가 접시를 거의 비운 모습을 보며 물었다.


“취업 준비하느라 힘들지?”

“그렇지, 뭐. 그래도 조금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왜?”

“미래의 나는 어쨌든 취업에 성공해서 직장에 다니니까. 목에 걸린 그 사원증, 정말 멋져 보여. 아르바이트하면서 사원증 걸고 다니는 사람들 보면 항상 부러웠거든.”

“그래? 그러고 보니 정신없이 퇴근하느라 이것도 안 빼고 있었네.”


보라는 사원증을 목에서 빼내어 가방에 넣었다.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어보려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가슴이 콱 막히는 느낌을 받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음식이 맛있다며, 미래에는 취업에 성공해서 다행이라며 안도하는 과거의 그녀에게 뭐라도 말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저기, 내가 하는 일 말이야, 사실은 적성에도 안 맞고 하나도 재미없어. 꿈이랑은 완전히 멀어져서 이제 드라마는 보지도 않게 됐어.”


보라가 가시 돋친 어조로 말하자, 과거의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해. 철없이 말해서. 난 그냥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드니까 미래의 내가 취업을 한 것만으로도 한숨 덜었다고 생각했어.”

“한숨 덜기는, 취미도 흥미도 없는 일에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해야 하는 게 얼마나 답답한지 모르지?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숨이 턱 막혀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야.”

“그러면 말이야….”

과거의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겨우 보라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그 일, 그만두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네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쉽게 말해도 되는 거야? 나도 그만둘 수 있었다면 진작 그만뒀어. 먹고 살아야 하니까 못 그만두는 거 아니야? 그러는 넌 취업 준비하는 거 그만둘 수 있어?”


보라의 물음에 과거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못 그럴 것 같아. 학자금 대출도 많이 남았고, 아버지도 은퇴하셨으니까.”

“결국 그런 소리구나. 미래의 자신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는데도 드라마 작가로 살아보겠다는 용기는 생기지 않는 거야? 현실의 압박 같은 건 잊고 멋지게 꿈에 도전해 보겠다는 생각은 가져보지 못하는 거야?”


결국, 진심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보라는 급작스레 입 밖으로 나온 말에 당황하면서도 격한 감정이 사그라지지 않아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에 반해 과거의 그녀는 조용했다. 보라는 과거의 그녀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눈을 내리까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보니,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 사이 어딘가의 감정이 느껴져 견딜 수가 없었다.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던 보라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계산대로 다가갔다. 그러곤 두 사람 몫의 음식값을 계산하고 가게 바깥으로 나와버렸다.


가게 밖으로 나온 그녀는 빠르게 걸어 그곳을 벗어났다. 지금은 어디로든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마음을 진정시키고 싶었다. 그녀는 얼른 한적해 보이는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걸으면서는 감정을 식히기 위해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했지만, 자꾸 과거로 돌아오기 전, 서점에서 읽었던 드라마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드라마의 주인공이 미래의 기억을 지니고 과거로 돌아와 인생 역전을 꿈꾸는 바로 그 이야기가.


아무래도 미래의 기억을 지닌 채 과거로 돌아와 승승장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적어도 자신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미래의 모습을 알게 되고서도 뭔가를 바꾸려는 용기가 없었다. 그저 말뿐이라도 꿈을 향해 나아가 보겠다고, 드라마 작가에 도전 해 보겠다고 하지 못했다.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았다. 지독한 겁쟁이처럼 보였다.


여전히 화를 가라앉히지 못한 채, 그녀는 계속 걸었다. 이름 모를 골목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사람이 없어서 좋았지만, 주위는 점점 어두워졌다. 아직 밤이 그리 늦지 않았는데 문을 연 가게도 별로 없었다. 번화가의 골목이 이렇게 어둡고 한적한 곳이었나? 보라는 살짝 으스스한 느낌마저 받으며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쳤다.


한참이나 목적지를 찾지 못한 채 걷고만 있자니 왼쪽 어깨가 아팠다. 그녀는 가방을 열어 안에 든 휴대용 우산을 바라보았다. 무겁기만 하고 쓸모도 없는 그 우산을 보고 있노라니 후회가 되었다. 왜 일기예보를 믿지 못했을까? 아니, 일기예보가 틀려서 비를 맞으면 좀 어때? 우산을 사면 또 어때? 그런다고 해서 무슨 커다란 문제가 생기는 것도 아닐 텐데.


갑자기 보라는 모든 것이 싫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일기예보가 가끔 틀리는 것도, 출근할 때마다 만나는 키 큰 여자와 경쟁하듯 좁은 골목을 지나가는 것도, 사람이 빽빽한 지하철과 버스도, 애정없이 다니는 회사와 퇴근 후 완성하지 못할 각본을 끄적거리며 무의미하게 보내는 시간도. 그중에서 가장 싫은 것은 자신이었다. 과거의 자신도 현재의 자신도, 어쩌면 미래의 자신도 모두. 이토록 갑갑한 일상을 보낼 바에는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만 싶었다. 아니, 정말 그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그때,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은 정확히 아홉 번을 울리고 멈추었다. 고장났던 시계가 수리된 것일까? 의도치 않게 과거로 돌아와 버렸으니, 미래로 되돌아가려면 재빨리 시계탑 근처로 향하는 것이 맞겠지만, 보라는 그럴 힘이 없었다. 주위에는 이제 불빛조차 보이지 않았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어깨에 멘 무거운 가방과 그만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쉬어갈 만한 가게를 찾아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서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겨우 어떤 가게 하나를 발견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인상적인, 간판 없는 가게였다. 그녀는 가게 문을 슬쩍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대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모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메뉴판이 놓여있었다.


보라는 계산대 근처의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벽에 걸린 시계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계속 반복되어도 주인은 나타날 기미가 없었다. 그녀는 오롯이 혼자였다. 답답한 마음을 어딘가에 털어놓고도 싶었지만, 과거의 자신마저 미래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메뉴판이 들어왔다. 그녀는 구경이라도 하자 싶어 메뉴판을 펼쳤다. 그곳에는 초콜릿을 첨가한 음료 이름이 여럿 적혀 있었다.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아서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메뉴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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