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그는 하얗고 기다란 침대에 누워있었다. 링거를 꽂은 팔은 야위었고, 안색은 창백하다 못해 파리했다. 꼭 자신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민은 믿기지 않는 광경을 마주한 채, 한참을 서있었다. 처음에는 충격적인 광경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두서도 없고 정리도 되지 않는 뒤죽박죽의 잡념들이었다. 괴로웠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툭 툭 튀어나왔다. 민은 매일 아침 마주하던 회사의 빛바랜 외관이, 거들먹거리는 과장의 모습이, 책임감 없는 같은 팀 동료들의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진저리를 쳤다.
‘참 좋은 주식회사’는 이름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회사였다. 업무도 단순 반복적이고 조직 문화는 극도로 수직적이며, 월급도 많지 않았다. 본래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회사는 세계 정세가 불안정해지고 경제 상황이 나빠지며 입사 경쟁률이 급격히 높아졌다. 다른 것은 몰라도 고용 안정성과 정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법에 심히 저촉되는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잘리지 않았고, 월급은 정해진 날에 꼬박꼬박 나왔다. 한 치 앞이 불안한 세상에서 그 정도면 최고의 장점일지도 몰랐다. 게다가 업무가 어렵지 않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일과 삶의 균형을 지킬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민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장점들에 이끌려 입사 시험을 준비했다. 대학 졸업 이후 몇몇 직장을 전전하던 그는 개인 기업 사장들의 횡포와 제때 입금되지 않는 월급에 지쳐있었다. 고용이 불안정했기에 그토록 좋아하는 인형을 만드는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고용이 보장된 회사에서 일하며 퇴근 후, 마음껏 인형을 만드는 삶을 꿈 꾸었다.
몇 년 사이에 회사 인기가 높아져 입사 경쟁률을 뚫는 것은 쉽지 않았다. 민은 아르바이트와 시험 준비를 병행한 끝에 입사에 성공했다. 그러나 입사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수인계인 법이다. 그가 이전에 다닌 회사들은 아무리 규모가 작았어도 인수인계는 있었다. 참 좋은 주식회사는 그런 개인 사업체들보다 몇십 배는 더 크고 전국에 지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인수인계 같은 것은 없었다. 민의 전임자는 개인적인 이유로 퇴사했는데, 그가 떠난 자리에는 A4용지 반 장이라는 말도 안 되는 분량의 인수인계서만 덩그러니 남겨 있었을 뿐이었다. 민은 종이와 전임자가 컴퓨터에 남겨둔 파일을 샅샅이 뒤져면서 업무를 익혀야만 했다. 일과 삶의 균형은 무슨, 회사에서 지급하는 연장근로 수당의 한도를 초과하여 무급으로 일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몇 개월이 지나고 겨우 업무를 익혀서 할 수 있게 되자, 다음 시련이 닥쳤다. 팀의 과장이 바뀌었다. 새로 온 과장은 무능한 꼰대의 전형이었다. 그는 막내 직원의 군기를 잘 잡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틈만 나면 민을 불러 끝없는 훈계를 늘어놓곤 했다. 만일, 민이 일을 하다 실수라도 하면 요즘 젊은 녀석들은 기본이 되지 않았네, 세상을 너무 편하게 살아서 일을 할 줄 모르네 하면서 잔뜩 트집을 잡았다. 그뿐 아니었다. 때때로 본인의 기분이 나쁘면 괜스레 민에게 화풀이를 하기도 했다.
너무도 부당한 대우였지만, 팀 내에서 그를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일을 도와주기는커녕, 힘내라는 따뜻한 위로 한 마디 조차 건네지 않았다. 팀원들은 도리어 막내인 그에게 일을 떠넘기지 못해 안달이었다. 잡일과 업무의 경계가 모호한 일은 민이 오롯이 다 떠맡았다. 과장 또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민은 스트레스를 받았지만 참았다.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월급은 제때 나오고 회사가 갑자기 없어져서 일자리를 잃을 위험은 없지 않은가? 야근을 하며 기름진 음식을 먹거나 끼니를 제때 챙기지 않아 소화가 되지 않아도, 끝없는 업무에 머리가 지끈거려도 그는 애써 자신을 달랬다. 약국에서 산 약을 먹으며 버텼다. 퇴근 후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인형을 만들면서, 딱딱한 점토가 원하는 형태로 변하는 과정에 몰입하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내일을 버틸 힘을 얻었다. 막내니까 사회 초년생이니까, 아직 부족하니까. 시간이 지나면 더 나아질 거야. 승진을 하고 막내 자리를 벗어나면 조금은 편해질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달랬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틀렸다. 시간이 지나도 그의 업무는 줄어들지 않았고, 일을 떠넘기는 사람들의 행태도 변하지 않았다. 회사의 고용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것은 자신도 잘리지 않지만, 옆자리의 직원들도 잘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을 열심히 하든 그렇지 않든 월급은 같았고 열심히 할수록 일만 많아지고 실수를 하거나 뭔가 잘못될 가능성만 높아졌다.
워라밸, 일과 삶의 균형 따위는 없었다. 정년도 보장되고 월급도 제때 나온다고 하지만, 이상하게도 회사에는 결원이 자주 생겼다. 회계 부서의 동기와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얼핏 듣기로는 산재 신청의 비율도 높다고 했다. 업무나 사람 때문에 몸이 아프거나 정신적 문제를 겪는 직원이 많은 것이었다. 결국, 3년 후의 그는 업무 시간에 막내 직원을 쥐잡듯 잡으며 훈계를 하고, 주식 투자를 하고, 일을 떠넘기고, 몇 주나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내버려둔 업무를 홀로 처리하다가 쓰러져 혼수상태에 이른 것이었다.
민은 억울하고 허무한 마음에 한숨만 내쉬었다. 열심히 일하다 보면 무엇인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회사는 그를 책임져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일수록 일은 더욱 힘들어지기만 했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애꿎은 책임감 따위 가지지 않았어도 어차피 월급은 나왔을 텐데. 잘리지도 않았을 텐데.
민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병상에 누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음속에서 울컥 치솟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달리고 또 달려서 병원을 나서고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 도로를 건너고 사람이 더 많아진 광장을 지나 번화가에 다다랐다. 번화가에 들어선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무작정 걸었다. 곁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괴로웠다. 외로웠다.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줄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는 사람들을 피해 점점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고,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곳에 다다랐다.
지난밤 이후로 계속 굶어서일까? 배는 고팠으나 입맛은 없었다.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그를 둘러싼 상황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존재. 어쩌다가 미래로 와버린 것일까? 그것도 이토록 비참한 기분이 드는 미래에. 한참을 걷던 그는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간판 없는 가게였다. 가게 안에서는 달콤한 초콜릿의 냄새가 풍겨 나왔다. 평소에 단것을 즐기진 않지만, 속이 빈 상황이라 냄새가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의 눈길을 더욱 사로잡은 것은 가게 창틀에 진열된 귀여운 도자기 인형이었다. 얼룩진 털과 통통한 체형을 지닌 웰시코기 몇 마리가 혀를 빼물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인형을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가게 문을 그대로 통과하려던 그는 머리를 살짝 부딪쳤다. 몇 번을 시도해도 비슷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곳과 다르게 물리 법칙의 제한을 받는 장소인 걸까? 그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직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계산대는 비어있었으나, 진열장과 매대에는 먹음직스러운 초콜릿이 가득했다. 그럼에도 민은 초콜릿보다는 인형에 눈길을 주었다. 단순하지만 정교하게 만들어진 것을 보니, 제작자의 솜씨가 무척 좋은 듯했다. 민은 손을 살짝 들어 인형을 만져보았다. 흙의 딱딱함과 유약의 매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러면서도 서글펐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데, 인생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인형을 보니 기분이 달라지는데. 어째서 좋아하는 일만 하며 살아갈 수 없는 것일까? 좋아하는 일을 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자신의 삶이 너무도 비참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민은 인형에서 손을 떼고 창가 근처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메뉴판이 놓여있었다. 그는 메뉴판을 펼쳤다. 메뉴판에는 이름만 읽어도 달콤할 것이 분명한 음료가 여럿 나열되어 있었다. 그는 메뉴를 손으로 짚으며 그나마 덜 달법한 음료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속이 비었어도 단맛이 강한 음식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