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은 사람이요?”
보라는 의아한 얼굴로 이온을 바라보았다. 이온은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의 상호명이 적혀있었다. 보라가 명함을 읽자, 이온은 자연스레 계산대 바깥으로 나와 그녀에게 앉기를 권했다. 보라는 여전히 명함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자리에 앉았고, 이온은 그녀가 명함을 꼼꼼히 보길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이온은 차분한 어조로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소개한 다음, 보라가 겪은 일련의 초현실적인 일들에 관해 알고 있음을 이야기했다. 더불어 그녀가 왜 그런 일을 겪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도 설명했다. 이온의 설명을 들은 보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말했다.
“학교에 다닐 때 과학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개념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지만, 이런 일이 일어난 건 결국 ‘미스륨’이라는 원소의 작용 때문인 거군요.”
“맞아요. 보통의 화학 원소도 특정한 상황에 놓이면 평소와 다른 반응을 보이잖아요? 미스륨도 마찬가지예요. 보라씨가 과거의 자신을 만난 건, 미스륨이 시계탑 주위를 떠다닐 때 주변에 계셨기 때문이에요. 미스륨이 보라씨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초현실적인 작용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평소라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겠지만, 과거의 나를 만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요. 살면서 그런 일을 겪는 사람은 없잖아요. 비록 과거의 나와 헤어지던 순간에는 잔뜩 화만 내고 말았지만….”
보라는 후회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말을 더 하지는 않았으나, 이온은 한숨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마음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는 보라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전에 배달 박스에 넣어 둔 종이봉투를 가져왔다. 그녀는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편지의 겉면에는 주소와 함께 보라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실은 전해드릴 게 있어요. 이거, 보라 씨 앞으로 온 편지예요.”
“제 앞으로 온 편지요?”
보라는 놀라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봉투 앞에 적힌 발신자와 주소를 읽은 그녀는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한동안 편지봉투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봉투를 개봉했다. 그녀는 봉투 안에서 편지지를 꺼내면서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상을 찡그리느라 잘게 주름진 미간에는 회의감과 의심이 느껴졌다. 편지를 막 읽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렇지만 편지를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갈수록 미간의 주름은 사라지고 눈썹은 아래로 처졌다. 그러다가 두 손을 살짝 떨며 훌쩍였다. 보라는 울고 있었다.
“이건, 이건….”
그녀는 목이 메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온은 계산대 위에 놓여있던 티슈를 가져와 보라에게 건넸다. 보라는 편지를 내려놓고, 티슈에 얼굴을 묻은 채 울었다. 편지에 눈물이 묻어 군데군데 글자가 번져있었다. 이온의 눈에도 편지의 내용이 들어왔다.
미래의 나에게
안녕?
어쩌면 네가 이 편지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만났을 때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서 펜을 한번 들어봤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난 무척 놀랐어. 미래의 내가 입사하려던 회사의 사원증을 목에 걸고 있었으니까. 장하고 대단하다는 마음과 함께 열심히 노력했구나, 지금의 노력이 헛되지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도 들었어. 레스토랑에서 내가 평소에 엄두도 못 내던 음식을 사줄 때는 네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멋있기도 했어. 불안정한 하루를 보내며 가슴 졸이는 나와 달린 진정한 어른처럼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널 잠시 부러워하기도 했어.
하지만 네가 전광판에서 나오는 드라마에 눈길을 돌린 순간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어. 미래의 나는 행복하지 않구나. 여전히 드라마 작가가 되기를 포기한 걸 후회하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말이야. 네가 나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던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꿈도 포기하고 직업마저 없는 내가 널 위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없었어. 그래서 일부러 널 칭찬한 건데 역효과만 나버렸어. 오히려 널 화나게 해버린 거야. 네가 막 화를 내기에 당황해서 힘들면 그만두라는 말을 해버렸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너무 무책임했어. 당장 나도 취업 준비하는 걸 그만두지 못할 거면서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미안해.
돌이켜보면 나는 정말 한심해. 꿈을 향해 나아갈 용기도 없고, 걱정만 많은 겁쟁이야. 결국, 미래의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도 내가 용기 내지 못했기 때문인데 나는 정작 미래를 마주하고서도 용기 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어. 네게 편지를 쓰는 지금도 뭘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고 엄두도 나지 않아. 그저 매일 취업 준비하러 도서관에 가고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어쩌면 이것도 다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곤 해.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또 미안해. 내가 네게 진심으로 하고 싶었던 건 사과야. 비록 나는 볼품없고 초라한 겁쟁이지만 내가 하는 사과를 받아줄래? 나는 계속해서 크게 변함없는 하루를 보낼 거고 대단한 용기 같은 것은 내지 못하겠지만, 이제부터는 너를 위해 작은 시도라도 해보겠노라 약속할게. 언제나 건강하게 잘 지내.
추신. 미래의 내가 사는 곳이 어디일지 잘 모르겠어서 회사로 편지를 보내. 물론, 편지가 전해진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전해졌으면 좋겠어.
솔직하면서도 담담한 편지였다. 어쩌면 편지를 받는 대상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전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이온은 편지지에서 시선을 돌려 편지봉투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적힌 것은 정말 회사명과 주소였다. 주소를 읽고 있는데 편지지 아랫부분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편지지 안에 뭔가 더 들어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때, 울음을 그친 보라가 말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죠?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 그것이 전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난 계속 이곳에 있었는데 과거의 시간은 다시 흐르기라도 했던 걸까요?”
“그런 것 같아요. 이 골목에 들어온 이후, 보라 씨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과거의 시간은 원래대로 흘러갔던 거죠.”
“그럼, 이 편지는 어떻게 발견하신 거죠? 과거에도 지금 다니는 존재하긴 했지만, 그 때는 제가 취업하지 않았을 때라 회사로 편지가 갔다면 폐기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건, 저희 가게의 협력사 덕분이에요. 협력사 중 하나가 택배업을 운영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미스륨이 감지되는 편지나 물건을 수거할 수 있어요. 이 편지에서도 미스륨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수거해 두셨다가 제게 전해 주신 거예요.”
보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티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편지를 읽고 보니, 내가 너무 심했어요. 과거의 내가 용기 내지 못하는 모습이 한심하다며 안 좋은 소리만 했어요. 그러면 안 됐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살다 보면 누구나 실수를 하는걸요? 상대가 오히려 남이 아니라 자신이었기 때문에 더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과거에 일어난 일을 후회하기 마련이잖아요. 하지 않았던 일과 가지 않은 길에 관한 후회는 누구나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럴 때면 과거의 자신이 미워지기 마련이고요.”
“맞아요, 그랬어요. 그냥 내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는데 이 편지를 읽으니 그런 마음은 사라지고 미안한 마음만 들어요. 나를 너무 미워하지 말걸, 과거의 나도 힘들었을 텐데 용기를 북돋워 주고 토닥여줄걸.”
“후회 되실지도 모르겠지만, 과거의 보라 씨는 다 이해할 거예요. 지금의 보라씨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말이에요. 그러니까 편지로 못다 한 마음을 전한 거겠죠. 그리고 아직 못 드린 말씀이 있는데, 편지봉투 안에 뭔가 더 들은 것 같아요. 안쪽이 볼록해요.”
“맞아요, 아까 편지지만 들었다기에는 무게가 느껴졌는데, 편지 내용이 궁금해서 꺼내 볼 생각을 못 했어요. 뭐가 든 걸까요?”
보라는 편지지를 거꾸로 들고 털어보았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네모난 초콜릿 하나가 떨어졌다. 초콜릿 위에는 작은 메모지가 붙어있었다.
‘네가 가장 좋아하는 헤이즐넛 초콜릿이야. 월급날에 누렸던 작은 사치라고 하면 기억할까? 미래에도 이걸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먹고 힘내!’
보라는 초콜릿과 그 위에 적힌 메모를 보더니 다시 티슈를 뽑아 들었다.
“죄송해요.”
그녀는 말을 마칠 새도 없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이온은 보라가 왜 헤이즐넛 초콜릿 음료를 주문했는지 알게 되었다.
보라의 눈물에 젖은 티슈가 다시 한번 테이블에 놓였을 때였다. 이온은 가게의 공간이 일렁이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보라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여기서 나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아요.”
“네.”
보라는 코를 훌쩍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온은 보라가 일어서자, 근처에 앉아 있던 케이에게 다가갔다.
“케이 씨, 나가야 해요.”
“알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공간이 일렁이고 있군요.”
케이는 정장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계산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뭐야? 저건….”
“왜요?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케이는 대답 대신 고개만 저으며 계산대 쪽으로 다가갔다. 이온도 배달 박스를 챙기기 위해 그와 함께 계산대에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시계태엽으로 보이는 물건이 놓여있었다.
“이건 시계태엽 아닌가요?”
“맞아요. 정확히 말하면 잃어버린 세 개의 태엽 중 하나죠.”
케이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태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나서도 계속해서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태엽을 뜯어보았다.
“이걸 여기서 발견하게 되다니….”
“태엽을 발견한 건 정말 다행이지만, 더는 여기 있으면 안 돼요. 공간이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나가지 않으면 이곳에 갇힐지도 모른다구요!”
이온은 어깨에 배달 박스를 멘 채, 꾸물대는 케이의 팔을 이끌고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 다행히 보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먼저 가게 바깥으로 나와 있었기에 세 사람 모두 가게 안에 갇히는 걸 면할 수 있었다.
먹음직스러운 초콜릿이 가득했던 가게는 언제 그곳에 있었냐는 듯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곧, 가게가 있던 장소는 회색의 벽으로 변했다.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이온은 벽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화면을 켜고 초콜릿 지도를 바라보았다. 지도에 있던 초콜릿 아이콘 하나가 사라지며, 새로운 길이 하나 나타났다. 그녀는 화면을 캡처한 후, 보라에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다. 보라가 휴대폰 번호를 알려주자, 이온은 지도를 전송했다.
“지도에 보이는 길을 따라가면, 골목 바깥으로 나가실 수 있을 거예요.”
“네, 그런데 이온 씨는 같이 안 가세요?”
“저는 갈 곳이 남아 있어서요.”
“그렇군요. 오늘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저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걸요.”
“이온 씨가 근무하시는 곳이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라고 하셨죠?”
“맞아요.”
“언제 한번 놀러 갈게요.”
“네, 꼭 놀러 오세요. 사장님이 만드신 맛있는 초콜릿이 아주 많아요. 요일마다 다른 초콜릿을 만드시니까 언제 오시든 새로운 초콜릿을 맛보실 수 있어요.”
“알겠어요, 꼭 가볼게요.”
보라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고, 이온도 마주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그러고는 그녀의 뒷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