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 일어났네요.”
“또 뭐죠?”
케이는 얼얼한 표정으로 이온에게 물었다. 그는 시계태엽에서 파노라마가 흘러나온 후로는 쭉 같은 표정이었다.
“그나저나 얼이 빠져 보이는 모습이네요.”
“사라져 버린 시계태엽을 뜻밖의 장소들에서 발견하는 데다가 내가 손을 대니 다른 사람의 기억까지 흘러나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뭐, 그럴 만도 하죠. 나라도 그럴 것 같아요. 아까 케이 씨가 태엽에 손을 댔을 때, 기억이 흘러나오는 모습을 보고서는 나도 놀랐어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죠?”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래서 더 어이가 없는 거예요.”
“혹시 자신도 모르는 능력 같은 게 있는 거 아니에요? 이 도시 곳곳에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꽤 여럿 살고 있거든요.”
“그런 게 있었다면 이미 알아차리지 않았을까요? 지금까지 몰랐을 리 없어요.”
“알아차릴 기회가 없었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나 좀 도와줄래요?”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분명 찾아야 할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는데, 신호가 미약해요. 작은 빛 같은 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데 도무지 신호를 잡을 수 없어요. 아무래도 마지막 사람은 초콜릿 가게를 그냥 지나친 것같아요. 가게에 들어가 있다면 아이콘이 나타나거든요.”
“그럼, 이 미로같은 골목을 정처없이 헤매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에요?”
“네, 가게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경우죠. 얼른 찾아야 해요. 아까 헤르메스 씨가 말씀하시길, 크로노스 가문 사람은 때가 되면 제 역할을 할 거라고 하셨는데 뭐 좋은 수가 없을까요?”
“특이한 분이네요. 나랑 만나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제 역할을 할 거라고 말했다고요?”
“그렇다니까요. 길을 찾는 데 뭐 유용한 방법 같은 거 몰라요? 시계 태엽도 척척 잘 발견하는 것 보면 정말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이온의 말을 들은 케이는 잠시 멈춰 섰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재킷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아주 고풍스러운 느낌의 회중시계였다. 이온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뭔가요?”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보 같은 건데, 오래전 항해사 셨던 분이 사용하시던 시계 겸 나침반이에요.”
“와, 그런 유물을 가지고 다니세요?”
“보시다시피 몇백 년 전 물건임에도 세련됐고, 시간도 잘 맞아서 가지고 다니고 있어요. 일을 하다가 확신이 잘 서지 않을 때면 나침반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고요. 변함없이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을 보면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말을 마치고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갑자기 나침반의 바늘이 혼란스럽게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한순간, 멈춰 섰다. 나참반 바늘이 멈추자, 이온의 휴대폰에서 ‘삑삑’하는 소리가 났다. 이온은 휴대폰을 켰다. 초콜릿 지도 화면에서 희미하게 움직이던 빛이 조금씩 커지더니 동그란 점으로 변했다. 점은 어떠한 방향으로 계속해서 움직였다. 그녀는 케이가 든 나침반을 바라보았다. 점이 움직이는 방향은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과 같았다.
“아무래도 케이 씨가 한 건 한 것 같아요.”
“뭐라고요? 나는 가문의 유산을 꺼냈을 뿐인데요.”
“어쨌든 잘했어요.”
이온은 케이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 보이고는 점이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달렸다. 케이도 달렸다. 이온도 그러했지만 케이도 날렵한 편이었기에 점을 따라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불안정하게 달리는 여성 한 사람을 발견했다. 이온은 그녀가 제피로스의 마지막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아인 것을 알아차렸다.
“저기요!”
이온은 뒤에서 그녀를 불렀다. 시아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이온은 얼른 그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괜찮냐는 물음에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이온은 배달 박스를 열어 안에 든 티슈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시아는 망설이다가 티슈를 받아들고 눈물을 닦았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습니다.”
“고맙긴요, 아니에요.”
“이 골목을 지나서 가야 할 곳이 있는데 아무리 달려도 출구가 보이지 않아서 막막하던 참이었어요. 길을 완전히 잃은 것같아서 두려웠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으셨을 거예요. 혹시,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어요?”
“네.”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자, 이온은 그녀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시아는 명함을 보자 반가운 듯 말했다.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 저 여기 알아요! SNS에서도 그렇고 여기저기서 맛있다고 소문난 가게인데, 여기 점원이신 거예요?”
“맞아요. 어이쿠, 그런 말씀을 들으니 영광이네요.”
“정말이에요, 워낙 평이 좋은 가게라 저도 가보고 싶었는데 바빠서 못 들렀어요.”
“시간이 되시면 언제 한번 오세요. 일단, 그 전에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하지만요.”
“골목을 빠져나가는 길을 아세요?”
“네, 걱정하지 마세요.”
이온은 시아를 안심시키며, 휴대폰을 꺼냈다. 그녀는 초콜릿 지도 앱을 보며 최단 거리로 골목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하지만 미스륨의 영향으로 미로처럼 얽힌 장소에서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온은 고민하다가 케이에게 도움을 청했다.
“케이 씨, 잠깐 그 나침반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알겠어요.”
케이가 나침반을 건네자, 그녀는 초콜릿 지도 위에 나침반을 대보았다. 처음에 빙글빙글 돌기만 하던 나침반은 일순간 멈추더니 한 방향을 가리켰다. 이온은 그쪽으로 방향을 잡고 케이와 시아에게 따라올 것을 권했다.
이후로 나침반이 마구 흔들리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골목을 빠져나가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이온은 그 시간을 이용해 시아에게 자신을 더 자세히 소개하고 그녀가 왜 현재와 같은 상황에 처했는지 알려주었다. 시아는 미스륨의 개념과 작용에 대해서 비교적 빠르게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제가 겪은 일들에는 다 이유가 있었네요.”
“시아 씨가 찾아갔던 영원의 정원도 아마 미스륨의 작용 때문에 오갈 수 있는 장소인 듯싶어요. 지금도 그곳에 가시려는 거죠?”
“네, 그곳에 꼭 다시 가고 싶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믿을만한 나침반 덕분에 거의 다 온 것같아요. 그러니까 시아 씨랑 케이 씨 모두 페가수스를 잘 잡으세요. 몸체를 잡아도 되고 뒷좌석을 잡아도 돼요. 대신 있는 힘껏 꼭 잡으세요!”
이온의 말에 두 사람은 페가수스의 뒷좌석을 잡았다. 이온은 뒤를 돌아 두 사람의 모습을 잘 확인한 후, 끝없이 이어진 골목길 한편으로 돌진했다. 그 순간, 공간이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과 함께 세 사람은 골목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골목 밖의 하늘은 여전히 남색과 어우러진 주황색이었다. 시아는 하늘의 색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골목에 들어왔을 때는 저녁이었는데, 바깥은 아직 해 질 녘이네요.”
“미스륨 때문에 시간의 왜곡이 일어나서 그래요. 문제가 해결되면, 시아 씨는 본래 있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일단 영원의 정원이 있는 곳으로 가요.”
“하지만 그곳은 밤 열시가 되어야만 들어갈 수 있어요. 그전에는 그곳으로 가는 문이 열리지 않아요.”
“제 오토바이인 페가수스가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오세요.”
이온은 시아를 안심시키고 다시 휴대폰을 켰다. 골목 바깥으로 나오자,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초콜릿 아이콘이 다시 지도에 나타났다. 초콜릿 아이콘이 떠 있는 곳은 백화점으로, 영원의 정원이 있는 장소와 일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