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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7시간전

18. 토요일 오후 (2)

“시에나 씨가 당신에게 메일의 내용을 말해주었군요?”

“천만에요. 그냥 제 짐작이에요.”

“짐작?”

“그래요, 짐작.”

“시에나 씨가 직원을 허투루 들인 것은 아닌가 보네요.”

케이는 어느덧 흥미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이 꼭 면접관 같은 느낌이라 이온은 살짝 기분이 묘했다. 아무래도 대기업의 대표이다 보니 사람을 평가해야 할 상황이 많아서 그런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초콜릿 하우스에서 시에나 씨 말고 다른 사람의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케이처럼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태엽이 사라진 원인을 알고 싶으시죠?”

“그걸 당신도 알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요?”

“그럼 신속하게 알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임시로 만든 태엽이 돌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제대로 된 태엽을 끼워야 하는데 지금 상태로는 언제 시계가 멈춰버릴지 몰라 다들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최악의 경우, 시계가 멈추어 탑을 폐쇄하게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정말 큰 일이네요.”

“그러니까 뭔가 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이야기 해주세요. 사례를 원한다면 기꺼이 보답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사례라든가 하는 걸 바라지는 않아요. 말씀드리기에 조금 신경이 쓰이는 것이 있을 뿐이에요.”

“어떤 점이요?”

“일단 들어보고 나서 판단해 주세요. 시에나 씨를 직접 만나셨더라도 제가 하는 이야기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을 테니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마시구요.”

“알겠으니까 얼른 이야기해 주세요.”

이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 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였다.

“원소 주기율표를 아시죠?”

“그럼요. 원소 주기율표라면 지금도 외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원소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계시겠네요?”

“이론상으로는 그럴지도 모르지만, 자연 상태에 있는 원소는 거의 다 밝혀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원소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건가요? 시계태엽과 원소 사이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죠?”

“지금부터 할 이야기가 이론상으로 밝혀지지 않은 원소와 관련 있거든요.”

“뭐라고요?”

원소 이야기에 케이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믿기 힘든 모양이었지만, 이온은 태연했다.

“역시, 그러실 줄 알았어요. 그래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저항을 내려놓고 들어 보시겠어요? 어쩌면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에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으실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내가 너무 민감한 반응을 보였군요.”

케이의 태도가 누그러지자, 이온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시계태엽이 사라진 이유는 ‘미스륨’때문이에요.”

“미스륨? 그게 대체 뭐죠?”

“이름을 들으면 아시겠지만, 그건 원소예요. ‘MYTH’라는 단어에‘-RIUM’이라는 어미를 붙여 만든 이름이죠. 시에나 씨가 발견한 원소로, 이름도 직접 지으셨어요.”

“시에나 씨가 원소를 발견하셨다고요? 그분은 쇼콜라티에 아니신가요?”

“그건 맞지만, 젊을 때는 화학을 전공하셨어요. 꽤 촉망받는 인재셨는데 초콜릿의 매력에 빠져서 쇼콜라티에가 되셨죠. 시에나 씨의 초콜릿이 맛있는 이유도 화학을 전공하면서 터득한 황금 비율을 적용하시기 때문이에요. 뭐, 사장님 자랑은 여기까지 하고 미스륨에 관해서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이온은 시에나에 관해 더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제쳐두고 케이에게 미스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미스륨은 ‘MYTH’라는 단어에서 알 수 있듯, 신화적인 성격을 지닌 원소였다. 기원을 짐작해 보면 문명이 시작된 고대나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며, 인간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초현실적인 현상의 원인이 되곤 했다. 사람들이 미스륨을 쉽게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는 미스륨 때문에 일어난 과거의 일들을 신화나 전설로 치부했기 때문이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미스륨은 여전히 원소로서 존재하고 있으나, 그 때문에 일어난 일들은 낭설이나 도시 전설 정도로 여겨질 뿐이었다. 사람들은 초현실적인 현상과 과학은 상관관계가 없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양립할 수 없을 듯한 두 대상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가본 적 없는 길을 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시에나는 결국 미스륨의 특질을 규정해 냈다. 미스륨은 공기 중을 떠다니는 무색무취의 원소였는데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첫째로, 미스륨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부정적인 감정에 강하게 반응하며 동력을 얻었다. 두 번째로, 미스륨은 형체를 지닌 물질을 매개로 하여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으켰다. 셋째, 미스륨은 단맛이 나는 성분이 주변에 있으면 동력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설탕이나 기타 감미료에는 일시적인 영향만 받지만, 초콜릿이 주변에 있으면 정지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속도가 느려졌다.

미스륨은 그 자체로는 크게 위험한 원소가 아니었으나, 주변에 부정적인 감정의 정도가 큰 생명체가 있을수록, 결합할 매개물과의 상호작용이 활발할수록 위험도가 커졌다. 그러나 신화에 언제나 괴물이 등장하는 것만은 아니듯, 미스륨이 언제나 위험한 결과만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이긴 하나, 때에 따라서는 미스륨으로 인해 낭만적인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예요. 결론은, 시계탑의 태엽은 미스륨과 결합했기 때문에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고요.”

이온이 이야기가 마쳤음에도 케이는 말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수심 깊은 얼굴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간 그렇게 있던 케이는 혼잣말하듯 말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역시, 그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어요. 쉽게 믿어지지 않으시죠?”

“당연하죠. 아무리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아요.”

“그렇다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더 답답하시죠?”

“뭐, 많이 양보해서 당신 말이 맞는다고 칩시다. 미스륨인가 뭔가 하는 그 말도 안 되는 원소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거라고 말이에요. 그렇다면 해결 방법은 뭡니까? 대체 어디에 가서 태엽을 찾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군요. 태엽과 결합하여 허공을 떠다니는 미스륨을 잡기 위해 잠자리채라도 사야 하나요?”

순간, 이온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잠자리채를 들고 허공을 휘젓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케이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지금 내 말이 우스운가요?”

“아니, 그런 게 아니고….”

한번 터진 웃음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케이의 미간 주름은 더욱 깊어졌고, 표정은 어두워지기만 했다. 그는 참다못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웃은 건 죄송하지만 그냥 가시면 어떡해요?”

이온은 케이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가게 문이 열리며 시에나가 들어왔다. 그는 잔뜩 화가 난 케이와 그를 만류하려는 이온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혹시, ‘케이 크로노스’씨 이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안 그래도 드릴 말씀이 있었는데 잘됐네요. 오후쯤 시간이 되신다고 하셔서 잠깐 나갔다 온다는 게 늦었네요. 오래 기다리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왜 떠나시려는 거죠?”

시에나의 물음에 케이는 이온을 살짝 노려보았다.

“직원분이 미덥지 않아서요.”

“직원이요?”

시에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온은 시에나와 눈이 마주치자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장님, 저는 잘못한 거 없어요. 이분께 제가 아는 걸 최대한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드렸다고요. 이야기가 끝날 때쯤 좀 재밌는 이야기를 하셔서 웃음이 터지긴 했지만, 죄송하다고도 했는 걸요?”

이온의 항변에 시에나는 다시 케이를 바라보았다. 시에나와 대면하자 곧바로 가게를 나가려던 태세는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온도 케이의 표정에서 불만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기에 자리를 피하면 나아질까 싶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럼, 두 분 편하게 이야기 나누세요. 저는 영업도 끝났고 하니 이만 가볼게요.”

“아니, 괜찮아. 여기 있어도 돼, 이온. 그리고 케이 씨도 자리에 앉으시죠. 이온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보고 보충할 이야기가 있으면 덧붙이고 궁금한 것이 있으면 대답해 드리죠.”

시에나는 케이를 테이블로 안내했고, 케이는 자리에 앉았다. 이온도 두 사람 사이에 앉았다. 자연스레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온은 자신이 케이에게 들려주었던 내용을 간략히 말했고, 시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이야기를 먼저 했구나. 그럼 나는 조금 덧붙이는 것만 하면 되겠네.”

시에나는 차분한 어조로 빠진 내용을 보충하기 시작했다. 제피로스가 모아온 세 가지 이야기를 케이에게 들려주며 미스륨이 시계태엽과 결합하여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시간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버렸음을 알려주었다.

“인간의 부정적인 감정에서 동력을 얻은 미스륨이 불특정 다수의 물건과 결합하여 초현실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건 아닙니다. 미스륨은 동력의 원인이 된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칠 만한 물건과 결합하여 문제를 일으키곤 하죠. 이번에는 그게 시간이었기에 시계탑의 태엽이 사라져 버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태엽을 다시 찾을 방법은 있는 겁니까?”

의심의 눈초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듯했지만, 케이는 정중하게 물었다. 시에나의 태도에 화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이 틀림없었다. 시에나는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물론입니다. 방법이 없었다면 당신에게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메일을 보낸 건 크로노스 가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서였습니다.”

“우리 가문 사람의 도움이요?”

“네, 미스륨과 결합한 태엽을 수거할 수 있는 건 시계탑을 설계하고 기획한 크로노스 가문의 후계자뿐이기에 도움을 청한 것입니다. 마침 지역 신문에서 케이 크로노스 씨가 시계탑 보수 에 한창 열중하고 있다는 기사를 봐서 메일을 보내 보았습니다. 스팸 취급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각오도 하고 있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계탑은 우리 가문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도 애지중지 하시고요. 고칠 방법만 있다면야 당연히 발 벗고 나서야죠. 사실,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지금도 뭐가 뭔지 긴가민가하지만 말입니다.”

케이는 말을 마치면서 머리가 아픈지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이온은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감긴 눈꺼풀 밑이 살짝 거뭇했고 안색도 창백해 보였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계산대 뒤편의 찬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초콜릿 음료를 만들 때 쓰는 재료가 가득했다. 이온은 다크초콜릿 파우더 통을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여니, 진하면서도 고소한 초콜릿 냄새가 훅 풍겼다. 그녀는 컵에 초콜릿 분말을 넣고,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부은 다음, 잘 저어 케이에게 가져다주었다.

“좀 드셔보세요.”

“괜찮습니다. 아까 단 건 싫어한다고 말했으니까 왜 거절하는지는 아시겠지요.”

“달지 않으니까 한번 드셔보라고 하는 거예요. 사장님의 수제 초콜릿 분말로 만든 거라 맛은 보장해요. 드시면 머리 아픈 것도 나아지실 거예요.”

케이는 눈을 뜨고 물끄러미 이온을 올려다보다가 컵을 건네받았다. 처음에는 컵에서 김이 올라오는 모습만 보고 있더니 향이 나쁘지 않았는지 손잡이를 들고 입가에 가져갔다. 그는 음료를 딱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다크초콜릿이라 괜찮은 줄 알았는데 괜한 오지랖을 부린 걸까? 이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케이를 바라보았다. 걱정과는 달리, 두통 때문에 주름이 가 있던 그의 미간이 펴지는 모습이 보였다. 표정도 한결 나아졌다. 동시에 그가 다시 컵을 들고 입가에 가져갔다. 주변에 쌉싸름한 초콜릿 향이 퍼졌다.

“나쁘지 않네요. 정말 두통도 좀 나아지는 것 같고.”

“그렇죠?”

이온이 싱긋 웃으며 묻자, 케이는 오른쪽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니 고개를 슬쩍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노을도 어느덧 지고, 하늘의 색은 남색 섞인 주황빛으로 변해 있었다. 해 질 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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