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로프 Oct 14. 2024

22. 다크 초콜릿 (1)

“다시 봤어요.”

“다시 봤다구요? 저를요?”

케이의 말에 이온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페가수스를 끌었다. 

“어떤 점이 새롭게 보이시던가요?”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전문적인 느낌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그 때는 미덥지 못하다는 생각 뿐이었는데 지금은 이 일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구나 하는 게 느껴져요.”

“한두 번 해본 건 아니긴 하죠. 이 도시에는 미스륨 때문에 혼란을 겪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거든요.”

“이 일에 노련한 것을 보면 정말 그래 보여요.”

“네, 어떻게 보면 원해서 노련해진 게 아니라 노련하게 보일 정도로 일이 많았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미스륨은 하필 해 질 녘쯤에 더 작용이 활발해서 퇴근하고 곧장 문제를 해결하러 다닐 때도 많거든요. 사장님 허락하에 뛰는 합법적인 투잡이랄까요?”

“힘들겠네요.”

“힘들다기보다는 보람차요. 저마다 사연은 다르지만 미스륨 때문에 혼란을 겪던 손님들이 안정을 되찾으실 때면 이 일을 하길 참 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분들을 도울 수 있어서 기뻐요.”

“직업 만족도가 높겠군요.”

“그렇다고 봐야겠죠?”

이온은 케이와 대화를 하다 잠시 멈춰 서서 휴대폰을 켰다. 초콜릿 지도 앱에는 이제 하나의 아이콘만 떠 있었다. 그녀는 아이콘이 가리키는 장소가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예요! 복잡하지 않은 장소에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온이 빠르게 걷자, 케이도 덩달아 성큼성큼 걸었다. 한 사람은 발이 빠르고 한 사람은 보폭이 넓었기에 목적지에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장소에는 이전과 같이 간판 없는 초콜릿 가게가 있었다. 얼핏 보면 지난번 가게와 외양이 비슷한 듯하면서도 달랐다. 눈에 띄는 건 창문틀에 장식된 도자기 인형들이었다. 인형들은 아기자기하면서도 정교했다. 이온은 가게 문을 열고 케이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 바로 앞의 자리에는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그는 제피로스가 모아온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민’이었다. 이온은 그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메뉴를 보고 계시나요?” 

“아, 네. 주인분이 안 계시는 것같아서 메뉴 먼저 보고 있었어요. 초콜릿 음료가 많네요.”

이온은 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혹시 단 것을 별로 안 좋아하시나요?”

“안 먹는 건 아니지만, 즐기는 것도 아니라서요. 주변에 문을 연 가게가 없어서 들어오긴 했는데 초콜릿이 주메뉴라 당황하긴 했어요.”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다크 초콜릿 음료는 어떠세요? 달지 않고 풍미도 좋아서 추천드리는 메뉴예요.”

“다크 초콜릿이요?”

민은 이온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메뉴를 살펴보았다. 다크초콜릿이 들어간 메뉴는 메뉴판의 앞쪽에 여럿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조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그걸로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온은 주문을 받자마자 배달 박스를 멘 채로 주방으로 들어갔다. 가게는 격자 구조였는데, 계산대와 진열장, 주방이 분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주방으로 가서 박스를 열고 필요한 재료를 꺼냈다. 재료를 잘 나열해 놓은 그녀는 찬장의 위치를 확인했다. 찬장은 손이 닿고도 남을 만한 곳에 있어 케이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이온은 계량컵에 다크초콜릿 파우더를 넣고 스팀기로 유유를 데웠다. 데운 우유를 컵에 부은 후에는 거품기로 잘 저은 다음, 찬장에서 머그컵을 꺼내 음료를 부었다. 음료의 마무리는 스팀기로 데웠던 우유 거품이었다. 진한 고동색 음료 한가운데를 흰색 우유 거품이 차지하자, 그녀는 시에나의 수제 다크초콜릿을 알맞게 잘라 음료 위에 올렸다. 초콜릿 일부는 돌돌 말리고 일부는 불규칙한 모양이었다. 냄새는 헤이즐넛 초콜릿보다 살짝 쌉쌀했다. 우유가 더 잘 데워졌는지 부드러운 우유의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녀는 완성된 음료를 가지고 민에게 다가갔다.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민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며 양손으로 음료를 받아 들었다. 그는 컵을 만지작거리다가 음료를 한잔 마셨다.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음료를 마시자마자 그는 두 눈썹을 위로 치켜올렸다. 눈이 번쩍 뜨인 것같았다. 그는 표정을 바꿀 새도 없이 다시 음료를 마셨다. 뜨겁지만 않았다면 꿀꺽꿀꺽 마셨으리라고 해도 무방했다. 이온은 보라를 만났을 때 그랬던 것처럼 민이 음료를 편하게 마시게 두었다. 케이도 멀찍이 떨어져 앉아 민의 시야를 방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덕분에 민은 맘편히 음료를 마쉬고 쉴 수 있었다.

음료를 다 마신 민은 후드티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이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초리였으나, 용기가 나지 않는 듯 계속 꾸물거렸다. 민은 그가 당황하지 않게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세요?”

“저, 그게….”

그는 한참을 더 머뭇거리다가 겨우 용기를 내서 말했다.

“정말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제가 잘 보이시죠?”

“그럼요, 잘 보이죠. 조금 전에 음료수도 다 드셨잖아요.”

“그렇죠? 다행이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니면 최근에 이상한 일을 겪으셨다든가….”

이온은 자연스레 계산대 뒤에서 나와 민 맞은편에 앉았다. 그녀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민이 명함을 받아 들자, 그녀는 보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민에게도 그가 겪었던 일의 원인을 이야기 해주었다. 차분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설명이었다. 민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던 거군요. 미스륨이라, 정말 이상한 원소네요. 시간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바람에 사람을 잔뜩 놀라게 하기나 하고.”

“맞아요. 미스륨이 본래 사람을 당황스럽게 하곤 해요.”

“그나저나 저는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건가요? 원치 않게 미래에 왔으니, 과거로 가고 싶은데 지금 상태로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바깥에 다시 나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일들만 계속될까 봐 두려움도 있으실 테고요.”

민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눈을 끔뻑이며 바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이야기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미래의 저는 의식이 없는 상태예요. 제가 미래의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였던 것도 그것과 연관이 있을 거예요. 이 상태에서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아니,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나 할까요?”

이온은 민이 무척 회의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해도 미래의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모습을 목격한다면 혼란스러울 것이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음료를 주문하고 끝까지 마셔준 것만 해도 고마울지 모를 일이었다. 이온은 자리에서 일어나 배달박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배달 박스 한편에는 종이봉투가 잘 말려서 놓여있었다. 그녀는 봉투를 풀어내고 안에 든 상자를 꺼냈다. 그녀는 상자를 민에게 건넸다.

“민 씨, 이건 누군가가 민 씨에게 보낸 선물이에요. 겉에 이름이랑 주소가 적혀있어요.”

“예전 집으로 왔던 선물인가? 이런 건 반송한 기억이 없는데….”

민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상자를 봉한 테이프를 뜯었다.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박스가 열렸다. 박스 안에는 잘 구겨지는 종이로 겹겹이 싼 물건이 들어있었다. 민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종이를 벗겨냈다. 종이를 다 벗겨내자, 민과 이온의 눈앞에 도자기 인형 하나가 나타났다. 앙증맞은 크기의 치와와 모양의 인형이었다. 민은 인형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는 손으로 인형을 만져보기도 하고 그럴리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젓기도 했다. 작은 인형을 세심히 살펴보던 민은 다시 박스를 살펴보았다. 박스 안에는 엽서 한 장이 함께 들어 있었다. 민은 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민 님께

판매용 계정도 아닌데 

게시물에 판매 관련 문의를 달아서 많이 당황하셨을 텐데 

인형을 판매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희 손자 녀석이 점토로 인형 만드는 걸 좋아하는데

SNS에서 이 인형을 보자마자 갖고 싶다고 온종일 노래를 부르는 바람에

할머니가 돼 가지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요.

나보다 조금 젊은 친구들에게 SNS라는걸 조금씩 배워서 소통했던 터라

젊은 분이 많이 답답하셨을텐데 언제나 친절하게 대답해주시고

우리 손자에게 DM이라는 것으로 

인형 만드는 법도 알려주셔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인형은 우리 손자가 민 님이 SNS에 올리셨던 영상을 보고 만든 강아지 인형이에요.

민 님 솜씨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그동안 잘 대해주신 것이 고마워서 만들어 보았어요.

요즘은 SNS를 닫으셔서 도통 소식을 알 수 없지만 어디서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민님의 영원한 팬인 할머니가(WAWAGRANDMA)     

민은 엽서 마지막에 적힌 SNS아이디를 몇 번이고 눈여겨보았다. 그는 휴대폰을 켜보았지만, 여전히 먹통이었다. 

“그분이 맞는 것 같은데. 내 SNS에 처음으로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 닉네임이 쉬운 글자로 되어 있어서 기억이 나는데….”

그는 계정을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운 듯 휴대폰을 껐다가 켜는 일을 반복했다. 그때, 케이가 갑자기 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나 진열장 쪽으로 다가갔다.

“저게 왜 저기 들어있지?”

이전 21화 21. 헤이즐넛 초콜릿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