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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Oct 21. 2024

25. 선물 (2)

“아까는 보이지 않았었는데, 골목에서 시아씨와 만났기 때문인 걸까? 얼른 가 보는게 좋겠네.”

이온은 휴대폰을 보며 두 사람과 함께 걸었다. 백화점은 골목의 출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기에 세 사람은 오래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오후였음에도 영원의 정원은 여전히 인기가 많았다. 백화점 방문객들은 인공적으로 조성된 정원의 아름다움을 보며 감탄하기도 하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기도 했다. 시아는 백화점 입구에서 정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처음에는 저곳에 가보지 못한 게 정말 아쉬웠는데, 제가 발견한 영원의 정원에 다녀온 뒤로는 그 생각이 사라졌어요. 인공적인 아름다움은 그곳을 따라갈 수 없어요.”

“정말 아름다운 곳인가 보네요. 저도 얼른 가보고 싶어요. 그러려면 이 주변에서 입구를 찾아야겠죠?”

이온은 초콜릿 지도 앱에 나타난 아이콘이 카리키는 방향을 확대했다. 그곳은 백화점의 왼쪽 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시아와 케이에게 다시 한번 페가수스를 잡으라고 말했다. 케이는 페가수스의 뒷좌석을 잡으면서도 말도 안 된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지금 벽을 뚫고 지나가려는 건가요?”

“또 의심하시네요. 지금까지 신기한 일들을 잔뜩 경험하셨으면서.”

“그래도 그렇지, 벽을 뚫고 들어가자는 건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조금 있다가 의논하도록 하자구요.”

이온은 자신있게 이야기한 다음, 벽을 향해 돌진했다. 순간, 페가수스의 헤드라이트가 반짝이며 공간이 일렁거렸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시원한 초저녁 바람이 부는 들판에 서있었다. 모두의 눈앞에 일렁이는 색색의 억새가 들어왔다. 싱그러운 들풀의 향기가 콧가에 맴돌며, 나지막하게 울기 시작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시아는 가만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먹먹한 듯 이야기했다.

“밤이 아닌 시간에 이곳에 오는 건 처음이에요. 어느 시간대에 오든 이곳은 아름답네요.”

“정말 그래요. 마음이 안정된다고 해야 할까요?”

이온도 시아의 말에 동감했다. 시아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이온을 바라보았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요.”

“누군지 알아요. 윌 씨를 만나러 가시려는 거죠?”

“네, 만나서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주고 싶어요.”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랑 케이 씨는 여기서 기다릴게요.”

“고마워요.”

“가시기 전에 잠깐만 시간을 내 주실래요? 사장님이 시아 씨를 만나면 꼭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이온은 말을 마치기 바쁘게 배달 박스를 열어 안에 있던 예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상자를 받은 시아가 물었다.

“이게 뭔가요?”

“사장님께서 만드신 수제 초콜릿이에요. 시아씨가 드셔도 되고 윌 씨에게 선물하셔도 돼요. 두 분이 함께 드셔도 되고요. 식용 꽃과 과일을 조합해 만든 초콜릿 봉봉이라 색다른 달콤함을 느끼실 수 있을거예요.”

“정말이요? 감사합니다.”

초콜릿을 받은 시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이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억새 사이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그녀의 뒷모습은 억새 너머로 사라졌고, 징검다리를 밟으며 또각또각 울려 퍼지던 구둣발 소리도 희미해졌다. 멀리서 바람이 불어오자 풀벌레 소리가 조금 커졌다. 케이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대체 이런 공간이 어떻게 벽 너머에 존재할 수 있는 거죠? 이것도 역시 미스륨 때문인가요?”

“그렇겠죠. 하지만 제피로스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을 때 이곳은 과거 어느 시기의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어 현실과 공존하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은 본래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에요.”

“신기하고도 어렵네요. 미스륨의 작용이 참 다양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맞아요, 원체 신기한 원소라 어떠한 범위까지 작용할 수 있는지 감을 잡기 어렵죠. 원소의 작용에 관해서는 앞으로 계속 연구해 봐야 할 거고요.”

두 사람은 풀벌레 소리를 들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자연스레 바람에 실려 오는 들풀의 향기를 맡기도 하고 색이 변하는 하늘을 바라보거나 너울거리는 억새를 바라보기도 했다. 마음이 차분해지는 풍경이었다. 이온은 시아가 왜 그곳을 영원의 정원이라 불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야기는 뜸해지고 풀벌레 소리는 짙어졌을 때쯤, 하늘에 달이 떴다. 이온과 케이는 거의 동시에 달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둥근 모양의 보름달이었다. 달을 본 이온이 참 예쁜 달이라고 말하려는데 케이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다. 

“저거 보여요?”

“달이요?”

처음에 이온의 눈에는 그저 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잠시 후, 그녀의 눈에 동그란 모양의 시계 태엽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타난 태엽은 처음의 태엽처럼 작지도, 두 번째 나타났던 태엽처럼 크지도 않았으나, 보름달처럼 완연히 동그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놀랄 새도 없이, 태엽은 케이의 두 손에 차분히 내려앉았다. 마치 스스로 주인을 찾아온 듯한 모습이었다. 케이의 손에 태엽이 내려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억새 너머로 경쾌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곧, 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이온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도 그녀의 표정이 무척 홀가분해 보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아는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초콜릿은 없었다. 그녀는 이온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온 씨, 초콜릿 정말 맛있었어요. 윌 씨가 권해서 한 개 먹었는데 향긋하고 달콤하면서도 행복해지는 맛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이곳, 영원의 정원과 꼭 어울리는 초콜릿이었어요.”

“입에 맞으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사장님께도 말씀드릴게요. 기뻐하실 거예요.”

“네!”

“그나저나 괜찮으세요?”

“뭐가요?”

“오늘 이곳을 떠나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라요. 당연히 윌 씨도 만날 수 없을 거고요.”

“알고 있어요. 아마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었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곳에 오지 못하게 되었겠죠. 그래도….”

시아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먹먹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눈물이 고인 듯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내 씩씩하게 대답했다.

“이제는 괜찮아요. 그동안에는 모든 것에 확신이 별로 없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렴풋하지만, 답을 얻은 느낌이에요.”

시아의 미소 뒤로 공간이 일렁였다. 이온은 이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시아와 케이에게 페가수스를 잡으라고 이른 다음, 일렁이는 공간의 반대로 달렸다. 

세 사람은 페가수스의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백화점 벽 앞이었다. 영원의 정원에서는 달이 뜰 때까지 시간을 보냈으나, 바깥은 여전히 해 질 녘이었다. 시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이온과 케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기회가 되면 초콜릿 하우스에 꼭 한번 들를게요.”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조심히 가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시아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백화점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온은 페가수스를 이끌고 케이와 함께 횡단보도 앞에 섰다.

네, 안녕히 계세요.”

시아는 고개를 꾸벅이고는 백화점 아래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온은 페가수스를 이끌고 케이와 함께 횡단보도 앞에 섰다.

“어쨌든 태엽을 다 찾아서 다행이네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경험이었어요.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도시가 마치 다른 곳이 된 듯한 느낌이에요.”

“보이지 않던 게 보이게 된 거죠. 시야가 넓어지신 거라고 할 수 있죠.”

“그러게요.”

케이는 이온의 말에 동의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 잘 챙겨둔 시계 태엽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미스륨은 사람의 부정적인 감정에 반응한다고 했죠? 도대체 어떤 감정에 반응한 걸까요? 근본은 조금씩은 다르겠지만 공통된 감정이 있지 않을까요?”

“부정적인 감정에는 여러 가지가 있죠. 한 가지로 압축하긴 어렵지만, 많은 일들이 고독함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아요.”

“고독함이요?”

“네. 도시는 화려하죠. 모든 게 반짝반짝하고 크고요. 그런데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외로워요. 살아가는 것은 팍팍하고 쉽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죠. 주변에 사람은 많지만 정작 마음을 나눌 사람은 없어요. 만약 마음에 묻어둔 꿈이 있다면 더욱 그러해요. 다들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데 나만 그렇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랄까? 이번에 미스륨에 영향을 받았던 분들도 그런 느낌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어쨌거나 가게로 돌아가려면 다시 페가수스에 타야 해요. 뒷자리에 올라타세요.”

“아, 그랬었지.”

“떨떠름한 표정 짓지 말고 어서요.”

“알겠어요.”

케이는 이온이 시키는 대로 페가수스의 뒷자리에 올라탔다. 이온은 케이가 올라타자마자 도로를 가르며 시원하게 달렸다. 하늘은 이제 붉은 빛보다는 푸른 빛으로 가득 찼지만, 완전히 지지 않은 해가 하늘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해 질 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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