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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Oct 23. 2024

26. 해 질 녘의 초콜릿 하우스

일련의 사건이 해결된 후, 시에나씨와 이온은 평범한 나날들을 보냈다. 시에나는 아침 일찍 초콜릿을 만들고, 이온은 영업 시작 전에 가게를 정리하고 정성껏 손님을 맞이했다. 대부분의 날에 초콜릿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마지막 초콜릿을 사지 못한 손님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가게를 나섰다. 그러나 가게에서 풍겨오는 달콤한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손님들의 표정은 밝아졌다.

바쁜 나날 중,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의 도움을 받은 손님들도 가게를 방문해 근황을 알렸다. 미스륨의 영향으로 과거의 자신을 만났던 보라는 지지부진하게 손을 놓고 있던 시나리오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놀라운 건, 그녀의 외장하드에 이전에는 쓴 적 없던 시나리오 한 개가 저장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 저장된 시나리오는 과거의 보라가 미래의 보라를 생각하며 쓴 시나리오였다. 보라는 그 시나리오에 내용을 보태 새로운 시나리오를 완성해가고 있었다.

민은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았다. 회사에서 싸우기 싫어서 상사와 동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게 나은 것 같아서 부당함을 참았던 그는 용기를 내서 부당함에 맞섰다. 과장에게 업무가 편중되어 있음을 이야기하고 조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과장은 처음에 그에게 ‘요즘 것들’을 운운하며 빈정거렸지만, 민은 팀 내에서 본인의 업무가 과중함을 객관적으로 증명하여 과장이 할 말이 없도록 만들었다. 회사에서는 부당한 업무를 쳐내고 인형 만드는 일도 계속하고 SNS로 이웃들과 소통도 열심히 했다. 쉽지 않은 일이긴 했지만, 그는 회사가 삶이 되지 않도록 생계와 삶을 분리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시아는 셋 중에서 가장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녀가 그만둔 건 내로라하는 대기업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정신이 나갔다고 했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모범생이나 착한 딸, 우수 사원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자 했다. 꽃과 풀을 좋아하는 그녀는 도시 곳곳에서도 볼 수 있는 크고 작은 식물들에 관찰하고 삶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외국어와 회사를 다니며 짬짬이 익힌 업무 능력으로 부업도 했다. 그녀는 회사 바깥에서도 충분히, 진실된 나로서 살아갈 수 있음을 매일 증명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의 해 질 녘이었다. 시아는 자주 들르는 서점에 갔다가 평소에는 보지 못하던 책을 하나 발견했다. 책은 서가의 한가운데 꽂혀있었다. 시아는 뭔가에 이끌린 듯 서가로 다가가 책을 뽑아 들었다. 책의 표지에 적힌 저자의 이름은 ‘윌’이었다. 그녀는 깜짝 놀란 채, 책장을 넘겼다. 책에는 자연에서 보내는 평온한 삶에 관한 이야기가 적혀있었다. 에세이 같기도 했고 철학서 같은 느낌도 있었다. 곳곳에 직접 그린 것으로 보이는 삽화도 있어 정겨움을 더했다. 그중 몇몇은 시아도 아는 풍경이었다. 그녀가 그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때, 마침 책에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도시의 삶에 잔뜩 지친 그녀가 꼭 행복을 찾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야기와 함께 그려진 것은 그녀가 윌에게 대접받았던 꽃차 그림이었다. 책을 읽던 시아는 먹먹한 기분에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책장을 덮었다. 그러고는 책을 구입한 후, 서점을 나왔다.

그녀는 윌이 지은 책을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에 기증했다. 비록 윌이 있는 영원의 정원에는 다시 갈 수 없겠지만,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가 그곳과 같은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크로노스 그룹의 대표 이사인 케이는 스스로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의 도움을 받아 시계 태엽을 찾게 된 이후로는 종종 가게를 찾았다. 그는 다크초콜릿 계열 음료를 주문해 마시기도 하고, 너무 달지 않은 재료가 든 봉봉 초콜릿을 사서 포장해 가기도 했다. 그가 가게를 방문하는 날은 금요일 혹은 토요일 오후, 해 질 녘이었다. 그는 이온에게 포장된 초콜릿을 받으며 말했다.

“이 가게는 왠지 해 질 녘에 찾아와야 될 것만 같단 말이죠.”

“해 질 녘은 사실 신기한 시간이잖아요. 완전한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낮의 끝자락이자 밤의 시작 같은 시간이니까요. 그럴 때면 꼭 신기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나요?”

“뭐든 일어나는 것은 상관없으니, 제발 우리 가문의 시계탑과 연관된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케이는 시계태엽을 잃어버린 일을 생각하기만 해도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온은 차분하게 그를 달랬다.

“그럴 일은 없지 않을까요? 미스륨은 한 곳에서만 머물러 있는 원소가 아니니까요.”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케이는 표정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온과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황금빛과 주황빛 하늘 아래가 옅은 남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어느덧 완연한 해 질 녘이었다.



Fin


*****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매번 like it 눌러주시고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 쉬는 시간을 가지고 또 다른 소설로 돌아오겠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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