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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25. 2024

13. 영원의 정원 (4)

시아는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을 받았다. 속도 울렁거렸다. 손에 든 커피를 자꾸만 떨어뜨릴 것만 같이 무서웠다. 마음 같아서는 무례한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예의 없고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면 안 되었다. 모두를 잔뜩 실망하게 하고도 남을 것이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부모님과 친척, 학교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은 언제나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 시아는 참 착해. 이런 모범생이 따로 없지. 다른 사람도 잘 도와주고, 어려운 일을 맡아도 불평 하나 없이 잘 해내고, 누군가가 무례하게 행동해도 웃으면서 대처하잖아. 그러기 쉽지 않을 텐데 말이야. 우리 시아는 어딜 가나 사랑받고 예쁨받을 거야. 어쩜 이렇게 어른스러울까?”

시아는 그것이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모범생으로, 착한 아이로 있으면 어디서나 예쁨받고 칭찬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실제로도 그런 듯 보였다. 학교에서도, 회사에 입사하고 나서도 누군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착한 아이가, 친구가, 동료가, 사원이 되었다. 사람들은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난처한 상황에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그녀를 칭찬했다. 착한 아이니까, 좋은 친구니까, 모범적인 사원이니까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되었다. 그녀는 다시 미소 지었다. 당장이라도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러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들려오는 모든 이야기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자리에 앉았다. 

머리도 멍하고 속도 별로 좋지 않은데 당장 해야 할 일은 잔뜩이었다. 시아는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다. 백지 화면에 글자와 숫자가 둥둥 떠다녔다. 습관적으로 일 처리를 해나가긴 했지만, 글자와 숫자가 의미하는 바에 관해서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이 넘는 동안 그러다가 사람들이 퇴근하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겨우 마음이 가라앉았다. 금요일이라 대부분의 팀원이 약속이 있거나 집에 빨리 가고 싶어 했던 것이 다행이었다. 시아는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아홉 시가 다 될 무렵 사무실에서 나왔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한 장소만을 생각했다. 징검다리 너머에 있는 영원의 정원. 그곳에 꼭 가야 했다.

금요일이라 시간이 늦었는데도 차가 좀 막혔다. 그녀는 버스가 시계탑 광장 앞 정류장에 서자 재빠르게 달렸다. 구두 굽이 높아 발뒤꿈치가 아팠지만 참고 달렸다. 회사 일 때문에 높은 구두를 신고 이곳저곳 바삐 돌아다니느라 뒤꿈치가 자주 까졌지만, 굳은 살은 잘 생기지 않았다. 뼈와 닿는 피부 부분이 얇아서 그런 듯했다. 드물지 않게 겪는 고통이지만 피부가 까지면 언제나 아팠다. 같은 상처인데 왜 언제나 아픈 것일까? 그녀는 마음속에서 설움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잔뜩 훌쩍이며 백화점에 도착했다. 시간은 얼추 열 시였다. 그녀는 돌의자에 앉아있다가 종이 치자, 징검다리 위에 올라섰다. 여전히 열 번째 종소리는 희미하게 울렸고, 징검다리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눈물로 희미하게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영원의 정원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신선한 공기와 산뜻한 바람과 풀의 냄새, 밝은 달빛이 마음을 위로해 주었겠지만,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억새와 들풀 사이를 걸어도, 영원의 정원에 도착해서 예쁜 꽃을 잔뜩 봐도 마음이 나아지질 않았다. 그녀는 울타리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모든 상황이 갑갑하게만 느껴졌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것 같은데 모두 어긋나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괴롭고 고독했으나,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가족을 비롯한 누구도 그녀에게 속마음에는 관심이 없었다. 

한참을 훌쩍이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렸다. 정원 주인인 모양이었다. 시아는 우는 것을 들켜서 그에게 피해를 줄까 봐 억지로 눈물을 삼켰다. 하지만 훌쩍이는 소리마저 숨길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울타리 뒤에서 정원 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무슨 일 있어요?”

“어? 아, 아니에요.”

시아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목소리가 잔뜩 떨렸다. 남자가 다시 물었다.

“울었어요?”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시아는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남자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선량한 빛을 띠고 있었다. 어쩐지 모든 것을 털어놓아도 질책받지 않을 것 같았다.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놓고서 자신의 행동이 너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에 곧장 사과했다.

“미안해요, 바쁘실 텐데.” 

“아니, 그렇지 않아요. 일단 안으로 좀 들어오실래요? 따뜻한 차라도 마시면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안 그래도 언제 한 번쯤 차를 대접하려고 했는데 혼자 정원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고마워요.”

시아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앉아 있어서 그런지 다리가 저렸다. 달려오느라 까졌던 발뒤꿈치도 아팠다. 그녀가 다리를 절뚝이자, 남자는 말없이 부축해 주었다. 시아는 그의 섬세한 배려가 고마워 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둘은 울타리 너머의 집으로 향했다.

남자의 집은 소박했다. 다듬어지지 않은 벽면과 살짝 삐뚜름한 창문, 누가 봐도 직접 나무를 잘라 만든 듯한 테이블과 의자까지. 집안에서는 시골집에서 날 것만 같은 풀과 나무의 냄새가 났다. 시아가 테이블 앞으로 가서 앉자, 남자는 벽난로 쪽으로 가서 상자를 하나 들고 왔다. 그 안에는 각종 연고가 담겨있었다. 그는 연고 하나를 꺼내 시아에게 건넸다.

“이걸 발뒤꿈치에 바르면 아픈 게 덜할 거예요. 통증을 덜어주는 연고예요.”

“고맙습니다.”

시아는 연고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시원한 허브향 같은 것이 풍겼다. 그녀는 연고를 손으로 살짝 떠서 발뒤꿈치에 발랐다. 처음에는 쓰라릴 줄 알고 지레 겁을 먹었으나,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시원함이 퍼져 상처를 맴돌던 열감이 사라졌고, 통증도 줄어들었다. 그 덕에 기분도 좀 나아졌다.

남자는 그녀가 연고를 바르는 사이, 부엌으로 가서 차를 내왔다. 찻잔에는 그가 직접 만든 것으로 보이는 티백이 들어있었다. 티백 안에 든 것은 잘 말린 꽃과 허브였다. 찻물을 붓기 전에도 향이 무척 좋았는데, 물을 부으니 향이 더 진해졌다. 찻잔을 가득 채우는 색도 예뻤다. 처음에는 옅은 분홍빛이 새어 나오다가 허브의 연두색이 분홍색과 섞이자, 찻물은 금세 주황빛이 되었다. 시아가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자, 남자가 웃었다.

“향기가 좋죠?”

“네, 향도 좋고 색도 예뻐요.”

“정원에서 따서 말린 꽃이랑 허브로 만든 차예요. 맛도 마음에 들면 좋겠네요.”

“향이 좋아서 맛도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뜨거우니까 바로 마시지 마시고, 좀 식혔다가 드세요. 같이 내올 다과가 없는 게 좀 아쉽네요.”

“차만으로도 충분해요. 감사합니다.”

시아는 인사를 건네며 찻잔을 양손으로 감쌌다. 온기가 느껴졌다. 찻잔 위에서 흰색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녀는 얼마간 김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다가 차를 마셨다. 첫맛은 향긋하면서도 쌉쌀했는데, 끝맛은 약간 달짝지근했다.

“맛있네요.”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에요.”

남자는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차를 마셨다. 그는 차를 마시면서 자연스레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윌’이었다. 홀로 그곳에 살고 있고, 정원을 가꾸는 일이 취미이자 생업이었다. 자급자족하며 살아갔고, 살아가는데 쓸모없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애쓰지 않았다. 정원을 가꾸다가 마음이 내키면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자연의 경관을 감상했고, 때로는 숲과 개울가를 탐험하기도 했다. 그러다 물속에서 예쁜 돌이라도 발견하면 주워서 벽난로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개울가에서 발견한 돌들을 여럿 가져와 시아에게 보여주었다. 그중 어떤 것은 단면이 갈라져 있었는데, 안쪽이 연보랏빛 결정들로 가득했다. 자수정 원석인 듯했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시아의 머릿속에 문득 어떤 철학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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