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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26. 2024

14. 영원의 정원 (5)

“윌 씨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삶을 살고 계시네요.”

“그런가요? 소로라면 저도 좋아하는 철학자예요. 실제로 그분의 삶을 동경해서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정말요? 소로를 좋아하세요?”

“그럼요. 그분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예요. 사실 저는 이렇게 살기 전,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만 같은 삶을 살고 있었어요.”

“맞지 않는 옷과 같은 삶이요?”

“네. 억지로 좋아하지 않는 과목을 전공하고 전망 좋다는 직업에 종사했죠. 월급을 많이 받긴 했지만, 기계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하고, 다음날 또 같은 하루가 반복되었죠.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이라곤 없었습니다.”

“정말요? 저랑 비슷한 삶을 사셨었네요.”

시아는 그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의 하루도 윌 씨의 과거랑 비슷해요.”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기는 했어요. 여기 올 때마다 지친 표정이었거든요. 제가 옛날에 짓던 표정이랑 비슷해요.”

“그렇군요.”

“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힘든 일이 있었나 봐요. 울고 있었던 걸 보면 말이에요.”

“아, 그거요? 조금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어서요.”

“뭔지 물어봐도 되나요?”

평소의 시아 같았다면 누군가에게 짐을 지운다는 부담감 때문에 진심을 털어놓지 못했겠지만, 그날만큼은 달랐다. 윌에게는 어째서인지 마음을 털어놓아도 될 것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털어놓기로 했다. 어쩌면 그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았었고, 지금은 그 삶에서 벗어났으며, 소로를 좋아하기 때문일는지도 몰랐다.

“네. 사실은 요즘 들어 자꾸 모든 게 잘못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열심히 일한다고는 하는데 그것이 내가 원하는 일인지도 모르겠고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나 다른 사람들 일도 돕고 있는데 힘에 부쳐요. 더 힘들고 속상한 건, 사람들이 날 제멋대로 평가한다는 거예요. 다들 제가 선택하지도 미래가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 자리에서 뛰쳐나와 버리고 싶었어요. 속이 너무 울렁거렸거든요.”

“그 정도라면 뛰쳐 나오지 왜 가만히 있었어요?”

“왜 가만히 있었냐고요?”

시아는 바로 말을 잇지 못하고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이야기를 시작하고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터라 차는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만큼 줄어든 찻물은 진해졌고, 티백에서 솔솔 풍겨오는 향기 또한 그러했다.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감정이 떠올랐지만,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이었다. 그녀는 잠시 마음이 구름처럼 떠다니게 놔두다가 응축된 두 개의 단어를 골라냈다.

“저는 언제나 ‘착한 아이’가 되고 싶었어요. 착한 아이는 모든 일을 기쁘게 도맡아 하죠. 누가 뭐라고 하든 웃고, 불평하거나 투덜거리는 일도 없어요. 당연히 언제나 칭찬받고 사랑받죠. 저는 그렇게 완벽한 아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무례한 말을 들어도 성격 나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반박도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지만 말이에요.”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누군들 완벽한 사람이 되지 않고 싶지 않을까요? 그것이 꼭 ‘착한 아이’라는 단어로 규정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이상을 지니고 있을 거예요. 마음 같아서는 다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좌절할 거고요. 어떤 면에서 보면 시아 씨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니까요. 하지만 너무 애쓸 필요는 없어요. 마음이 다 상해버려서 속을 메스꺼울 정도라면 그건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이니까요.”

윌의 말을 들은 시아는 놀랐다. 이야기를 들어만 줘도 고맙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녀에게 나름대로 해답을 주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름을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그렇게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니 고마웠다.

“고마워요. 그런 대답을 들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아니에요. 해답이라기에는 너무 부족한 대답이죠. 시아 씨 마음이 넓은 거예요.”

시아는 겸손한 윌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친김에 그에게 그동안 정말 많이 힘들었노라고, 가족이나 친구, 연인에게도 마음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마음속에 굳건히 존재하는 착한 아이의 자아가 그녀의 본능적인 감정을 제어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더 있으면 윌에게 정말 피해만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남은 차는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전에 인사를 건네고 얼른 바깥으로 나왔다. 그대로 떠나려 하는데 윌이 상자 하나를 건넸다. 시아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연고와 몇 봉의 티백이 담겨있었다. 티백 안에 든 말린 꽃과 풀은 아까 마시던 차와는 다른 색이었다.

“오늘 정말 고맙습니다. 드리는 건 없고 받아 가는 것만 많네요.”

“서투른 솜씨로 만든 것들인데 좋아해 주시니 도리어 감사하죠. 조심해서 가세요.”

윌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시아도 손을 들어 인사에 화답하고는 정원을 나섰다. 정원을 나서니 다시 징검다리가 이어졌고, 오래 지나지 않아억새와 들풀이 가득한 들판이 펼쳐졌다.

시아는 천천히 걸으면서 바쁘게 사느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았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지만, 그녀는 본래 철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철학책을 가장 즐겨 읽었고, 친구들과 모여서 노는 것보다는 혼자 어떤 주제에 관해 사색하는 일을 좋아했다. 입시에 한창 시달릴 때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저서를 읽으며 유유자적하는 삶을 꿈꾸었다. 어른들은 누구나 좋은 대학에 가고 유망한 학과를 나오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 성공한 삶이라고들 했지만, 그런 것들을 누리기보다는 소소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꽃과 풀과 달을 보며 개구리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를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바랐던 것과 완전히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원인을 따지자면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누군가를 탓해야 할까? 착한 아이나 모범생이 되라고 했던 어른들의 잘못이었을까? 그런다고 무언가가 달라지나? 아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책임이 그들에게만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바꾸고 싶지만, 어쩐지 돌아가기에는 너무나 먼 길을 온 느낌이었다. 나이와 경력, 직업, 살아온 시간 모두가 견고한 틀이 되어 자신을 가두는 것만 같았다.

감상적인 생각은 마지막 징검다리와 함께 끝이 났다. 징검다리에서 내려오자 다시 현실이었다. 휴대폰으로 확인한 시간은 열 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시아는 가방을 뒤졌다. 처음에는 손에 잡히지 않았으나, 윌이 건넨 상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녀는 얼른 상자를 열고 티백에서 나는 은은한 향을 맡았다. 그와 보낸 시간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슬픔이 몰려왔다. 쉽사리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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