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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12. 2024

7. 인형 (2)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이후로 그는 용돈을 모아 점토를 사서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실력이 형편없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괴상하다 못해 흉측한 형체만이 완성될 때는 실망스러워서 한동안 점토를 쳐다보지 않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다시 점토를 사고 도서관에서 점토 인형 제작에 관련된 책을 빌려 만들기를 계속했다. 실력은 아주 조금씩 늘었다. 아예 늘지 않는다면 또 모르겠는데 작년보다는 올해, 지난달보다는 이번 달에 만든 인형의 형태가 더 그럴싸해지곤 했다. 어린 시절에 비하면 크나큰 발전이긴 했지만, 인형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사는 사람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유튜브만 봐도 머릿속의 결과물을 현실에 그대로 재현하는 금손들 천지였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삶은 어떠할까? 즐거울까, 아니면 일이 되면 뭐든 힘들어질까? 절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고객들의 요구를 맞추다 보면 정작 만들고 싶은 인형을 만들 시간도 없겠지. 실험적인 도전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해. 역시 취미로 하는 편이 좋을거야. 난 실력도 그리 출중한 편은 아니니까. 생각이 자꾸 부정적인 곳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과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너저분하게 손톱과 발톱을 깎던 모습과 내일도 나와야 할지 모른다고 으름장을 놓던 모습, 막내는 무조건 상사의 지시에 복종해야 한다고 강조하던 모습도.


뭐든 지금보다는 낫지 않을까? 적어도 날아다니는 누런 발톱과 함께 일을 하지는 않을 테니. 그는 한숨을 쉬며 붓을 내려놓았다. 물통을 비우고 물감도 가져오기 위해서였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SNS 알림이 울린 모양이었다. 민은 휴대폰을 켰다. 며칠 전 올린 인형 사진에 댓글이 달려있었다. 댓글에는 그가 만든 강아지 모양의 도자기 인형이 귀엽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댓글을 읽은 민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얼마 전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SNS를 시작했다. 예전의 그는 부끄럽기도 하고 혹여 신상이 노출될까 싶어 SNS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았었다. 혼자 인형을 만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회사 생활이 계속될수록 답답함이 너무 커져 견딜 수 없어졌다. 숨을 돌릴 곳이, 마음껏 인형을 만들 수 있는 공방 같은 곳이 필요했다. 현실에는 그런 곳을 대여하거나 꾸밀 돈을 마련할 수 없었기에 온라인 세상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만들기 쉬운 SNS 계정을 만들고, 벽지와 인테리어 소품으로 공간을 꾸미는 대신 글자와 사진으로 자신만의 공간을 마음껏 꾸며놓았다.


애석하게도 몇 주 동안은 글을 쓰든 사진을 올리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너무 썰렁해서 의기소침하기까지 했는데 드디어 첫 댓글이 달린 것이다. 민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댓글에 반응했다. 하트를 누르고 감사하다는 인사도 적었다. 그러자 금세 같은 사람이 또 다른 댓글을 달았다. 인형을 판매하면 당장 사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서 두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일까? 정말로? 세상에 솜씨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내가 만든 인형 같은 걸 사고 싶다는 걸까? 사진이 잘 나와서 그렇지 직접 보면 실망하는 거 아냐? 그는 휴대폰 위로 기다란 엄지손가락만 휘적거리며 댓글에 답하는 것을 미루었다.


민이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살짝 열어둔 창밖으로 광장 시계탑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휴대폰 상단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막 열 시를 넘기고 있었다. 종이 아홉 번을 울렸을 때 그는 이제 한 번만 더 울리면 종소리도 멈추겠거니 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종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열 번을 지나 열한 번, 열두 번, 열세 번, 열네 번을 넘어 계속해서 울렸다. 동시에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시계의 종소리와 함께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책상과 책, 침대, 서가와 그 위에 진열한 작은 인형들, 서랍 안의 점토 모두 어디론가로 증발해 버렸다. 순식간에 아늑했던 원룸은 인간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곳이 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감도 잡지 못한 민은 의자마저 사라지는 바람에 바닥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입에서는 저절로 ‘아’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허리와 엉덩이가 이어지는 부분을 문지르며 겨우 바닥에서 일어났다.


모든 것이 다 사라졌지만, 다행히 책상 위에 놓여있던 휴대폰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 화면을 켜서 날짜와 시간을 살폈다. 날짜는 토요일, 시간은 열 시 오 분이었다. 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바깥으로 나가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막 문을 열려고 했을 때였다. 그는 이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손잡이를 잡을 수 없었고, 마치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손은 그대로 문손잡이를 통과했다. 당황한 그는 문에 손가락을 살짝 가져다 대보았다. 손가락은 그대로 문을 통과했다. 어떤 감촉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친김에 팔을 쑥 내밀어 보았지만 팔 또한 문을 통과해 버릴 뿐이었다.


한밤중에 백일몽이라도 꾸는 것일까? 그는 눈앞에 벌어진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두 손으로 뺨을 때려보기도 하고 꼬집어보기도 했다. 아팠다. 팔이 문을 통과해 버리는 것이 이상해서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에서 빼서 손을 통과해 보려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물리 법칙의 적용이 뒤틀려 버린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지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민은 일단 바깥으로 나가서 상황을 살피는 것이 좋다는 판단을 내렸다.

문을 통과해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오래되어 녹슨 계단 손잡이와 낡은 계단은 그대로였다. 복도를 채운 살짝 퀴퀴한 냄새도 여전했다. 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출입문을 통과해 바깥으로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주택가 사이로 난 골목을 지나 번화가에 다다르니, 시계탑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 이상하게 울렸던 것과는 달리, 시계는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민은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탑과 마찬가지로 열시 이십 분이었다.


주말, 시계탑 광장의 밤은 화려했다. 사람들은 쉴 새 없이 지나다녔고, 가게 위에 걸린 색색의 간판은 한낮의 태양만큼이나 밝게 빛났다. 광장 동쪽 건물에 설치된 전광판에서는 광고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색이 너무 화려하고 글씨가 빠르게 지나가서 머리가 아팠다. 민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하고 놀란 마음에 어디 앉아 쉬고 싶었지만, 휴대폰을 제외한 모든 물리적 대상은 그를 거부했다. 벤치든 분수대 위든 몸을 기대 쉬려고만 하면 그대로 통과해 버리는 통에 바닥에 주저앉기 일쑤였다. 그렇다고 몸이 지하 깊은 곳으로 쑥 빨려 들어가지는 않았다. 엉덩방아만 찧으며 바닥에 떨어질 뿐이었다.


적어도 바닥에만은 물리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까? 민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면서 번화가 주변을 맴돌았다. 사람이 많은 탓에 어딜 가도 몸을 부딪칠 일뿐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모두의 몸을 통과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아무도 그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아차릴 생각도 없는 듯했다. 그건 오늘 같은 일이 일어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전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타인에게 별반 관심이 없었다. 민은 이전에도 자주 느끼곤 하던 고독함을 느끼며 사람들 사이를 지나쳤다.


한참이나 떠돌던 민은 음식점이 늘어선 골목 앞에 다다랐다. 번화가 초입은 아니지만, 골목을 살짝 꺾어 들어가면 전통이 오래된 가게가 하나 있었다. 소박한 가정식을 파는 집이었다. 민은 한 달에 한두 번 그곳에 갔다. 성격 좋은 사장은 드문드문 오는 그를 단골로 여겨주었다. 혼자 음식을 시키고 앉아있으면, 고기를 한 점 더 얹어주거나 곁들임 요리를 넉넉히 쌓아 건넸다. 과하지 않은 배려였기에 마음이 편했다. 민은 그나마 추억이라는 것이 있는 그 가게에 가보기로 했다.


저녁 시간을 넘겨서인지 가게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가게 한구석에만 몇몇 손님이 앉아 튀긴 음식과 함께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사장은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민은 문을 그대로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곳곳을 둘러보았다. 크게 바뀐 점은 없었다. 다만, 가게 식탁보를 모두 바꾸었는지 분위기가 이전보다 산뜻하게 느껴졌다. 그에 반해 사장과 계산대 앞에서 주문을 받는 그의 아내는 이전보다 나이들어 보였다. 민은 그제야 가게 기둥에 매달린 커다란 달력을 바라보았다. 달력에는 연도가 적혀 있었다. 정확히 3년 후였다.


날짜를 확인한 민은 가게에서 나왔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들이 새롭게 보였다. 골목 곳곳에는 전에는 없던 가게가 여럿 생겼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이전보다 세련되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골목에서 나와 광장 맞은편 건물의 전광판으로 눈을 돌렸다. 한 광고에서 연도와 날짜가 나왔다. 달력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3년 후의 연도와 날짜였다. 민은 건물 옆에 가설 펜스가 둘려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펜스는 이미 사라진 후였고, 그곳에는 새로운 주상복합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갑작스럽지만 시간이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그렇다면 분명 자신도 변했어야 했다. 민은 3년 후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만약 미래 시간대의 자신을 만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래의 자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적어도 이전에 살던 집에서는 살지 않는 것 같은데, 어디서 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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