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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28. 2024

15. 영원의 정원 (6)

평소 같으면 주말에도 자기 개발을 하거나 업무 관련 서적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겠지만, 시아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흥미 위주의 소설조차 읽을 힘이 없을 정도였다. 입맛도 뚝 떨어져서 음식을 먹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끼니를 대충 때우고, 윌이 준 차를 꺼내 찻잔에 담갔다. 은은한 꽃향기가 온 방에 퍼졌다. 그 덕에 기분이 좀 나아지는가 싶으면서도 윌을 떠올리면 슬퍼졌다. 왜 그런지 모를 일이었다. 결국, 그녀는 주말 내내 입맛도 기운도 되찾지 못하고 새로운 한 주를 맞았다.

그녀의 컨디션과 관계없이 새로운 주에도 분주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일이 잔뜩 쌓여 쉽사리 끝나지 않았기에, 수정할 자료가 생기지만 않아도 감사할 지경이었다. 열 시를 넘어서까지 야근하고 집에 돌아와 잠깐 눈을 붙이면 또 출근할 시간이 되었다. 토요일에는 평소보다 더 일찍 출근해서 일에 치였다. 오전을 정신없이 보내고 또 자료에 파묻혀있다가 다섯 시가 되어서야 겨우 모든 일을 마무리지었따. 시아는 너무 피곤해서 한숨 자고 싶은 마음에 얼른 사무실을 나와 버스에 올라 탔다.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쉬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는 화면에 뜬 메시지를 읽었다.

메시지는 남자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오후에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시아는 그를 만날 기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단호하게 거절하기에는 신경이 쓰여 에둘러 마음을 표현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일이 너무 바빴고 제대로 쉬지 못해 힘드니 오늘 말고 내일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낸 다음, 휴대폰을 껐다. 그만하면 이해하지 않을까 했는데, 금세 답장이 왔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기분으로 다시 메시지를 읽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 중요한 이야기니까 도착하면 바로 나와.

메시지를 읽은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화가 났다. 지독하게 화가 나는데 그동안 화를 표출하지 못하고 참고만 살아왔던 터라 어떻게 화를 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더 화가 났다. 한숨이 나왔다. 거절도 못하고 화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한심해서 그러는 것인지, 너무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 어쩌면 둘 다일지. 시아는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버스에서 내렸다.

그녀는 메시지에 적힌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은 시계탑 근처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신축 건물 2층에 자리 잡은 곳이라 분위기는 쾌적하고 조용했다. 시아는 출입문 앞에 세워진 메뉴판을 보았다. 갑각류를 비롯한 해산물 요리가 주메뉴인 듯했다. 그녀는 메뉴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일전에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고 분명히 말했었는데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더욱더 화가 나는 것을 참으며 레스토랑 안에 들어서니, 홀 중앙에 놓인 테이블에 앉은 남자 친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시아는 그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평소라면 기분이 좋지 않아도 굳이 드러내거나 직설적으로 묻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입에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중요한 이야기가 뭐길래 이렇게 급히 보자고 한 거야?”

“도착하자마자 뭐 그리 급해? 평소답지 않게. 일단 주문부터 해,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자.”

“나 갑각류 알레르기 있다고 말했었는데.”

“아, 그랬나? 그럼, 갑각류 안 들어간 걸 시키면 되지. 조개나 생선 들어간 거 시켜. 여기 게랑 새우요리가 맛있는데 아쉽게 됐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웨이터를 불러 대게 요리와 구운 새우를 시켰다. 시아는 연어가 들어간 샐러드와 구운 빵을 시키고 말았다. 식사라기보다는 전채요리에 불과했지만 뭔가 본격적으로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중요한 이야기가 뭐든 얼른 들어버리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자 친구는 정말 음식이 나올 때까지 본론을 꺼내지 않았다. 준비에 손이 덜 가는 시아의 메뉴가 먼저 나왔을 때도 별말 않다가 자신이 주문한 요리가 나오자 맛보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고, 오늘 보자고 한 이유는 우리의 미래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야.”

“미래?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슬슬 결혼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만난 지 벌써 몇 개월이나 됐으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좀 이르지 않아? 몇 개월 가지고 서로를 알 수는 없는 거잖아.”

“이르긴 뭐가 일러? 이 정도면 결혼 이야기를 할 때도 됐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서른 넘으면 아예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경우도 많아. 이제와서 말하지만 나도 연애만 하려고 너 만난 거 아냐. 삼촌이 회사에 정말 괜찮은 직원이 있대서 결혼하기에 나쁘지 않겠다 싶어 만나보겠다고 한 거고. 실제로 만나보니 너 정도면 결혼해도 괜찮을 것 같았어. 외모도 괜찮고, 성격도 얌전하고, 어른들도 잘 모시고. 역시, 삼촌이 보는 눈은 있으신 것 같아. 물론, 사회생활 오래 하면서 사람을 많이 만나 보셔서 그런 거겠지만.”

남자 친구의 말을 듣고 시아는 가만히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는 오롯이 자기중심적이었다. 나이, 만나게 된 계기,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까지. 시아는 그 앞에서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그만하면 나쁘지 않은, 쓸만한 제품이 되어 평가받는 기분이 들었다. 설상가상으로 피곤해서 멍하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이후로 그가 늘어놓는 말을 하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이국적인 향신료 냄새가 섞인 레스토랑의 공기도 거북했다. 분위기를 내려고 그런 건지 인테리어가 그런 것인지 모르겠으나, 테이블 위에 놓인 초에서 나오는 열기마저 불쾌할 지경이었다.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 친구는 한참을 더 이야기했다. 그녀가 입을 열지 않는 한, 말을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대로 눈앞의 초가 꺼지며 레스토랑의 모든 불이 꺼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했다. 다분히 도피적인 상상이었다. 손을 하나도 대지 못한 샐러드와 빵이 눈에 들어오자, 속이 울렁거렸다. 더는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처음에는 ‘미안’이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그 단어를 꺼내지는 않았다. 남자 친구에게 미안할 이유는 없었다. 쉬고 싶은데 불러낸 것도, 일방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도 다 그였다. 그녀는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기, 나 그만 가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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