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로프 Sep 30. 2024

16. 영원의 정원 (7)

“뭐?”

혼자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던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시아는 곧바로 쏘아붙였다.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 잘 맞지 않는 것 같아.”

말을 마친 그녀는 의자를 살짝 집어넣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남자 친구가 뭐라 하며 뒤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빠르게 달려 레스토랑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시계탑 광장 주변은 번화가라 사람이 많았다. 주말 저녁이라 골목 골목마다 불이 켜진 채였고, 낮에는 문을 열지 않았던 가게도 다 문을 열어 시끌벅적했다. 시아는 레스토랑에서 나오자마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손님이 제법 많은 음식점이 몇 개 있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기는 제격이었다. 시아는 사람들을 여럿 지나쳐 골목 안쪽으로 향했다. 몇 번쯤 길이 갈라졌다. 그때마다 더 깊숙해 보이는 방향을 택했다. 모르는 길이었지만 일단은 자리를 피하는 게 중요했다. 길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점점 적어졌지만, 마음은 편했다. 그때 막 전화가 울렸다. 그녀는 깜짝 놀라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혹시 전 남자 친구일까 싶었지만, 아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그냥 요즘 잘 지내나 해서 전화했지.”

“뭐, 그렇지.”

“별일은 없고?”

“그다지. 별일 없으면 조금 있다가 통화해도 될까?”

“왜, 지금은 일 끝난 거 아니야?”

“일은 끝났지. 오늘도 다섯 시까지 회사에 있었어.”

“그래? 요즘 일이 많은가 보네. 월급 많이 주는 만큼 일을 시키기는 하는구나. 어쩔 수 없지, 뭐. 받는 만큼 일해야지.”

“응.”

말로는 수긍하는 척했지만, 시아는 기분이 나빴다. 저도 모르게 미간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전화를 끊기 위해 대충 둘러댈 말을 궁리하던 참이었다. 어머니가 다시 말했다.

“그래, 그건 그렇고 요즘 남자 친구랑은 어떠니? 별말 없어?”

“별말이라니, 뭘?”

“아니, 만난 지도 몇 달 됐는데 슬슬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해서.”

“그러니까,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오늘따라 말투가 왜 이렇게 날카로워? 사춘기 애들처럼 반항하는 것도 아니고, 서른이나 먹은 애가 대체 왜 이래?”

“지금 말투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말하고 싶은 게 뭐냐니까?”

“뭐긴 뭐겠어, 결혼 이야기 안 나오나 해서 전화했다, 그래. 너도 벌써 서른인데 만나는 사람이랑 결혼해서 가정 꾸려야지. 네 남자 친구,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회사도 좋은 데 다니고 집안도 괜찮은데 결혼 이야기 나오면 얼른 날짜 잡아. 그만한 사람 없다.”

“뭐?”

시아는 기가 막혔다. 대뜸 전화해서 결혼 이야기라니, 어쩜 이럴까 싶었다. 그녀는 홧김에 전화기를 내던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화를 억누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고 꾹꾹 눌러 담아 말에 담았다.

“그게 하고 싶은 말이었어?”

“당연하지. 자나 깨나 결혼 이야기가 언제 나오나 목 빠지게 기다렸다, 얘. 네 아빠도 그래. 좋은 대학 나오고 대기업 들어갔으니까 이제 결혼만 잘 하면 완벽한데 마침, 좋은 짝이 있으니 얼른 날짜 잡으라고 말씀하셨어.”

“날짜 잡고 결혼하면 또 애는 언제 낳고, 그 애가 자라면 명문 고등학교 보내고 대학 잘 보내서 졸업시키고, 졸업하면 회사는 어디 가냐고 물을 거고, 그 애 결혼 언제 시킬 거냐고 물어 볼 거지?”

시아는 어머니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남들 다 그렇게 사니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나오고 집안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서 손주 보는 게 평균적인 삶이니까. 그 삶에서 벗어나면 비정상이고 이상한 거니까, 그렇지?”

“아니, 얘가 왜 이래? 오늘 뭐 잘못 먹었니?”

“그동안 잘해 왔으니까, 모범생이었고 착한 딸이었고, 반항 한번 한 적 없고, 시키는 대로 했고 원하는 대로 컸으니까. 나는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시아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전화 너머에서 뭐라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자리에 서서 흐느꼈다.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손등으로 흐르는 눈물을 아무렇게나 닦으며 달렸다. 그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곳에 있으면 여전히 정체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달리고 또 달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달리던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남색으로 물든 하늘 위에 밝은 달이 떠 있었다. 눈물 때문에 달이 희뿌옇게 퍼져 보였다. 달을 보니 생각났다. 바람에 따라 물결치는 억새와 향긋한 들꽃, 그 너머의 잘 정돈된 영원의 정원과 자연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윌. 징검다리 너머의 장소. 직접 밟아보았지만, 현실 같지 않고 꿈만 같던 공간.

윌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마음이 쿡쿡 쑤셨다. 특히, 그의 선량한 눈동자가 떠오를 때면 온 마음이 아렸다. 그는 그녀와 비슷한 삶을 살았고 그녀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상처 난 뒤꿈치에 바를 약을 주고, 이전에는 접점이 아예 없던 타인임에도 그녀의 고민에 답을 주려 했다. 그는 그처럼 되고 싶었다. 그와 같은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그는 상상 속에서만 만나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징검다리 너머의 그곳은 신비한 장소였다. 지금은 갈 수 있지만 언젠가 갑자기 갈 수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영원의 정원도 윌도 하루아침에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어버릴 수 있었다. 그곳은 현실이지만, 현실이 아닌 장소니까.

결국, 깨버리는 꿈은 너무도 잔인했다. 꿈같은 그곳에는 아름답고 다정한 것들이 가득한데 현실에는 온통 그녀의 삶을 멋대로 규정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착한 딸, 모범생, 우수 사원, 이사의 조카와 결혼할 직원, 외모 괜찮고 얌전한 여자. 그들이 붙여준 수식어 같은 건 하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삶을 함부로 규정하지 마. 당신들 멋대로 내 미래를 그리고 날 끼워 맞추지 마. 사실, 시아는 그들 모두에게 마음껏 소리치고 싶었다. 자신을 잘 아는 척 하지만 하나도 모르던 그들에게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한참을 달리던 시아는 주변이 컴컴해진 것을 느꼈다.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가로등 불빛마저 희미했다. 불빛이 켜진 곳이라고는 몇 걸음 앞에 있는 가게뿐이었다. 그녀는 가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너머에는 아기자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귀여운 도자기 인형, 맛있어 보이는 초콜릿, 진열장을 가득 채운 선물 세트와 계산대 옆에 놓인 축하 카드 매대까지. 초콜릿 가게인 모양이었다. 인테리어는 꽤 그럴듯했는데, 손님은 없었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달콤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멈춰 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곳은 가고 싶은 장소가 아니었다. 가고 싶은 장소는 영원의 정원, 오롯이 그곳뿐이었다.

시아는 다시 달렸다.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가면 분명, 빠져나갈 길이 있을 것이었다. 골목 바깥으로 나가 건물들을 지나쳐 백화점으로 갈 길을 찾아야 했다. 열심히 달리는 그녀 뒤로 시계탑의 종소리가 들려왔다. 종은 정확히 아홉 번 울렸다.

그래, 한 시간이야. 한 시간만 지나면 열 시야. 조금만 더 뛰면, 앞으로 나아가면.

시아는 영원의 정원을 향해 계속 달렸다.      

이전 15화 15. 영원의 정원 (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