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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Oct 02. 2024

17. 토요일 오후 (1)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제피로스가 연두색 액체가 담긴 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책상에는 그가 맨 처음 집어 들었던 보라색 액체가 든 병과 다음으로 집었던 푸른색 병, 이제 막 내려놓은 연두색 병이 차례대로 놓여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시에나의 표정은 살짝 어두워져 있었다. 쉽사리 볼 법한 표정은 아니었기에 이온은 제피로스가 가져온 이야기가 꽤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에나는 이야기가 담긴 병을 인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제피로스가 말했다.

“그래 뭐, 이야기 모으는 게 내 일이니까 병을 인계하는 건 어렵지 않아. 그런데 수고비는 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뭘 원하는데?”

“라즈베리 봉봉.”

“지금 당장 만들기는 어려워.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에 오면 줄게.”

“약속한 거야? 미리 일러두지만, 난 새콤한 맛이 강한 게 좋아.”

제피로스는 검지를 들며 먹고 싶은 초콜릿을 한 번 더 강조했다. 시에나는 별 대꾸하지 않고 고개만 한번 끄덕인 후, 인수한 병을 가지고 얼른 조리실로 들어갔다. 이온은 제피로스와 함께 굳게 닫힌 조리실 문을 바라보았다.

“중요한 일이 있으신가 봐요.”

“그런가 보네. 나도 이번 것들은 평범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말이야.”

“조리실에서 나오시면 무슨 일인지 여쭤봐야겠어요. 도와드릴 게 있으면 도와드리고요.”

“시에나는 참 든든하겠다. 너처럼 믿음직스러운 직원을 둬서.”

“아직 멀었어요.”

이온은 웃으며 대답한 후, 어느덧 문간에 선 제피로스를 배웅했다. 여유로워 보여도 제피로스는 이야기를 수집하느라 바쁜 몸이었기에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는 가게를 나서는 순간까지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즈베리 봉봉을 기대한다고 이야기하며 떠났다.

“참 한결같은 분이야. 새콤한 맛이 나는 초콜릿이 저렇게나 좋은 걸까?”

이온은 혼잣말을 하며 근처에 있던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켜고 지도 앱을 실행했다. 지도가 켜지자, 그녀는 시계탑 광장의 주소를 검색하고, 주변의 골목들을 살펴보았다. 제피로스가 수집한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이 길을 잃은 장소였다. 지도를 확대해 가며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사람이 길을 잃을 만한 장소는 없었다. 아무리 좁고, 구불구불해 보이는 길도 건물이 끝나는 곳에서는 끝났다. 게다가 이야기 속 인물들은 시계탑의 이상을 감지함과 동시에 시간의 뒤틀림을 경험했다.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갔고, 현실과 동떨어진 다른 시공간을 발견하기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궁금했지만, 이온은 시에나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물론,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알 수는 없었다. 때에 따라서는 영업을 며칠 쉬어야 할 수도 있었다. 영업보다 문제 해결이 중요한 때도 있으니까. 그녀는 가만히 조리실 문을 바라보다가 가게 조명을 하나둘씩 껐다. 조명이 다 꺼지고 조리실과 계산대를 비추는 조명만 남을 때까지 시에나는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온은 아무래도 오래 걸리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정리했다. 정리를 마친 그녀는 진열장을 가로질러 위층과 이어진 문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블라인드를 내린 창밖으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녀는 달빛을 바라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영업을 쉴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다음 날 아침 시에나는 평소와 같은 시간에 조리실에서 나왔다. 그날, 그가 만든 초콜릿에는 새콤한 과일 가나슈가 들어있었다. 이름에도 모두‘베리’가 들어갔다.

“오늘은 새콤한 초콜릿이 주류네요?”

“제피로스 녀석이 라즈베리 봉봉 타령을 하니까 배아프라고 만들어봤어. 안 오는 날에 많이 만들어서 팔아야지.”

“좀 심술궂으신 것 같은데요?”

이온이 솔직하게 말하자 시에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사실은 신경 쓸 거리가 많다 보니 괜찮은 아이디어가 없어서 그랬어.”

“늦은 시간까지 쉬지도 못하시고 이야기를 살펴보셨으니까 그렇죠. 피곤하진 않으세요?”

“어쩔 수 없지.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으니까. 오늘 영업은 부탁할게.”

시에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다시 조리실로 들어갔다. 이온은 재빠르게 진열장에 초콜릿을 채워놓고 가게 문을 열었다. 시에나가 도와주지는 못했지만, 영업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동선도 정하고 주문받은 메뉴를 적절한 시간 안에 만들 수 있게 고려하며 일을 척척 처리해 나갔다.

하루는 바쁘게 지나갔고, 다음 날도, 또 다음날도 그러했다. 시에나는 매번 아이디어가 부족해서 막 떠오르는 초콜릿을 만들었다며 아쉬워했지만, 초콜릿은 매일 매진 행렬이었다. 목요일이 되자, 시에나는 초콜릿이 매진되는 순간 가게 문을 닫고 출장을 나갔다. 꽤 늦은 시간에 돌아온 그는 다음 날도 임시 휴업을 선언하고 조리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토요일에는 가게 문을 열긴 했지만, 오전 내내 조리실에서 나오지 않다가 오후에 볼일이 있다며 홀로 출장을 나가서 하늘이 붉어질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토요일은 주말이라 평일보다 손님이 더 많았다. 당연히 초콜릿이 사라지는 속도도 빨랐다. 세 시쯤이 되자, 진열장 안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기성품으로 만들어 놓은 초콜릿 제품도 많이 나가서 날 잡아 여분을 만들어 놓아야 할 정도였다. 이온은 드문드문 비어버린 매대가 휑하게 보이지 않도록 정리했다.

그녀가 진열장 아래쪽 매대를 정리하고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출입문 너머에 검은 세단 하나가 멈춰 섰다. 번쩍이는 외관이나, 정교하게 만든 엠블럼 등, 자동차에 관해 잘 모르는 그녀가 보기에도 무척 비싸 보이는 차였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린 사람도 예사롭지는 않아 보였다. 검은색에 가까운 무채색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가게로 다가오더니 문을 열었다. 그는 이온을 보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시에나 씨라는 분이 가게에 계십니까? 계신다면 만나러 온 사람이 있다고 전해주시겠어요?”

“사장님이요? 출장 가셔서 지금은 안 계시는 데요.”

“그렇다면 언제쯤 만나 뵐 수 있죠?”

“정확히 언제 돌아온다는 말씀이 없으셔서요.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기다리시겠어요?”

“일단은 그러죠.”

남자는 손목에 찬 고급 시계를 바라보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이온은 그에게 메뉴판을 건네며 물었다.

“혹시 원하시는 메뉴 있으세요? 어쩌면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으니까 뭐라도 드시고 있는 것이 나을 지도 몰라요.”

“괜찮습니다. 단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물 한 잔이면 충분합니다.”

“그거라면 어려운 일도 아니죠. 얼른 가져다 드릴게요.”

이온은 유리컵에 정수기 물을 받아 남자에게 가져다주었다. 물을 받아 든 그는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한 모금 마셨다. 그런 다음, 명함을 꺼내 이온에게 건넸다. 처음에 별다른 생각 없이 명함을 본 이온은 그곳에 적힌 이름과 직함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케이 크로노스, 크로노스 그룹 대표 이사?”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명함과 남자를 번갈아 보았다. 크로노스 그룹은 시계 분야에서 내로라하는 대기업이었다. 평범한 아날로그 시계 생산은 물론이요, 고가의 명품 시계 제작과 판매, 각 지역의 랜드마크라 불리는 시계탑 건립 공사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이온도 어린 시절 시계 읽는 법을 배울 때 크로노스 사의 로고가 새겨진 시계로 공부했던 기억이 있었다. 시계를 읽을 줄 알게 된 후로 학교나 친구 집에 놀러 가서 시계의 로고를 살펴볼 때면 크로노스 사의 제품이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했었다.

크로노스 사의 시계는 저가의 제품이라도 디자인이 멋스러울 뿐아니라 시간이 정확하고 쉽게 고장 나지도 않았다. 전자시계와 휴대폰이 발전하며 아날로그 시계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하더라도 크로노스사 제품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명품 시계의 인기가 폭발적으로 높아지는 바람에 품귀현상이 일어날 정도였다. 이온은 크로노스 그룹에 관해 떠올리다가 케이를 보며 말했다.

“제가 엄청난 분을 몰라뵀네요. TV를 잘 보지 않기도 하고 미디어에는 얼굴을 잘 비추지 않으셔서 누군지 몰랐어요.”

“괜찮습니다. 제가 연예인이나 배우도 아니고, 누군가 몰라본다고 해서 서운하거나 하지는 않아요. 다만….”

케이는 말을 더 하려다 말고 이온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온은 그의 시선에 담긴 마음을 곧장 알아차렸다. 그는 이온에게 말을 털어놓아도 될지 아닐지 고민하고 있었다. 가게를 찾는 수많은 손님을 대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달한 감각이었다. 그녀는 명함을 셔츠 앞주머니에 집어넣으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게 털어놓기에 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있으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케이는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걱정거리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럴 때 사람을 몰아붙이면 반감만 느낄 터였다. 이온은 친구나 지인을 대하듯 편안한 어조로 물었다.

“걱정이 있으신가 보네요?”

“걱정이 있다고 하면 해결책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날카로운 어조였다. 표정 또한 퉁명스럽게 변했다. 이온은 그가 꽤 신경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가게를 운영하며 다양한 손님을 만나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로 대답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해결책 비슷한 것을 드릴 수도 있죠.”

“경우에 따라서요?”

“네, 고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아는 선에서 대답해 드릴게요. 이래 봬도 사장님과 함께 일하면서 보고 들은 게 많거든요.”

“당신은 시에나 씨가 아끼는 직원인가 보죠?”

“아뇨, 애초에 직원은 저 하나예요. 사장님이 다른 직원은 별로 들이고 싶지 않다고 하셨거든요.”

“그래요?”

그 말을 들은 케이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그는 컵을 들어 물을 몇 모금 더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시에나 씨가 시계탑의 고장 원인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시계탑 광장’에 있는 시계탑 말씀이죠?”

“알고 계시네요, 맞습니다. 광장의 시계탑은 평소 정확하기로 유명했는데 요즘 들어 오작동이 잦았어요. 시곗바늘이 거꾸로 움직인다든가, 종이 열두 번 넘게 울린다든가, 특정 시간의 종소리가 약하게 울린다거나 하면서 말이에요.”

“저도 그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어요. 유서 깊은 건축물이라고 알고 있는데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고장날까 봐 걱정되시겠어요.”

“맞아요. 가문 내에서도 상징적인 의미가 큰 건축물이라 더 망가지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있죠. 문제는 그룹 회장님인 아버지께서 시계탑의 고장 원인을 반드시 찾아내라고 명령하신 거예요. 시계탑이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요. 무슨 마음이신지는 알겠지만, 사업보다 시계탑 수리를 더 강조하시는 터라 퇴근 후 매일 시계탑에 가서 설계도와 태엽을 하나하나 대조해 가며 살펴보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많은 태엽을 하나하나요?”

이온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케이는 갑자기 그 순간이 떠오르기라도 한 것인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두 번 다시 할 짓은 못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로 하니 문제 원인이 나오더군요.”

“원인이 뭐였는데요?”

“고장 원인은 시계탑 내부를 구성하는 작은 태엽 세 개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는 태엽이 사라질 만한 이유가 없다는 거였어요. 평소 시계탑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태엽이 쉽게 뜯어낼 만한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걸 가져다가 판다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죠. 사라진 이유를 모르니 태엽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감도 오지 않더군요. 일단 임시방편으로 태엽을 새로 만들어서 끼워두었는데 시에나 씨에게서 메일이 왔습니다.”

“혹시 태엽이 사라진 원인을 알고 있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나요?”

이온의 질문에 케이는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더니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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