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자던 민은 부스스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밤을 새운 것도 아니고, 야식을 먹은 것도 아닌데 머리가 아프고 속이 더부룩했다. 그는 관자놀이쪽을 문지르며 냉장고를 열었다. 전날 편의점에서 사 온 그릭요거트가 눈에 들어왔다. 일단 뚜껑을 열긴 했지만, 입맛이 없어서 몇 입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옷장으로 다가갔다. 옷장은 딱 반으로 나뉘었다. 왼쪽에는 무채색 계열의 후드티가, 오른쪽에는 연한 하늘색의 정장 셔츠가 여럿 걸려있었다. 어떻게 보아도 다른 스타일이었으나, 모두 그의 옷이었다. 민은 후드티를 입고 싶은 마음을 꾹 느르고입고 싶었지만, 손을 뻗어 각 잡아 다린 셔츠를 집었다.
분주하게 셔츠 단추를 잠근 민은 화장실에 들어가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왔다. TV에서는 요즘 한창 인기 있는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었다. 통통하고 짤따란 몸을 지닌 동물 캐릭터들이 출근 준비에 한창이었다. 옷을 챙겨입고, 넥타이를 매고서는 미어터지는 지하철을 타려 안간힘을 썼다. 잠시 애니메이션을 보던 민을 넥타이를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시 옷장으로 간 그는 진청색 넥타이를 꺼내 목에 맸다.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넥타이를 맬 때의 기분은 이상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좋지 않았다. 목에 걸 때부터 갑갑했고, 목을 향해 조일 때면 숨이 막혔다. 꽉 매든 느슨하게 매든 마찬가지였다.
넥타이를 맨 그는 정장 재킷을 셔츠 위에 걸치고, 서류 가방을 손에 들었다. 막 집을 나서려는데 책상 위에 진열해 둔 작은 인형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자기 인형도 있고, 모형 제작용 점토로 만든 인형도 있었다. 인형의 크기는 대개 작고 아담했다. 호리호리하고 큰 키를 지닌 민과는 정반대였다. 인형들을 눈에 담자, 민은 숨 막히는 것만 같던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얼른 돌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평소 같았다면 사람으로 잔뜩 붐볐겠지만, 주말 아침이라 지하철역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인파에 치이지 않는다는 점은 나쁘지 않았으나, 주말 출근을 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았다. 민은 휴대폰으로 인형 만드는 법에 관한 영상을 보다가 회사에 도착했다. 회사에 도착하자 빛바랜 건물 위로 햇볕이 내리쬐었다. ‘참 좋은 주식회사’라고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본래 검은색이었을 간판 글씨는 건물처럼 빛이 다 바래서 회색으로 보였다. 햇빛이 눈 부셨던 민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주말의 회사는 지하철역처럼 한산했다. 곧장 엘리베이터를 탄 그는 5층에서 내렸다. 사무실이 있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오래되어서 타고 내릴 때 소음이 심했다. 언제 들어도 적응이 되지 않는 소리라 그는 문이 닫힐 때 한번 흠칫하고는 사무실로 걸어갔다. 그가 근무하는 부서는 복도 맨 끝에 있었다. 사무실에는 출근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했다. 이번 주말은 연장근무 없이 그냥 넘어가나 싶었는데 과장이 퇴근 전에 갑자기 일을 넘겨주었다. 다음날까지 처리하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컴퓨터를 켠 민의 손이 빨라졌다. 일단 일을 시작하면, 민은 집중하는 편이었다. 때로는 머리가 지끈거릴 때까지 숫자를 바라보고 글자를 입력했다. 익숙해지면 어려운 업무는 아니었으나, 양이 너무 많았다. 쉴 새 없이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눈이 조이면서 급격히 두통이 찾아왔다.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그는 당황하지 않고 서랍을 열어 두통약을 꺼냈다. 흡수가 빠른 액상 형태의 알약이었다. 물과 함께 약을 몇 알이나 삼킨 민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벌써 열두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 회사와 거래하는 식당에서 점심을 주문했다. 그쯤 과장이 회사에 도착했다. 과장은 사무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청소가 안 되었네, 먼지가 쌓였네하고 툴툴거리더니 한참 만에야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민에게 물었다.
“막내, 어제 시킨 일은 잘하고 있지?”
“지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안에는 끝낼 수 있어?”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가 뭐야? 다 끝내야지. 별것도 아닌데.”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대답을 듣고서도 과장의 표정은 시원찮았다. 그는 혀를 쯧쯧 차며, 요즘 젊은 세대의 끈기 없음과 열정 부족에 관해 떠벌리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민은 속이 비었음에도 뭔가가 얹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막상 점심이 도착했을 때는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그는 더부룩한 속을 달래기 위해 블랙커피를 한 잔 타 마셨다. 커피를 몇 모금 마실 때는 속이 정화되는 것 같았으나, 그것도 몇 모금 더 마시니 위가 쓰렸다. 그는 쿡쿡 쑤시는 배를 문지르며 다시 자리에 앉아 일했다.
과장은 민이 급히 점심을 먹고 일을 하는 동안, 바깥에 나가서 거나하게 식사하고 돌아왔다. 배가 적당히 불러 기분이 좋은지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톱을 깎기 시작했다. 콧노래와 발톱 깎는 소리가 섞인 채 온 사무실에 울려 퍼졌다. 두껍고 싯누런 발톱 한둘은 그대로 튀어서 민의 눈앞을 지나쳤다. 민은 비위가 상했으나,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일을 계속했다. 파일을 완성한 후에는 두 번 정도 검토를 하고 인쇄 버튼을 눌렀다. 그는 복합기가 작동을 멈추자마자 파일을 자리로 가져왔다.
과장은 발톱 깎는 일에 정신을 빼앗겨 민이 무엇을 하든 별 관심이 없었다. 발톱을 다 깎고도 모자랐는지 손톱을 깎으며 콧구멍을 벌렁거렸다. 콧구멍을 벌렁거린다는 것은 지금 집중하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표시와도 같았기에 민은 그가 열 손가락의 손톱마저 다 깎고 손톱 갈이로 굳은살마저 정리하고 난 후에 완성된 파일을 건넬 수 있었다.
“말씀하신 파일 완성했습니다.”
“어, 그래? 거기 놔둬.”
“네.”
민은 책상 한편에 서류를 내려놓자 과장이 말했다.
“오늘은 그쯤 해.”
“알겠습니다.”
“검토해서 고칠 것 있으면 메신저로 수정 사항 말해줄 테니 그리 알고. 급히 수정해아 할 부분이면 내일 출근해서 고쳐 놔야 해.”
“네.”
과장의 말을 들은 민은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얼른 자리로 가서 가방을 챙겨 어깨에 멨다. 그러자 과장은 손톱갈이를 내려놓고 민을 올려다보았다.
“막내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네, 과장님.”
“업무분장에 불만이라든가 하는 건 없지? 기술지원팀 보니까 신입으로 들어온 직원 하나가 아주 버릇이 없다는 소문이 돌더라고. 막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나도 안 하나 봐. 그것뿐이게? 본연의 업무도 많다면서 그 팀 과장에게 항의를 하는 모양이야. 뭐 그런 녀석이 들어왔는지, 원. 반면교사로 삼고 절대 그렇게 되면 안 된다.”
“네.”
“그래, 그만 가 봐.”
그만 가보라는 말에 민은 꾸벅 인사를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를 걸어 엘리베이터 앞으로 다가가니, 마침 문이 열리고 있었다. 민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소화는 여전히 되지 않고 카페인 때문에 부글부글 끓는 느낌마저 있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회사를 벗어날 수 있어서 그런 것이 분명했다.
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샤워를 하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TV를 켜니, 클래식 음악방송을 하고 있었다. 배경음악으로 듣기에 꼭 맞는 방송이었다. 저녁으로는 전날 사둔 닭가슴살 샌드 위치와 과일 주스를 먹었다. 먹으면서 유튜브를 켜고 아침에 못다 본 인형 만드는 영상을 보았다. 영상이 끝날 무렵 그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점토가 가득했다. 그는 단단한 재질의 점토와 철사, 쿠킹포일을 꺼냈다. 재료를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음에는 철사로 작고 동그란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쿠킹포일을 감쌌다. 민은 완성된 뼈대 위에 점토를 덧붙이기 시작했다. 점토는 꽤 단단해서 손으로 무르게 만든 다음에야 모양을 낼 수 있었다. 점토를 누를 때는 힘을 많이 써야 했지만, 일 할때와 달리 전혀 힘들지 않았다.
어떤 일에 몰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행복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면 결과물이 하나 둘 나오곤 했다. 그날 그가 완성한 것은 아침에 시청한 애니메이션에 나온 캐릭터였다. 얼굴과 몸통이 둥글둥글한 고양이는 양복을 입은 채였다. 그 모습이 퍽 귀엽기도 하고 애잔하기도 했다. 너도 나처럼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그 작은 몸과 손발을 가지고서. 그는 인형의 동그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잠시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점토로 인형을 만들어 본 것은 초등학생 때였다. 처음에 그는 심드렁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미술 수업에 필요하니 가져오긴 했는데, 네모난 직사각형 덩어리가 뭐 그리 대단한 모양으로 바뀔까 싶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건, 선생님이 완성된 결과물을 보여주었을 때였다. 네모난 점토가 드레스와 바지를 입은 양치기 소녀와 목동이 되고, 하얗기만 하던 표면에 색을 입혔을 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마감제를 발라 반짝거리기 시작했을 때, 민은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