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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19. 2024

10. 영원의 정원 (1)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점점 거세졌다. 보닛에 떨어지는 물방울이 제법 둔탁한 소리를 냈다. 시아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로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주황색 불빛은 따뜻하고도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미처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손이나 옷으로 머리를 가리며 어디론가로 뛰어갔다. 달리는 소리와 함께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학생들이 낼 만한 천진난만한 웃음 소리였다.

차 안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왔다. 요즘 한창 인기를 얻고 있는 래퍼의 노래였다.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일 텐데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집중해서 들어보려고 해도 가사가 머릿속에서 그대로 분해되어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아와 달리, 남자 친구는 살짝 리듬까지 타며 노래를 음미했다. 노래가 계속되는 동안 빗방울 떨어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런 날에는 분위기 있는 재즈나 잔잔한 팝을 들으면 더 좋을 텐데. 그녀는 남자 친구를 슬며시 바라보았다. 그는 음악을 바꿀 기미가 없었다. 더욱 신이 나서 몸을 흔들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을 뿐이었다.


“주택가 쪽이라 길이 좀 막히네, 그렇지?”

“응, 비가 와서 더 그런가 봐.”

“맞다, 아까 뭐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할 말?”

“저녁 먹으면서 그랬잖아. 할 말 있다고.”

“그랬었나?”


시아는 잠시 뭔가를 떠올리려고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그럼 됐고.”

“응.”


시아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여전히 내렸고, 거리는 이제 색색의 우산을 쓴 사람들로 가득했다. 주택가를 지나 번화가 쪽으로 나오니, 우산의 향연은 더욱 화려해졌다. 그녀는 남자 친구에게 잡화점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오늘은 저기서 세워줄 수 있어? 뭐 살 게 좀 있어서 들러야 할 것 같아.”

“알겠어. 신호 바뀌기 전에 골목 쪽으로 꺾을게.”


그는 운전대를 휙 돌려 잡화점 앞에 차를 세웠다. 시아는 잘 가라는 인사와 함께 차에서 내리고는 건널목을 건너 잡화점에 들어갔다. 잡화점은 가맹점으로, 저렴하면서도 실용적인 생필품을 잔뜩 팔았다. 계절이 바뀌거나 의미 있는 공휴일이 다가올 때면 시즌 한정 상품을 진열해 놓기도 했다. 시아는 계절용 한정상품을 조금 구경하다가 우산이 진열된 곳으로 다가갔다. 아침에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아서 우산이 없었다. 집에 가려면 하나 장만해 두어야 했기에 가격이 적당하면서도 무늬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랐다. 그녀는 단색의 겉면에 작은 꽃 여러 개가 그려진 우산을 집어 들고 잡화점을 나섰다.


밤공기에는 비와 도시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찰박거리는 물을 밟으며 귀에 이어폰을 꼈다. 선곡은 차 안에서 듣지 못했던 재즈였다. 빗소리 섞인 재즈를 들으며 거리를 걸으니 무척 운치 있었다. 영화 주제가도 몇 섞여 있어 관련 노래가 나올 때면 머릿속에서 영상이 그대로 재연되는 통에 짧은 시간에 영화 몇 편을 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늦은 저녁의 거리를 구성하는 건물은 다양했다. 고층 건물도 많았지만, 아담한 크기의 상가나 단독주택도 여럿이었다. 아무래도 역사가 오래된 장소라 그런 듯싶었다. 건물을 구경하며 걷는 일은 즐거웠다. 낮과는 달리, 사람이 적어서 혼잡한 느낌도 덜했다. 시아는 음악을 계속 들으며 앞으로 걸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그녀가 가고자 했던 장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곳은 백화점으로, 역사가 오래되었기에 개축을 몇 번 하긴 했지만 여전히 세련된 느낌을 주는 장소였다. 상아색 건물 가장자리로 푸른 잎사귀와 알록달록한 꽃이 눈에 띄었다. 시아는 그 모습을 보자마자 달렸다. 빗물이 치맛단에 튀고, 신발과 양말이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어도 아랑곳하지 않고서 나아갔다. 달리던 중, 신호가 걸렸다. 시아는 제자리에 선 채로도 발을 열심히 움직이며 시계를 보았다.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백화점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그녀는 시곗바늘이 느리게 움직이기를 바라며 신호가 바뀌자마자 또 달렸다.


급하게 달려서인지 숨이 마구 찼다. 그녀는 백화점 앞에 도착하고 나서도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겨우 숨을 다 골랐을 때는 광장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종소리는 먼저 아홉 번을 울렸다. 맑고 힘찬 소리였다. 그러나 열 번째가 되어서는 울리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모르게 흐지부지한 소리를 내며 멈추었다. 본래 그런 것인지 고장이 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별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며 백화점 왼편에 설치된 정원으로 들어갔다. 열 시, 이미 영업 시간을 넘겼기에 정원 내부로 들어가는 통로는 잠겨있었다.


시아는 아쉬운 마음에 근방에 설치된 돌의자에 걸터앉았다. 백화점 외관과 비슷한 상아색이었다. 굳게 닫힌 문 위에는 ‘영원의 정원’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었고, 문 너머로는 드문드문 아름다운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정원 개관 첫날에만 볼 수 있다는 신비한 꽃과 식물들이 여럿 있다고 했는데 이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본래대로라면 그녀는 퇴근하자마자 영원의 정원을 구경하러 백화점에 들를 생각이었다. 계획이 바뀐 것은 오롯이 남자 친구의 사정 때문이었다. 그는 주말에 급한 일이 생겨 데이트를 못 할 것 같으니, 오늘 저녁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다. 시아는 자신에게도 중요한 일정이 있다고 말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남자 친구가 회사가 끝나자마자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영원의 정원에 가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느냐 하면 전혀 아니었다. 의무감처럼 지속되는 만남, 적당한 식당, 일상적인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대화까지. 말이 데이트지 시아는 저녁을 먹는 내내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남자 친구가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람이 쐬고 싶다고 말하며 식당 밖으로 나가는 것을 권했다. 백화점 문을 닫기 전에 어떻게든 영원의 정원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이 이상한 길을 안내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고, 비가 오는 바람에 길은 더 막혔다. 우산을 쓰고 걸으면서도 어떻게든 열 시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진 않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지나버렸다.


시아는 얼마간 의자에 앉아있다가 일어서서 굳게 닫힌 문 앞으로 다가갔다. 회사 일 때문에 한동안 찾아오지 못하겠지만 기념으로 문이라도 구경하고 가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문 앞에 달린 팻말로 손을 뻗었다. 돋을새김한 글씨의 매끄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문 너머에서는 달콤하고 싱그러운 향기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발걸음을 돌렸다.


문을 지나 출구에 거의 다랐을 때였다. 고개를 살짝 돌린 그녀는 오른편에 샛길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녹색의 싱그러운 잔디 위에 잘 다듬은 돌로 만든 징검다리가 놓여있었다. 입구에 막 들어올 때는 문이 닫혔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려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징검다리는 진회색으로, 아주 반질반질했다. 아무도 그 위에 올라서거나 밟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오픈 첫날이라 방문객이 엄청나게 많았을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시아는 징검다리 위에 올라서 보았다. 순간, 어디서 불어온 것인지 모를 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머리칼이 날리며 꽃과 풀의 향기가 나는 것을 느꼈다. 싱그럽고 신비했다. 맡아본 적이 있는 듯하면서도 없는 냄새였다. 바람은 곧 지나갔다. 그녀는 발을 살짝 들어 앞에 놓인 징검다리를 밟았다. 폴짝 뛰어 한 칸씩 앞으로 이동했다. 이동할수록 징검다리는 조금씩 작아졌다. 굳게 닫힌 대문 근처에 다다랐을 때는 어느덧 두 발을 딛고 서 있을 정도로 크기가 작아져 있었다. 징검다리 건너기 놀이 같은 건 변두리에 살던 어린아이였을 적에나 하던 놀이였다. 그마저도 도심으로 이사를 온 이후로는 징검다리를 건널 기회 같은 것은 없었다. 그녀는 반가움에 아이처럼 들떴나보다 하며 끊긴 다리에서 내려와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또 다른 징검다리가 보인 것은 그녀가 막 몸을 돌리려 하던 순간이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두 발로 딛고 설 만한 다리가 있었다. 거리로 보면 정원의 철문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장소였다. 말도 안 되었다. 착시이거나 착각이 아니라면 존재할 수 없는 경로였다. 시아는 두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비빈 탓에 시야가 뿌예지긴 했지만, 다리는 여전히 그곳이 있었다. 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오른발을 들어 징검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다리는 견고했다. 그녀는 왼발 다리에 올려놓았다. 두 발을 딛고 서자, 또 다른 다리가 하나 나타났다.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는 계속 나타났기에 그녀는 꾸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다리를 따라갈수록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짧았던 잔디가 점점 길어지는 듯하더니, 발목까지 오는 들풀과 무릎을 훌쩍 넘는 억새밭이 나타났다. 억새의 색은 다양했다. 들풀 근처에 있는 것은 연녹색을 띠었고, 더 앞에 놓인 것은 분홍색이었다. 시선이 닿는 제일 끝에 있는 억새는 상아색이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보던 풍경 그대로였다. 싱그러우면서도 짙은 풀의 냄새가 났다. 징검다리는 점점 높아지는 들풀과 억새 사이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며 시아를 인도했다. 얼마나 반짝였던지, 하늘의 달빛을 그대로 반사할 것만 같았다. 시아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에는 둥그런 달이 떠 있었다. 달 주변은 옅은 남색이었다. 감수성 풍부한 화가가 그린 수채화와도 같은 풍경이었다. 바람이 옅게 불어왔다. 억새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물결쳤다. 파도가 치는 것도 같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조금 전에는 도심 한복판에 있었는데, 이런 장관을 마주할 수 있다니, 시아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너무 오랜만에 느껴봐서 이미 잊어버렸다고 생각하던 감정이었다.


그녀는 잠시 바람을 맞으며 억새와 들풀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계속해서 밝을 것만 같던 달이 어두워졌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구름 몇 점이 달을 지나가고 있었다. 구름마저 솜씨 좋은 재단사가 만든 베일과도 같았다. 언제까지고 넋 놓고 바라볼 수 있을 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서있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을 보니, 열 한시를 막 넘기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서 간단히 샤워하고 뒷정리만 해도 자정을 훌쩍 넘길 것이었다. 출근을 위해서는 얼른 돌아가야만 했다. 그녀는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싶은 풍경을 뒤로 하고 얼른 징검다리를 건너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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