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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24. 2024

12. 영원의 정원 (3)

백화점에 막 도착했을 때, 시계탑에서 종이 울렸다. 종은 지난밤과 마찬가지로 열 번을 울렸는데, 마지막에 가서는 소리가 약하게 들렸다. 시아는 종소리를 들으며 징검다리 위에 올라섰다. 그러고는 지난밤보다 빠른 속도로 앞쪽으로 이동했다.

지난밤의 기억은 꿈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다. 징검다리는 여전히 굳게 닫힌 영원의 정원 옆, 샛길 너머로 그녀를 인도했다. 그녀는 억새와 들풀을 구경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다. 억새밭 근처에 연못이나 개울가가 있는지 개구리 우는 소리도 들렸다. 어릴 적 시골에 놀러 갔을 때 들었던 소리와 같았다. 꾸밈없는 자연의 소리임에도 듣기 무척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가장 좋아하는 음악보다 더 듣기 좋게 느껴졌다. 맑고 신선한 공기 덕에 몸이 가벼워져 어린아이처럼 폴짝폴짝 뛰어 징검다리를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 시아는 전날과 달리, 시계를 보지 않고 계속 징검다리를 건넜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징검다리에도 끝은 있었다. 억새밭과 들풀을 지나고, 작은 관목숲을 지나니 각종 꽃이 만개한 장소에 다다랐다. 누군가가 공들여 가꾼 정원처럼 보였다. 징검다리는 그쯤에서 작아지다가 아예 사라졌다. 그곳이 목적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원 한편에는 울타리가 둘려있었고, 울타리 너머에는 작은 집이 하나 있었다. 돌과 목재를 사용해 지은 소박한 집이었다. 시아는 집 쪽으로 다가가 보았다. 은은하면서도 산뜻한 향기가 났다. 

집에 가까워지자, 발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누군가 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나, 울타리 바로 앞에 다다르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작업용 앞치마를 두른 남자가 마당에 심긴 묘목에 물을 주고 있었다. 몇 그루의 묘목 주변에는 잎이 무성한 관목이 있었고, 조금 더 뒤에는 사람 키보다 커다란 나무들이 몇 그루 있었다. 어떤 나무에는 잘 익은 열매가 매달려 있기도 했다. 나무들은 크기를 막론하고 모두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남자가 정성으로 돌보는 것이 분명했다. 그는 시아가 주변을 구경하는 새 물을 다 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랫동안 앉아 뻐근했는지, 허리를 뒤로 한번 쭉 펴고는 상반신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러다가 오른편으로 몸을 돌렸을 때, 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그와 눈이 마주친 바람에 시아는 당황했다. 남몰래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혹시 예의에 어긋나지는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그녀는 어색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걱정과는 달리, 남자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보았다. 그러더니 울타리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저, 근처를 지나가다가 예쁜 정원이랑 집이 있어서 들러봤어요.”

“그런가요? 그렇다면 마음껏 구경하고 가세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그럼요. 혼자 정원 가꾸는 일도 즐겁지만, 손님들이 오는 것은 제게도 반가운 일이거든요.”

남자는 시아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의 연한 갈색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어 살짝 반짝였다. 그는 무척 선량하고 소탈해 보였다. 그녀와 잠시 인사를 나눈 남자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다면서 정원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시아는 그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정원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야근이나 남자 친구와의 약속이 없는 날이면 백화점으로 향했다.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만 같은 신비로운 일은 항상 열 시 정각에 일어났기에, 되도록 시간은 맞추려 노력했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는지, 시계탑에서 열 시 정각에 종이 울리면 징검다리 너머의 들판과 잘 가꾸어진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반면, 열 시가 아닌 시간에 백화점에 도착하면 징검다리 너머의 장소로는 갈 수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시아는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힘들지 않으면 되도록 억새밭 너머의 정원까지 둘러보고 오려고 했다. 매번 간다고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보는 건 아니지만, 정원 곳곳에 심긴 꽃과 풀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재미가 있었다. 자유분방하게 심긴 것 같으면서도 꽃과 나무들은 주변의 들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들꽃의 색이 보라색이라면, 주변에는 진한 분홍색과 연한 분홍색의 꽃이 심겨있는 식이었다. 꽃잎의 개수나 형태도 서로 잘 어울렸다. 식물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섬세함이 없다면 이룰 수 없을 조화였다. 

시아는 정원의 주인을 점차 존경하게 되었다. 그는 언제나 꾸밈없는 모습으로 정원을 가꾸었고, 그녀가 찾아온 것을 발견하더라도 귀찮게 굴거나 억지로 다가오지 않았다. 언제나 자신이 할 일을 묵묵히 하다가 가벼운 인사를 건네는 정도였다. 시아는 그곳이 편했다. 마음껏 꽃과 식물을 보고 인위적이지 않은 향기를 맡는 것이 좋았다. 온종일 타인의 눈치를 보고 회사 사람들과 잔뜩 부대끼다가 그곳에 가면 압박과 스트레스가 모두 풀리고 치유 받는 느낌마저 들었다. 본래 영원의 정원을 구경하려다가 그곳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는데 어느덧 본래의 목적은 잊히고 말았다. 그녀는 열 시 이전에 백화점에 도착해도 영원의 정원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징검다리 너머의 장소에 언제 들어갈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여러 나라에서 들여온 화려한 품종이 가득한 ‘영원의 정원’보다 징검다리 너머의 소박한 정원에 ‘영원의 정원’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사회인에게는 좋아하는 것이 생겨도 회사가 언제나 우선이 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꽃이 만개하고 날씨가 따뜻해지는 완연한 봄에 접어들면서 야근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해외 수출과 신규 거래처와의 계약 등으로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을 한다고 했지만, 집에 도착할 쯤이면 열 시를 넘기는 날이 늘어났다. 주중에는 회사 일로 바빴고, 주말에 남자 친구와의 약속까지 챙기다 보면 징검다리 너머에 있는 영원의 정원에 도무지 갈 수 있는 짬이 나질 않았다. 시아는 마음이 황폐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누구보다도 고독하고 외로웠다.

꽃이 만개하던 시기도 거의 막바지에 이를 무렵이었다. 금요일에도 퇴근 시간까지 일에 치이던 시아는 잠시 짬이 나서 동료들과 함께 커피를 마셨다. 팀원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아, 어제 주식 매도하지 말걸.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뉴스를 보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하루 만에 그렇게 오를 줄 몰랐는데.”

“그래도 손해는 안 보고 매도했네. 나는 요즘 다 마이너스라서 피 말려 죽겠어. 새벽에 눈이 번쩍 떠진다니까? 아, 돈 많으면 그냥 부동산에 투자하는 건데. 시세차익 얻을 자신 없으면 그냥 세주고 돈 받으면서 살아도 되잖아. 주식은 너무 변동성이 커서 피곤해.”

“그래도 주임님은 비교적 안정성 높은 주식에 투자하시니까 곧 회복될 거예요. 전 가끔 제가 도박을 하는 건지 주식을 하는 건지 잘 모를 정도라니까요. 주말에는 밤새도록 휴대폰만 보고있어요.”

“나도 비슷해. 돈만 많으면 주식 신경 쓰느라 골머리 앓을 필요도 없고 집에서 뒹굴거릴 텐데. 어차피 회사 다닐 거 대학원은 왜 들어갔는지 몰라. 학자금 대출이랑 월세, 생활비까지 빠져나가 버리면 통장에 돈 모일 틈이 없다니까?”

한창 대화에 열중하던 직원 하나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답답한 듯 커피를 호록거리다가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 대리님, 대리님도 주식 하세요?”

“주식? 나는 안 하는데.”

“그래요? 그럼 혹시 부동산 투자하세요? 가상화폐에 투자하신다거나….”

“아니. 둘 다 안 해.”

“의외네요. 요즘 재테크 안 하는 사람 없다던데 대리님은 그런 쪽에 관심 없으신가 봐요? 돈 많이 벌면 좋잖아요. 회사 안 다녀도 되고, 만나기 싫은 사람 안 만나도 되고, 시간도 마음대로 쓰고 말이에요.”

“응, 그렇지.”

시아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본래 회사 동료들 간의 대화라는 게 주제가 한정되어 있는 법이었지만, 요즘 들어 더 단순해진 느낌이었다. 재테크가 유행인지 어딜 가나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 이야기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에 관한 이야기가 빠질 수는 없겠지만, 시작은 달라도 끝은 모두 돈에 관한 이야기로 귀결되는 통에 피로감을 느껴 아예 입을 다물게 되었다. 그날도 비슷한 상황이었는데, 한창 커피를 마시며 자료 검토에 집중하던 과장이 한마디 보탰다.

“시아 씨는 당연히 재테크 할 필요 없지. 예비 남편 집이 엄청난 부자인데.”

“네?”

예상 못 한 이야기에 당황한 시아는 커피를 손에서 떨어뜨릴 뻔했다. 과장은 고개를 들고 시아를 빤히 보며 말했다.

“내가 뭐 틀린 말 했나? 다들 아는 사실인데.”

“다들 아는 사실이요?”

“시아 씨, 얼마 안 있으면 만나는 사람이랑 결혼할 거잖아. 상무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던데?”

“상무님께서요?”

“그래, 결혼하면 남편 재산이 내 거지 뭐. 거기다가 상무님 조카며느리까지 되는 거잖아? 인생 폈네, 아주 폈어!”

“맞다, 저도 그 이야기 어디선가 들은 것 같아요.”

“저도요. 상무님이 시아 대리님을 예뻐해서 조카분을 소개해 주셨다면서요?”

과장이 시아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 팀원들도 하나둘 고개를 끄덕였다. 시아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그들은 자신들이 아는 정보로 그녀를 재단하고 판단했다. 모두 부자 남편을 만나서 좋겠다는 둥, 상무가 앞으로 신경을 써줄 테니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다는 둥, 부러워 죽겠다는 둥의 이야기만 했다. 대화의 주제는 그녀였으나, 그 누구도 본질을 보려 하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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