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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로프 Sep 07. 2024

4. 드라마 (2)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버스에서 계속 타인의 욕망에 관한 생각만 계속하던 그녀는 사무실이나 버스 안을 떠나 오롯이 혼자 있게 되고서야 본인의 욕망에 집중해 보았다. 만약 내게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미래를 바꿀 것인가? 몇 분쯤 이런저런 방법을 떠올려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처럼 정세나 경제 상황에 밝지 못했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재테크 방법도 제대로 몰랐고 신분 상승을 할 만한 정보에도 어두웠다. 심지어 복권 당첨 번호 같은 것도 하나 외워두지 않았다.


“한심해.”


그녀는 혼잣말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그쯤, 시계탑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보나 마나 일곱 시를 알리는 종소리일 터였다. 보라는 종이 여섯 번 울렸을 때, 쓸데없는 생각일랑 접어두고, 저녁이나 먹지 싶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한 번 더 울려야 할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끼익’하는 쇳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그녀는 시계탑을 올려보았다. 그러자 역행하는 시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시침이 일곱 시로 가지 않고, 여섯 시로, 얼마 후에는 다섯 시를 향해 움직였다. 분침도 마찬가지였다. 세계가 제대로 가지 않으니, 종도 이상하게 울렸다. 시침의 방향에 따라 다섯 번을 더 울리고, 네 번을 더 울리고 세 번을 더 울리다가 그만, 멈춰버렸다. 고장난 것이 틀림없었다.


역사가 깊다고는 하지만, 광장의 시계는 그동안 고장나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정확해서 사람들이 느리거나 빠른 본인들의 시계를 광장의 시계에 맞추곤 했다. 그런 시계가 고장이 다 나다니. 별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왜 그럴까 싶어 주위를 돌아보다가 그만, 기절할 만큼 놀라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벤치에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긴 머리의 여자였다.


보라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여자를 바라보았다. 시계가 고장나면서 뭐라도 튀어나온 것일까? 그녀는 설마 자신이 모르는 전설이나 괴담 같은 것이 시계에 얽혀있나 싶어 기억을 뒤져보았으나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게다가 여자의 외모는 평범했다. 아니, 계속해서 보다 보니 너무나 낯이 익었다. 긴 머리와 남청색 편의점 유니폼, 그 위에 달린 명찰까지. 보라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명찰에 적힌 이름을 읽어보았다. 그곳에는 ‘보라’라는 이름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벤치에 앉아있는 것은 그녀였다. 그것도 십 년 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취업을 준비하던 과거의 그녀.


보라는 잠시 과거의 자신을 지켜보았다. 과거의 그녀는 앞에 사람이 서 있음에도 별 상관하지 않고 멍한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과 외모가 크게 다르지는 않았으나, 뺨은 훨씬 더 야위어 보였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지 못한 것같았다. 그 모습을 본 보라는 마음 한구석에서 연민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돌이켜보면 십 년 전의 그녀는 꽤 힘든 시기를 보냈다. 대학을 막 졸업했는데 일자리는 없지, 학자금 대출은 남아있지, 아버지까지 은퇴하던 시기라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입사 시험에서 자꾸 떨어져 언제나 의기소침했다.


그녀가 일했던 편의점은 최저 시급을 주었다. 임금을 체불 당한 적은 없었으나, 사장은 가끔 상황이 여의찮다며 월급을 며칠 늦게 입금하곤 했다. 당시 그녀는 월급으로 받은 돈을 쪼개고 또 쪼개서 생활했기에 월급이 밀리면 가장 저렴한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저녁을 그냥 굶어야만 했다.


저녁 먹을 돈마저 떨어진 날이면 그녀는 편의점에서 인수인계를 하고 바깥으로 나와 시계탑 근처 의자에 앉았다. 그런 다음, 시선을 먼 곳에 두고 미래에 관한 걱정을 이것저것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신기하게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걱정이 너무 많아 허기를 잊게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누구보다 그 사정을 잘 아는 보라는 말 없이 과거의 자신 옆에 앉았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과거의 그녀는 잠깐 옆에 눈길을 주는가 싶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앞만 바라보았다. 여전히 걱정으로 허기를 달래는 것이 분명했다. 보라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요.”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였을까? 처음에 그녀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라가 옆으로 다가가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네? 저요?”


약간 얼이 빠진 듯한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말을 걸 리 없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던 듯했다. 보라는 당황해하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네. 그쪽이요. 같이 저녁 먹을래요? 내가 사줄게요.”

“저녁을요?”


그녀는 깜짝 놀란 눈으로 보라를 바라보았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동시에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조금 가늘게 떴다.


“저기, 혹시 저를 아세요? 아니면 신종 사기나 뭐 그런 건가요?”


역시, 저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보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의심 많고 걱정 많은 본인다웠다. 어떤 이야기를 해야 경계를 풀고 다가갈 수 있을까? 고심하면서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더니 보라가 듣든 말든 혼잣말을 했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어?”

“왜 그래요? 뭐 이상한 점이라도 있어요?”

“그, 그럼요. 엄청 이상하죠!”

“그러니까 뭐가요?”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쪽이랑 나 말이에요, 너무 닮았어요. 머리 모양이나 옷 입는 스타일은 다르지만, 얼굴을 바라보면 꼭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쳐요. 세상에 이렇게 나랑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아니면 너무 걱정을 많이 해서 정신이 이상해져 버렸나?”

“아닐걸요. 우리 닮은 거 맞아요. 왜냐하면 나는….”


보라는 말을 잇기 전에 과거의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굳이 긴장감을 조성하려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침을 크게 꿀꺽 삼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앞으로 마주할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같았다. 보라는 어쩐지 지금 상황이 드라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창 유행하는 플롯인 미래의 기억을 지닌 채로 과거로 돌아가는 드라마. 드라마와 현실의 차이점이라면 한 개의 시공간에 과거와 미래의 자신이 공존한다는 것이었다. 보라는 다시 입을 열었다.


“미래의 그쪽이에요. 그러니까 그쪽이 과거의 보라면, 나는 미래의 보라예요.”

“미래 뭐요?”


과거의 그녀는 진실을 듣고도 여전히 믿기 어려운 눈치였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어느 날 멍하니 넋 놓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는 미래의 너니까 밥을 사주겠다고 하면 얼마나 어이가 없겠는가? 믿기 어려운데 또 얼굴은 똑같아서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결국은 생각이나 말을 더 해봐야 무의미했다. 보라는 먼저 일어섰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일단 저녁이나 같이 먹자. 존댓말이나 격식도 그만두고. 어쨌든 너 저녁 못 먹어서 배고프잖아. 오늘 월급날인데 사장이 아직 입금을 안 해줬지?”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미래의 너니까 당연히 알지. 보나 마나 또 상황이 여의찮다고 얼버무렸겠지, 뭐. 못 믿겠어도 일단 일어나. 너 배고픈 거 얼굴에 다 써 있어.”


보라는 과거의 자신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자리에서 일으켰다. 과거의 그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보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시계탑 맞은편의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각종 음식점이 가득했다. 모두 십 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보라는 어떤 음식점에 가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이탈리안 레스토랑 앞에 멈춰 섰다. 과거에는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했던 곳이었다.


“이런 데 와도 돼?”


보라가 레스토랑에 들어가려 하자, 과거의 그녀가 놀란 듯 물었다. 보라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당연하지. 이 정도는 사줄 수 있어.”

“정말?”


과거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보라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동경하는 듯한 느낌도 있었다. 보라는 그 모습을 보자 마음 한편이 시려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싫었던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과거의 그녀도 엉거주춤 안으로 들어와 보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보라는 메뉴판을 들어 과거의 그녀에게 내밀었다. 과거의 그녀는 보라의 눈치를 보며 저렴한 축에 속하는 음식을 골랐다. 하지만 보라는 점원이 다가오자, 자신이 고른 메뉴와 같은 메뉴를 주문했다. 과거의 그녀는 당황해서 속삭였다.


“왜 비싼 거 시켰어? 나는 처음에 고른 거면 됐는데.”

“너 고기 좋아하잖아. 스테이크 파스타가 얼마나 한다고.”

“그렇긴 하지만, 비싼데….”

“직장인한테 이 정도는 그리 비싼 편도 아니야. 그러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먹어.”

“고마워.”


과거의 그녀는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래도 레스토랑의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 듯했다. 보라도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아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녁이라 사람이 꽤 많았기에 음식이 나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침묵을 지키던 보라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레스토랑 맞은편에는 커다란 전광판이 설치된 빌딩이 하나 있었다. 전광판에서는 이런저런 광고가 송출되고 있었는데, 보라가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는 화장품 광고가 끝나고 방영 중인 드라마의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 시절, 해당 드라마는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드라마를 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어딜 가든 그 드라마 이야기뿐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추억일 수도 있겠지만, 보라에게는 예상치 못한 타격일 뿐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무엇인가가 울컥하고 치솟아 올르는 것으 느꼈다. 동시에 애써 누르고 있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지금은 마음을 꾹꾹 누르며 무시하고 있지만, 그녀는 사실 어릴 적부터 드라마를 좋아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가셨을 때면 할머니와 함께 드라마를 보며 외로움을 달랬다. 처음에는 그저 보는 것에 집중했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드라마 자체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다. 세상에 있을 것 같으면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 그 이야기를 배우와 각본가와 감독이 하나가 되어 그럴듯한 현실로 만들어 내는 모습이 너무도 멋져 보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드라마가 하루일과에 지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삶의 활력을 더해준다는 사실 또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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