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진열장 문을 열었다. 이온이 바라보니 진열장 한가운데에는 시계태엽으로 보이는 물건이 존재감을 과시하며 놓여있었다. 이전의 태엽보다 크기가 세 배는 커서 더 그렇게 보였다.
“이번에는 더 빨리 나타났네요?”
“그런가 보네요.”
케이는 진열장 안에서 시계태엽을 꺼냈다. 이온이 보기에도 꽤 묵직한 듯했다. 다소 투박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달콤한 초콜릿 냄새가 태엽 곳곳에 배어있어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이질적인 건 단순히 달콤함 뿐인줄 알았는데, 케이가 태엽에 두 손을 댄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태엽에서 작은 빛 몇 개가 나와 주변으로 퍼지더니, 곧, 파노라마처럼 쭉 펼쳐졌다. 파노라마는 스크린에 상영되는 영화처럼,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아니, 그곳에는 기억이 담겨있었다.
기억의 주인공은 민이었다. 그것도 제피로스의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았던 그의 미래였다. 파노라마 속 민은 SNS 구독자에게 직접 만든 인형을 택배로 보냈다. 돈은 받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은 무척 들떠 보였다. 누군가가 자신이 만든 인형을 원한다는 사실이 기뻤는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그는 인형을 종이와 신문지로 조심스레 싸서 작은 박스에 넣고 우체국에 가져가 부쳤다.
다음으로 이어진 파노라마에서는 그가 구독자의 메시지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구독자는 손자가 인형을 좋아한다는 사진을 올리며 민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이후로 그는 구독자의 손자에게 인형 만드는 법을 몇 번 알려주게 되었다. 메시지가 오면 인사도 해주고, 어느 부분을 모르겠다고 하면 어릴 적 처음 인형 만들던 기억을 떠올리며 세심한 조언도 건넸다. 다정한 형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그 순간의 민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분위기가 어두워진 건, 민의 기억에 회사가 나오고 나서 부터였다. 민은 언제나처럼 성실하게 주말 출근을 했다. 과장은 언제나 그에게 일을 더 시키지 못해 안달이면서도 본인은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민은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이 일 저 일 도맡아 하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잠시 SNS에 글을 올렸다. 지난 밤 새로 완성한 인형이었다. 쉬는 시간에 한 일이고, 회사와 연관된 글을 올린 것도 아니었으나, 과장은 그 모습을 보고 화를 냈다. 역시 젊은 직원들은 생각이 없다. 회사에서 SNS나 하고 자빠졌다. 정신머리가 썩었다. 설마 회사 몰래 부업을 하며 물건을 파는 거냐. 회사에서는 겸직 금지인 것 모르냐는 말을 하면서 민을 괴롭혔다. 민이 그런게 아니라고, SNS로 알게 된 분들과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이라고 대꾸해도 소용이 없었다.
과장은 이후로도 틈만 나면 SNS 이야기를 하며 민을 괴롭혔다. 일이 별로 없으니 회사에서 다른 짓이나 한다면서 잡일을 모두 몰아주기도 했다. 민은 억울했다. 그러면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발톱이나 깎는 당신이나, 주식만 붙잡고 있는 대리, 틈만 나면 여행을 가야 한다면 연차를 내는 선배는 일을 제대로 하긴 하는 거냐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회사에서 막내는 언제나 서러운 법이고 그런 시간을 버티면 힘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당한 처사를 묵묵히 견디며 일했다. 과장에게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업무 시간에는 SNS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열심히 일했는데도, 좋아하는 일마저 다 제쳐두었는데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과장은 그를 괴롭히기로 단단히 마음먹었는지, 사내 회의 안건에 직원 회사 내 SNS 금지에 관련된 내용을 올렸다. 회사 기밀이 유출될 수도 있고 신규 직원들의 업무 효율을 떨어뜨린다는 이유에서였다. 회의에 들어가서 자신이 제기한 안건을 얼마나 강하게 주장했던지, 사내에서는 SNS를 지양하라는 상부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민은 새로 떨어진 지시가 꼭 자신을 겨냥하는 것만 같아 괴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과장에게 한 소리 들은 후로 SNS 계정을 방치하다 시피 했는데 그냥 닫는 게 정신 건강에도 회사 생활에도 좋을 것같았다. 그는 그날로 계정을 폐쇄했다.
계정을 폐쇄하고 나서는 회사 일에 집중했다. 자신이 지시 사항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했다. 과장이 어떤 일을 지시하든 팀원들이 무슨 일을 떠넘기듯 묵묵하게 다 해냈다. 그럴수록 인형 만들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집에 오면 침대에 쓰러져 잠자기에 바빴다. 그는 논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싫었다. 선배나 윗사람의 지시를 듣지 않는다거나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거나 하는 등의 질책은 더더욱 듣고 싶지 않았다. 모든 사람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아무리 노력해도 누군가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 같아 괴로웠다.
회사일에 신경을 쓸수록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는 나날이 늘어났다. 잠을 못 자니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 않았다. 멍한 상태로 출근해 쏟아지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오후쯤 두통이 몰려왔다. 두통이 오면 진통제로 버텼다. 진통제를 먹어도 듣지 않으면 더 강한 종류를 사서 먹었다. 한 알이 안 들으면 두 알을 먹고, 두 알도 안 들으면 세 알을 먹었다. 피로가 쌓인데다 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속은 항상 좋지 않았다. 밥맛은 언제나 별로 없었고 조금이라고 기름진 것을 먹으면 속이 더부룩했다. 속이 좋지 않을 때도 민은 약을 먹었다. 진통제를 먹는 것처럼 속이 안 좋을수록 센 약을 먹었다.
의미 없는 시간이 지나갔다. 민은 팀 내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신규 직원을 채용하지 않는 기간이 늘었다. 그는 들어올 때부터 만년 막내로 2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젊으니까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몸은 점점 망가져가고 있었다. 연말, 회계와 사업 정산 등의 업무로 가장 바쁠 시기 그는 자정이 넘어 택시 정류장으로 가다가 극심한 두통을 느꼈다. 병원에 전화를 걸 새도 없이 자리에 쓰러진 그는 도무지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기억의 파노라마는 그곳에서 끊겼다.
민의 기억을 본 이온과 케이는 말이 없었다. 기억의 당사자인 민도 그러했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한테 저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그 차디찬 병원에 홀로 누워 있었던 거구나.”
민은 모든 상황을 이해한 후, 망연자실한 듯 보였다. 이온은 다시 그의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괜찮으세요?”
“아니요, 잘 모르겠어요.”
민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SNS에서 만난 소년이 만든 인형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유약을 바른 인형을 하염없이 만지다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심히 일하면 언젠가 좋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묵묵하게 시키는 일을 다 하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봐요. 미래에서 마주한 나 자신에게 미안해요. 사람들에게 성실하게 보이고 싶다고, 문제 일으키는 게 싫다고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인 것 같아요. 그렇게 쓰러져 버린 것도 이해가 돼요.”
“민 씨 탓이 아니에요. 민 씨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파노라마 속 기억도 보게 되어 하는 말이지만, 나쁜 건 민씨 주변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민 씨가 입원하고 새로운 신규 직원이 들어오고 나서도 민씨에게 했던 행동을 답습하고 있잖아요. 그건 절대 옳은 일이 아니에요. 본인들 편하자고 아무것도 모르고 순진한 사람을 이용해 먹는 것이나 다름없죠.”
민은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고 멍하니 머그컵만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새로운 직원도 고생하고 있었죠. 그 많은 업무를 혼자 다 하다가는 병이 나고 말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부당하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경제 상황은 어렵고 취업도 쉽지 않은 시기잖아요. 쉽게 잘리지 않는 회사라고 해도 상사와 척을 지는 순간 사회생활이 힘들어질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죠. 제가 과장에게 부당함을 이야기하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말을 마친 민은 인형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인형의 등 부분의 불룩한 곳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매는 처져있어 웃고 있는데도 슬퍼 보였다.
“이걸 만든 아이는 눈썰미랑 손재주가 꽤 좋은 편이에요. 직접 만난 적도 없고 SNS 메시지로 지도를 몇 번 해주었을 뿐인데 제가 만들었던 인형 모양을 거의 비슷하게 따라했어요.”
“그건 민 씨가 친절하게 알려주었기 때문 아닐까요? 엽서에도 적혀 있잖아요.”
“좋은 분이에요. 내가 만든 인형을 사고 싶다고 했던 사람은 그분이 처음이었어요. 평생 취미생활로만 하다가 끝날 줄 알았는데 아주 잠시나마 새로운 가능성 같은 것을 느꼈어요. 결국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아니에요, 민 씨. 현재의 민 씨는 아직 쓰러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민 씨는 되돌아갈 수 있어요. 미래를 바꿀 기회는 아직 남아 있어요.”
“미래를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어떻게 바꾸긴요.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사랑하세요. 삶의 원동력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다시 생활로 돌아간다면 누가 뭐라 하든 SNS 계정을 닫지 마세요. 그리고 과장이랑 회사 사람들에게도 아닌 건 아니라고 이야기하세요.”
“하지만….”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건 힘든 일이라는 걸 알아요. 막내라서 더 부담되기도 하겠죠. 그렇지만 억지로 참으면서 일을 해낸 결과는 결국 건강의 손실뿐이었어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누가 뭐라 하든 민 씨도 본인의 권리는 찾아야 해요.”
“맞아요.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요. 내가 아프고 쓰러져봤자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죠. 사람은 다시 뽑으면 되고, 과장은 여전히 일도 안 하고 시간이나 때우면서 월급을 받겠죠. 주식만 하는 대리나 틈만 나면 놀러 가는 선배도 마찬가지예요. 그런 사람들 때문에 내 미래가 망가져 버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당연하죠. 그리고 그 회사 어차피 잘리지 않는다면서요? 과장이 인사권자가 아니라 할 말을 다 해도 어차피 해고하지 못할 테니 그냥 시원하게 한 소리 하고 민 씨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세요. 싫더라도 부딪쳐야 할 때는 부딪치는 게 인생의 정답일 수도 있어요.”
“고맙습니다.”
민은 인형을 손으로 꼭 쥐며 이온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용기를 내는 것도 미래를 바꾸는 것도 결국 민 씨예요. 저는 사장님과 함께 민 씨를 응원할게요.”
“아까 주신 명함을 보니,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의 점원이라고 하셨죠? 언제 한번 찾아갈게요. 그동안 단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마신 다크초콜릿은 정말 맛있었어요.”
“맛있게 드셨다니 영광이에요. 직접 오시면 더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이 있으니까 와서 꼭 드셔보세요.”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온은 공간이 사라질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민과 케이를 데리고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으로 나온 그녀는 휴대폰을 켰다. 초콜릿 지도에 떠 있던 커다란 초콜릿 아이콘 하나가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간판 없는 초콜릿 가게도 사라졌다. 이온은 민에게 골목에서 빠져나가는 길이 표시된 지도를 보내주었고, 민은 지도를 보며 그녀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제 초콜릿 지도 앱은 고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