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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16. 2024

8. 인형 (3)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아주 잠깐, 민의 머릿속에 희망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희망은 급작스레 미래로 오기 전, 받았던 메시지에서 비롯되었다. 누군가는 그가 SNS에 올렸던 인형을 사기 원했다. 첫 판매가 성공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준 건 아닐까? 그 덕에 인형 제작자가 되어 한적한 도심 변두리에 집을 얻어 살며 프리랜서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몰라. 생각만 해도 기뻤다. 미래가 그토록 찬란하다면야, 아무 걱정도 없을 것만 같았다.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을 수도 있었다. 집을 옮긴 건 그저 계약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며, 그는 여전히 회사에 다니며 별다른 것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는지도 몰랐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을 정도의 호기심이 일었으나, 확인할 길이 없었다. 민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전광판에서 확인한 바로는 그날은 토요일이 아니었다. 과거와 날짜는 같아도 요일이 달랐다. 다음 날 역시 일요일이 아니었다. 평일에는 회사 문을 열 것이고, 회사에 가보면 어느 정도 미래의 가닥을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는 네온사인이 꺼지지 않는 밤거리를 얼마쯤 더 거닐다가 집으로 향했다. 텅 비었어도 집은 집이었다. 가구가 하나도 없어 삭막했지만, 살았던 기억이 남아 있어 한편으로는 아늑했다. 민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누웠다. 입고 있는 옷이 도톰해서 이불이 없어도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다행이라는 생각도 잠시, 주말 출근을 했던 터라 눕자마자 피로가 급격히 몰려왔다.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새벽 여섯시를 살짝 넘겼을 때였다. 출근하는 요일에는 항상 그쯤 눈이 떠졌다.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삼십 분 정도를 더 누워있다가 일어났다. 창밖으로 새벽빛이 스며들었다. 민은 바깥으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아직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적지도 않았다. 그는 적당한 인파에 둘러싸인 채, 지하철에 올라탔다. 노선표를 보니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노선이 개통되어 있었다. 일부 환승역 불편으로 지하철 확장공사를 한다더니 완공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회사로 향하는 길은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막 회사에 도착해 받은 느낌도 비슷했다. 회사는 변한 것이 없었다. 빛바랜 건물 외관도 낡은 엘리베이터도 그대로였다. 그는 5층에 내려 사무실로 향했다. 일하던 자리에 가보니, 직함표 아래 적힌 이름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래도 3년 후의 자신은 회사에 다니지 않는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회사에 다니지 않으면 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민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시간이 일러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과장이 출근했다. 과장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컴퓨터를 켜고 연장근무 신청을 하자마자 의자에 기대 잠을 잤다. 참 좋은 주식회사는 여덟 시 이전에 출근할 경우 해당 시간을 연장근무로 인정해 주었다. 과장은 그 점을 이용해 항상 일찍 출근하곤 했는데 3년 전과 달라진 점이 없었다.


과장이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직원 한 명이 출근했다. 일에 의욕도 없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어 만년 대리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었다. 그 또한 언제나 출근 시간은 빨랐다. 아니, 출근 시간만 빠르다고 해야 옳았다. 그는 과장처럼 연장근무 신청서를 올린 다음, 곧바로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켜고 주식을 들여다보았다. 주식 그래프는 대부분이 곤두박질을 치고 있었다. 그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으며 손으로 매수 버튼을 눌렀다. 3년 전에도 일은 하지 않고 주식에만 열과 성을 다하더니, 놀랍도록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세 번째로 출근한 사람은 예전에 민이 앉았던 자리에 새로 온 여직원이었다. 얼굴이 앳되고 태도에 긴장감이 서린 것으로 보아, 팀의 막내 같았다. 그녀는 과장이나 만년 대리와는 달리 오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캐비닛을 열었다. 캐비넷에는 전날 못다 처리한 것으로 보이는 서류가 가득했다. 그녀는 서류를 꺼내 책상 옆에 쌓아놓은 다음, 컴퓨터 화면과 번갈아 보며 대조 작업을 시작했다. 수기로 입력해야 하는 자료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녀가 한참 일을 하는 도중, 또 다른 남자 주임 한 명이 출근했다. 홀쭉하고 볼이 움푹 팬 것이 어딘지 모르게 얍삽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아무래도 전에 있던 팀원이 다른 부서로 가고 새로 온 모양이었다. 그는 책상 위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과장에게 달려가 인사하며 아부의 말을 늘어놓았다. 과장은 이른 아침부터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그러더니 그에게 힘든 일이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했다. 주임은 별일 없다고 운을 떼다가 슬슬 일이 너무 많고 힘들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그러자 과장이 막내 직원 이름을 불렀다. 일에 파묻혀있던 그녀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과장은 주임의 업무 일부를 그녀에게 넘겼다. 그녀는 싫은 소리 하나 못하고 업무를 한 가지 더 떠안았게 되었다.


두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별일이 다 있다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팀의 마지막 구성원이 도착했다. 민도 아는 여자 대리였다. 사무실의 시계는 어느덧 아홉 시 오 분과 십 분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뛰었는지 숨을 가쁘게 내쉬고 있었다. 지각이었다. 그녀는 민보다 회사에 몇 달 먼저 들어온 선배였는데 3년 전에도 항상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춰 출근하곤 했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일을 조금 일을 하는가 싶더니 과장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말했다.


“과장님, 저 이번 주 주말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 연차 좀 써도 될까요?”

“뭐? 연차?”

“해외여행 가려고 비행기표를 끊어놔서요. 다음 주에는 중요한 일정이 없어서 제가 자리 비운다고 별일 없을 거예요.”

“알아서 해.”

“네.”


과장의 말을 긍정의 뜻으로 해석한 그녀는 신이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연차를 올렸다. 여전히 일은 하는 둥 마는 둥 하다가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났는지 자리에서 일어서서 막내 직원을 불렀다. 그러더니 자신이 해외여행을 떠났을 때, 보고서 하나를 검토해 제출해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래도 수많은 일에 파묻혀있던 막내 직원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과장은 그 모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아, 그런걸 뭘 부탁을 해. 막내가 알아서 해야지.”

“네, 과장님. 괜한 것을 걱정했네요. 잘 다녀오겠습니다. 올 때 선물 꼭 사 올게요.”

“암, 그래야지.”


그 모습을 본 민은 어이가 없었다. 정작 일을 모두 떠맡은 막내 직원은 괜찮다는 말이 없는데 모두 제멋대로 일을 넘기고 본인들의 이익만 챙겼다.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투명인간. 그 단어가 떠오르자, 민은 어쩐지 서글퍼졌다. 돌이켜보면 그도 비슷한 취급을 받았다. 막내라는 이유로 온갖 일을 다 떠맡고, 일을 잘하든 못 하든 과장에게 불려 가 훈계를 들었다.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달라지는 것도 없었다. 통장에 많지도 않은 연장근무 수당이 찍혔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회사에서 지급 가능한 시간을 넘기면 무급으로 일해야 했다.


민이 한참 서러운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데 막내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민은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소리만 안 냈지,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감정이 점점 격해지자, 모두에게 우는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빠르게 사무실 바깥으로 나갔다. 민은 그녀가 걱정되어 뒤를 따랐다. 그녀는 복도 한편에 있는 발코니로 나갔다. 예상대로 그녀는 발코니에 도착하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펑펑 흘렸다. 다만, 누가 들을까 봐 소리는 내지 못했다. 민은 마음이 아팠다.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어서 가만히 옆자리만 지켰다.


눈물을 잔뜩 흘리고 나자 심경에 변화가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언니, 나 진짜 못 견디겠어.”


못 견디겠다는 말을 시작으로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을 빠르게 나열했다. 그녀의 목소리와 행동에서는 짙은 불안이 느껴졌다. 말을 하지 않고 전화기 너머 목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손톱을 계속 물어뜯거나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등, 한시도 가만있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통화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다시 입을 열었다.


“소문이 진짜였나 봐. 내 전임자이셨던 분이 혼자 팀원들이 해야 할 일을 다 하다가 과로로 쓰러졌다는 거 말이야. 평소에도 소화불량이랑 두통이 심했다는데, 건강에 큰 문제가 생겼는지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대. 설마 나도 그렇게 되는 거 아니야?”


그 이야기를 들은 민은 귀를 의심했다. 일이 많다든가 소화불량과 두통이 심했다든가 무시하고 넘기기에는 그녀가 이야기한 전임자와 자신의 공통점이 꽤 많았다. 하지만 전임자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남자 직원 한 명이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나온 바람에 통화는 그만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막내 직원은 채 마르지 않은 눈물을 제대로 닦지도 못하고 다시 사무실로 달려갔다. 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회사를 나섰다. 더는 회사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민은 멍한 상태로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텅 비어 집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출입문을 지나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그의 눈에 우편함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가 살던 호수의 우편함에는 우편물이 잔뜩 꽂혀있었다. 그는 우편물을 집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절대 잡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우편물은 손에 잡혔다. 손에 닿는 종이의 매끈한 감촉에 정신이 퍼뜩 드는 기분이었다. 민은 어두운 건물 출입구에서 우편물을 차례차례 뜯어보았다. 그 중에는 매달 날아오던 고지서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곳에서 온 것들도 있었다. 그는 봉투 안의 내용물을 읽었다.


우편물이 한 장 한 장 읽어 내려갈 때마다 미래에 일어난 일들이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추어졌다. 팀의 막내 직원이 언급했던, 과로로 쓰러진 사람은 그가 맞았다. 회사에서 온 산업재해 보상 관련 통지와 보험회사에서 보낸 우편물을 통해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우편물에는 그가 입원한 병원의 주소도 적혀 있었다. 번화가 근처 대형 병원이었다. 그는 믿기지 않는 눈으로 주소를 훑으며 건물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민은 곧장 병원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렸다. 출근하거나 번화가 쪽에서 저녁을 먹을 때 종종 근처를 지나치곤 했지만, 대형 병원 같은 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젊으니까 아직 병 같은 건 없으니까 잦은 소화불량이나 두통쯤은 약 몇 알로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몸이 주는 신호를 그렇게 무시해 버리면 안 되는 것이었나? 그래서 이런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난밤만큼은 아니어도 번화가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때만큼은 몸이 물질적인 제약을 받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고 마음껏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서였다.


병원은 광장이 끝나는 지점 맞은편에 있었다. 막 건널목을 건너려는데 신호가 바뀌었다. 어차피 그대로 건너도 몸이 차와 부딪칠 일은 없었으나, 그는 기다렸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나서도 뛰지 않고 천천히 걸어 병원으로 들어섰다. 막상 병원에 발을 들이니 실감도 나지 않았다. 공기 중에 배인 소독약의 냄새를 맡자, 마음이 위축되었다. 그는 어깨를 구부린 채 게시판의 안내도를 살폈다. 그가 입원했을 법한 병실은 오른쪽 별관 건물에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병실로 가는 길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그는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겨 병실 앞에 섰다. 병실 앞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는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나서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자신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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