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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23. 2024

11. 영원의 정원 (2)

정신없이 걸어 정원의 입구에 도착한 그녀는 아쉬운 마음에 뒤를 한번 돌아보았다. 출근 때문에 허겁지겁 돌아오긴 했으나, 그런 멋진 광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허전했다. 돌아본 곳에 징검다리는 없었다. 정원 한편의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도, 그곳에 있던 아름다운 들풀과 억새밭, 달도 없었다. 조금 전까지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꿈이라고 말하는 듯한 철문과 정원을 위해 설치한 커다란 외벽이 있을 뿐이었다. 시아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다시 시간을 보니, 열 시 이십 분이었다. 그녀는 잘못 봤나 싶어 몇 번이고 휴대폰을 껐다 켜서 시간을 확인했으나, 아무리 봐도 열시 이십 분 언저리였다. 이상해서 인터넷으로 시계를 검색해 보고 다른 앱을 설치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두 눈만 깜빡였다. 잠시 꿈이라도 꾼 것일까? 꿈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에는 볼에 느껴지던 신선한 바람이나 코를 간질이던 억새와 들풀의 냄새가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녀는 그날 밤에 일어난 일을 무엇이라 정의해야 좋을지 알지 못한 채로 집으로 돌아갔다.

전날의 신비한 추억도 출근 앞에서는 과거일 뿐이었다. 시아는 이른 아침 울리는 알람에 맞추어 자리에서 일어났고, 몸에 꼭 맞는 정장 재킷과 치마를 입었다. 사내 복장 규정은 자유였지만, 느슨한 모습을 보이기에는 주위 시선이 신경 쓰여 정장을 고수하는 편이었다. 회사로 가기 위해서는 시계탑 광장 부근에서 버스를 타야 했다. 집이 광장 주변 주택가라서 정류장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버스는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지만,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 낀 채로도 어학 공부를 하거나 책을 보면서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가끔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만 싶을 때도 있었으나, 자투리 시간을 허투루 보내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그럴 수 없었다. 한창 어학 공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시아는 고개를 들고 옆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턴 직원인 유리가 서있었다.

“대리님, 안녕하세요?”

“아, 유리씨.”

“어학 시험 준비하시는 거예요?”

“그건 아닌데 우리 회사가 요즘 해외 곳곳으로 수출을 늘려가고 있잖아. 배워두면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언제나 열심이시네요. 저 같으면 그냥 해외 영업 부서 직원들이 하겠거니 하고 내버려둘 텐데 말이에요.”

“부탁받은 일이 좀 있어서. 그나저나 오늘은 같은 버스에 탔네.”

“본래 타고 오던 버스가 너무 안 와서요. 지하철역 근처까지 달려서 겨우 탔네요.”

“다행이네.”

“그러게요.”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회사에 도착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탕비실에서 막 커피를 타 가지고 나온 과장이 말을 걸어왔다.

“어? 우리 팀 최고 사원이랑 최고 날라리가 같이 출근하네. 유리씨, 오늘도 후드티에 청바지야? 아무리 회사 복장 규정이 자유라지만, 매일 그렇게 출근하는 건 좀 예의가 아니지 않나?”

“아, 슬랙스 입는다는 걸 깜빡했다. 아직 세탁을 못해서 그런데 내일은 꼭 입고 올게요.”

유리는 밝게 웃으면서 대꾸해 보이고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과장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더는 시비 걸 거리를 찾지 못하고 시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시아 씨는 사람이 언제나 단정해. 입사할 때부터 지금까지 정장을 입지 않은 적이 없다면서? 회사 제일의 우수 사원이야! 역시 처음부터 정식으로 입사한 직원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과장은 그렇게 말하며 시아의 다리를 슬쩍 훑어보았다. 시아는 기분이 나빴지만 애써 웃으면서 자리에 가서 컴퓨터를 켰다. 전날 급히 데이트 약속이 잡히는 바람에 못다 처리한 업무가 남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없는데 사내 메신저로 자료를 요구하는 쪽지가 계속 와서 쌓였다. 시아는 눈을 크게 뜨고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연의 업무 처리만으로도 짬이 나질 않는데, 일하는 중간중간 과장은 말을 걸고 동료들은 자료 검토를 부탁했다. 검토라고는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빠진 내용들이 더러 있어 채워 넣어야 했다. 시아는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제대로 한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는 시간이 지나갔다. 

오전은 너무도 짧았다. 점심시간에도 마음이 분주해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채로 식사를 마쳤다. 곧장 자리에 앉아서 일하면 먹은 것이 얹힐 수도 있기에 바쁜 중에도 산책을 했다. 십 분을 넘기니 신발의 높은 굽 때문에 발뒤꿈치가 아팠다. 신발을 꺾어 신고 싶었으나, 그러면 걷는 모양새가 우스워질 것이 분명하기에 꾹 참았다. 그녀의 속도 모르고 같이 산책을 하러 나온 동료와 상사들은 오 분만 더 걷다가 사무실로 들어가자고 했다. 시아는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도록 신경 쓰며 산책을 마치고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사무실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상처 난 발뒤꿈치를 돌아볼 새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그녀를 찾는 곳이 많았다. 부장실에도 다녀오고 서고에도 다녀오고 회의실에 서류도 가져다 놓아야 했다. 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고, 모르는 것을 물어보는 이들에게는 관련된 내용을 친절하게 안내 해주었다. 그러는 새 뒤꿈치의 통증은 잊히고 말았다. 신경 쓰지 못하니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겨우 짬을 낸 건, 오후 세 시 반이 넘어서였다. 머리도 고되고 몸도 고돼서 그러는지 단 것이 당겼다. 시아는 서랍 속에 넣어둔 코코아 가루를 컵에 한 잔 타서 마셨다. 주위에 달콤하면서도 향긋한 코코아 향이 풍겼다.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쌀한 끝맛이 인상적이라 눈 깜짝할 사이 절반을 마셨는데, 맞은편에 앉은 선배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시아씨, 코코아 마셔?”

“네, 대리님. 대리님도 하나 드릴까요?”

“아니, 난 됐어.”

“한 박스나 사뒀어요. 많으니까 사양하지 않으셔도 돼요.”

“한 박스? 몇 개나 들었는데?”

“스물다섯 개요.”

“설마, 그거 다 마신 건 아니지?”

“절반 넘게 마시긴 했어요.”

“어휴, 그러면 어떻게 해. 시아 씨 올해 서른 살이었나?”

“네.”

“이제 더는 이십 대가 아니잖아. 관리 안 하고 막 먹다간 급격하게 살찐다? 곧 남자 친구랑 결혼도 해야 할 텐데 그런 걸로 스트레스 풀다간 드레스 입었을 때 군살 튀어나와서 보기 흉해. 신경 좀 써야지.”

‘결혼’이라는 단어를 들은 시아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남자 친구와는 만난 지 겨우 두 달이 되었을 뿐이었다. 가볍게 이야기가 나온 적은 있어도 진지하게 결혼에 관해 말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으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시아는 난처함을 애써 감추며 말했다.

“저, 아직 그런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눈 적은 없어요.”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서른이면 이제 가볍게 연애만 할 나이는 지났지. 언제까지 애들처럼 철없는 소꿉놀이만 할 거야? 게다가 시아 씨 남자 친구, 집도 부자인 데다가 상무님이 아끼는 조카라며! 그런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려고?”

시아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적나라한 단어 선택과 일방적인 판단에 속이 살짝 메스꺼워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애써 속을 달래며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들을 눌렀다. 다행히 그쯤 출장을 나갔던 과장이 돌아왔다. 과장이 돌아오자, 선배 직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열심히 일을 하는 시늉을 했다. 시아도 입을 꾹 닫고 컴퓨터 자판을 열심히 두드렸다. 컵에는 아직 다 마시지 못한 코코아가 절반이나 남아 있었지만, 마시지 못했다. 선배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후로는 쳐다보기만 해도 신물이 올라오는 것만 같아서였다. 결국, 그녀는 남은 코코아를 탕비실 세면대에 전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일은 항상 많았다. 시아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야근을 하곤 했는데, 그날도 그러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업무까지 싹싹 모아 정리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아홉 시를 넘기고 있었다. 속은 불편했고 뒤꿈치는 아팠다. 회사에서 나온 그녀는 약국에 들러 밴드를 사서 뒤꿈치에 붙였다. 곧장 버스를 탄다고 탔는데, 시계탑 광장에 도착하니 열 시를 겨우 십분 남짓 남기고 있었다. 시아는 광장을 가로지르며 시계탑을 올려보았다. 몇백 년의 역사를 지녔다고 하는, 커다란 시계탑 곳곳에서는 세월이 묻어났다. 색이 바란 부분도 있고, 비바람에 풍화된 곳도 있었다. 철로 만든 시곗바늘도 군데군데 도색이 벗겨지고 녹슬었으나, 시간만은 잘 맞았다. 그대로 서있는다면 곧, 시계 아래쪽에 매달린 종이 울릴 것이었다. 

열 번의 종이 울린다. 시아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다 문득 지난밤 보았던 꿈결 같은 순간을 기억해 냈다. 신선하고 시원한 바람과 탁 트인 느낌, 색색의 파도 같던 억새와 밝은 달. 눈을 감지 않아도 모든 것이 아주 생생했다. 갑자기 그곳이 그리워졌다. 그녀는 발걸음을 재촉하며 백화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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