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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Oct 09. 2024

20. 헤이즐넛 초콜릿 (1)

“설명을 부탁해도 될까요?”

케이는 아무렇지 않은 이온을 보며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온은 그에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초콜릿 지도 앱이 떠 있었다.

“여길 보시면 초콜릿 아이콘이 몇 개 보이죠? 이건 주변에서 활동하는 미스륨을 나타내는 거예요. 미스륨이 활동하는 공간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공간과는 달라요. 보기보다 넓거나 좁기도 하고, 끝날 듯하면서 끝없이 이어지기도 하죠. 이건 단적인 예고, 경우의 수를 나열하자면 끝이 없어요. 미스륨은 주로 공간을 형성하거나 변형하면서 초현실적인 일들을 일으키지만, 때에 따라서는 상상할 수 없는 현상을 일으키기도 하거든요.”

“이 골목의 입구는 미스륨 때문에 좁아 보일 수도 있는 거군요. 안쪽은 입구보다는 폭이 넓은 편인데 말이에요.”

“맞아요. 쉽게 말하자면, 한 개의 장소에 두 개의 공간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곳은 일반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공간이고요.”

“그럼, 우리는 어떻게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거죠?”

“우리가 여기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페가수스 덕이에요. 본래 이곳은 미스륨의 영향을 받는 사람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는데, 페가수스는 미스륨이 작용하는 공간을 뚫고 들어올 수 있거든요.”

이온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바이크의 좌석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바이크의 헤드라이트가 두어 번 깜빡이며 밝아졌다. 마치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기뻐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케이는 놀라서 물었다.

“설마, 그 바이크 살아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거라뇨, ‘페가수스’라고 불러주세요.”

“그러니까 그 페가수스도 살아있는 거냐고요?”

“페가수스도 평소에는 다른 바이크와 같은데, 미스륨이 활동하는 공간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것처럼 바뀌긴 해요. 사람의 말에 반응하기도 하고 때로는 상황을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죠.”

“대체 내가 모르던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죠? 일반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 말을 알아듣는 바이크에, 앞으로는 또 뭘 보게 될지 상상이 가질 않는군요.”

이온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곤, 페가수스를 끌며 앞장섰다. 케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 뒤를 따랐다. 골목은 어두웠고, 불빛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문을 연 가게가 거의 없어서였다. 설령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게라 하더라도 출입문이 없었다. 이온은 주위를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깊은 밤과 같은 골목에서 페가수스의 헤드라이트는 의지가 되었다. 페가수스는 눈이 너무 부시거나 주변이 어둡게 느껴지지 않도록 불빛의 양을 조절했다. 기특한 행동이었다. 

골목의 중간쯤 다다르자, 이온이 휴대폰을 켰다. 그녀는 초콜릿 지도 앱을 실행했다. 골목 안에 몇 개나 떠 있던 초콜릿 모양이 혼란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움직여 분산된 초콜릿 아이콘을 한데 끌어모았다. 아이콘은 쉽게 모이지 않았으나, 그녀가 같은 행동을 여러 번 시도하자, 한곳으로 합쳐지며 개수가 줄어들었다. 이제 화면에 보이는 아이콘은 두 개였다. 그녀는 둘 중에서 가까운 곳의 위치를 확인한 후, 방향을 잡았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케이가 물었다.

“그건 뭐 하는 겁니까?”

“반응 에너지를 확인하는 거예요.”

“반응 에너지요?”

“미스륨이 더욱 강하게 작용하는 장소를 찾는 거라고 보면 돼요.”

“그렇군요. 그런데 미스륨이 공기중을 마구 떠돌아다니는 원소라면 왜 이 골목 안에서만 활동하는 거죠? 충분히 다른 곳을 돌아다닐 수 있을 텐데요?”

“예리한 지적이네요. 사실, 시에나씨는 미스륨이 아무 곳이나 마구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킬 것에 관한 대비를 해두셨어요. 친구들과 함께 도시 곳곳에 미스륨의 활동을 제한하는 물질을 발라두신 거죠. 이곳에도 그 물질이 발려있기 때문에 미스륨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거고요.”

“의외로 대비를 철저히 해두었군요. 하지만 이 큰 도시 곳곳에 해당 물질을 발라 놓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요.”

“당연히 혼자 하신 건 아니에요. 가게 직원은 저 하나지만, 협력사라고 해야 하나? 시에나씨와 뜻을 함께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과 함께 작업한 거예요. 아까 들렀던 주식회사 헤르메스도 협력사 중 하나고요.”

“음, 이 도시에는 내가 모르는 것들이 정말 많이 숨겨져 있었네요. 오랜만에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기분이에요. 갑자기 새로운 모험을 찾아 나선 사춘기 소년이 된 것 같군요.”

“좋은 현상이네요. 모험을 찾아 나서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죠.”

“긍정적인 해석이네요. 하지만 일단 시계태엽을 찾아야 모험이 즐겁게 느껴질 것 같아요. 만약 그렇지 못하면 시간 낭비에 체력 낭비라고 할 수 있죠.”

“그럴 수도 있죠. 케이 씨 같은 분께는 시간이 금과 다름없으니까요.”

“이해해줘서 고맙군요.”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계속 나아갔다. 물론, 이온은 걸어가는 중에도 휴대폰과 길을 대조하며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골목은 넓지 않았으나, 갈림길이 무척 많았기에 자칫했다간 길을 잃기에 십상이었다.

지도를 따라 갈림길을 헤쳐 나가고 있을 때였다. 어디에선가 달콤한 냄새가 풍겨왔다. 냄새를 맡은 이온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페가수스를 끌고 얼른 냄새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간판 없는 가게가 하나 있었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게 안쪽에는 초콜릿이 가득했다. 

“다 왔네요.”

“여긴 어딥니까?”

“첫 번째 목적지예요.”

“이런 곳에도 가게가 있네요. 간판은 없지만.”

“맞아요. 가게이긴 하죠. 주인은 없겠지만.”

“뭐라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요? 주인 없는 가게라니?”

“이건 시에나씨도 아직 원인을 밝혀내지는 못한 현상 중 하나인데요, 미스륨이 활동을 제한하는 물질과 만나 반작용을 일으키는 장소에는 이렇게 간판 없는 초콜릿 가게가 생겨요.”

“신기한 현상이군요. 왜 그럴까요?”

“계속 연구 중이에요. 미스륨을 제한하는 물질의 원료를 카카오 열매에서 추출했기 때문인 걸까요? 아무튼 얼른 안으로 들어가 봐야겠어요.”

이온은 말을 마치자마자 배달 박스를 챙겨 들고 케이와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바깥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초콜릿이 가득했다. 초콜릿은 냄새도 달콤했고, 모양도 그럴싸했다. 감각이 아주 뛰어난 쇼콜라티에가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할 만했다. 이온은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테이블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있는 여성 손님을 발견했다. 이온은 그녀가 제피로스가 전해준 첫 번째 이야기에 등장하는 보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온은 보라에게 다가갔다.

“손님, 마음에 드는 메뉴는 발견하셨나요?”

이온의 물음에 보라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를 비우신 줄 알았는데 금방 오셨네요. 다행이다, 안 그래도 메뉴를 보고 있었어요.”

“천천히 살펴보시고 마음에 드는 메뉴를 골라주세요.”

“네.”

보라는 대답을 마치고 다시 메뉴를 살폈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초콜릿 음료를 하나둘 짚어 내려가다가 멈추었다.

“전 헤이즐넛 초콜릿으로 할게요.”

“알겠습니다. 얼른 준비해 드릴게요.”

이온은 친절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배달 박스를 든 채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은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와 비슷한 장소에 있었다. 그녀는 싱크대 옆 공간에 박스를 내려놓고 안에서 음료를 만들 재료를 꺼냈다. 시에나의 수제 초콜릿 파우더와 각종 시럽, 우유와 크림이었다. 계량컵에 재료를 넣기 전, 그녀는 찬장을 올려다보았다. 음료를 담을 컵을 찾기 위해서였다. 찬장은 꽤 높은 곳에 설치되어있어 까치발을 들어야 했다. 

까치발을 들었음에도 손잡이에는 손이 닿을락 말락 했다. 그녀는 몇 번 더 시도해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발판으로 삼을만한 것을 찾았다. 그때, 케이가 옆으로 다가왔다. 훌쩍 키가 큰 그는 손쉽게 찬장 문을 열어주었다.

“손이 안 닿으면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뭘 혼자 끙끙대고 있는 거예요?”

“고마워요. 케이 씨도 손님이라는 생각에 미처 도와달라고 할 생각을 못 했네요. 아무튼 찬장 문을 열어 주신 김에 예쁜 컵 하나만 꺼내주실래요?” 

“예쁜 거라면 이게 좋겠군요.”

케이는 머그컵을 하나 골라 이온에게 내밀었다. 아래쪽이 단단하고 두꺼우면서도 모양이 잘 잡힌 컵이었다. 

“고마워요, 단순하지만 고급스러운 모양의 컵이네요.”

“이것 말고 더 도와줄 건 없나요?”

“네, 이젠 편히 앉아계세요. 일단 손님이 주문하신 음료를 만들어야 해서요.”

이온은 말을 마치고 다시 음료 만들기에 돌입했다. 계량컵에 초콜릿 파우더와 크림을 넣어 섞은 다음, 스팀 기계로 우유를 데웠다. 우유가 데워지자, 그녀는 머그컵에 우유를 붓고 잘 섞은 초콜릿, 헤이즐넛 시럽을 더했다. 달콤 쌉사름하면서도 고소한 냄새가 주변에 퍼졌다. 음료의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부드러운 우유 거품과 헤이즐넛 조각이었다. 그녀는 완성된 음료를 들고 보라에게 다가갔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보라는 고개를 꾸벅 하며 인사를 건네고 음료를 받아들었다. 그녀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바라보다가 음료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자 지쳐서 멍해 보이던 그녀의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그녀는 작게 혼잣말했다.

“진짜 맛있네.”

이온은 미소 지으며 계산대로 돌아왔다. 그녀가 음료를 편히 마시도록 자리를 피해 준 것이었다. 보라는 얼마간 창밖도 내다보고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기도 하며 천천히 음료를 마셨다. 잔을 다 비우고 나서도 머그잔 속을 들여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계산대 앞에 서 있는 이온에게 다가왔다.

“음료 정말 잘 마셨어요. 계산해 주세요.”

그녀는 카드를 내밀었지만, 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금액은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손님께 만들어드린 음료는 저희 사장님의 선물이니까요.”

“선물이요?”

“네, 길을 잃은 분들에게 드리는 선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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