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로프 Sep 04. 2024

2. 손님

해질녘의 초콜릿 하우스

“그 녀석, 이제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말이야.”


시에나는 손에 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며 말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이온은 의자에서 몸을 반쯤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구름 너머로 해가 모습을 감추며 하늘이 색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제피로스’ 씨 말씀이죠? 정말 오실 때가 되었네요. 샌드 위치 하나 더 꺼내올까요?”

“놔둬. 은근히 입맛이 까다로워서 신선한 느낌이 없다면서 새로 만들어 달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럼, 국물도 없어요. 매번 공짜로 저녁을 드시고 가면서 그렇게 까다롭게 굴면 안 되죠.”


이온이 웃으면서 말하자, 시에나도 미소를 지었다.


“너도 담이 많이 세지긴 했네.”

“손님 대접도 다 사장님의 권한을 위임받아서 하는 거니까요.”


두 사람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고 있을 때였다. 경쾌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이온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다가갔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키가 훌쩍 큰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이온과 눈을 마주치자, 쓰고 있던 모자를 살짝 들며 인사를 해 보였다. 살짝 예스러우면서도 격식 있는 인사였다. 이온은 그가 모자를 다시 내리자,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안녕, 오랜만이네. 3주쯤인가?”

“정확히는 3주하고 이틀만이에요. 이번에는 거의 한 달을 다 채워서 오셨네요.”


이온이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며 대답하자 제피로스는 눈썹을 살짝 위로 들어 올렸다.


“날짜 관념이 정확한 건 여전하네.”

“장사를 하다 보면 다 이렇게 돼요. 하루하루가 중요하니까요.”

“어느새 작은 사장이 다 되었다고 해야 할지.”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그래, 좋을 대로 해.”


제피로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웃으며 가게로 들어와 시에나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시에나는 인사말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곧장 조리실로 들어가 샌드위치를 꺼내왔다. 그 모습을 본 이온은 커피머신 쪽으로 가서 커피를 따라 테이블로 가져갔다.

이온이 테이블에 먼저 커피를 내려놓자, 곧이어 시에나가 샌드위치를 올려놓았다. 제피로스는 두 사람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는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양상추와 토마토가 싱싱하게 아삭거리자, 제피로스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주 신선하고 맛있어. 날 위해 준비해 놓은 거야?”

“그럴 리가. 우리가 먹으려고 만들다가 남은 건데.”


시에나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다시 원래 앉아있던 테이블로 돌아가 식사를 계속했다. 제피로스는 다소 머쓱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웃음기를 잃지 않고 샌드위치를 먹는 데 열중했다. 이온도 그가 더는 별말 없자 제 자리로 돌아와 식사를 마쳤다. 

그녀는 두 사람보다 먼저 식사를 마치자마자 조리실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 안에는 아침에 시에나가 만들어 놓은 가게의 대표 초콜릿 다섯 종이 두 줄로 나란히 놓여있었다. 시에나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세 번쯤은 식사 후에 이온과 함께 먹을 여분의 초콜릿을 만들어 놓곤 했다. 그녀는 손님도 왔겠다, 초콜릿을 모두 작은 접시에 담아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제피로스가 앉은 테이블 위에 초콜릿 접시를 올려놓았다. 


“사장님께서 오전에 만드신 초콜릿이에요. 우리 가게 대표 초콜릿들이니까 벌써 몇 번쯤 드셔보셨겠네요.”

“그럴지도 모르겠네. 여기 초콜릿은 생긴 것만으로도 확실히 구별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제피로스는 웃으면서 접시 옆에 놓인 작은 포크를 들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없네.”

“뭐가요?”

“내가 좋아하는 맛.”

“좋아하시는 맛이 뭔데요?”

“라즈베리 봉봉.”

“아, 그건 오늘 없어요.”

“그게 아니라면 상큼한 과일 맛이 첨가된 다른 봉봉 초콜릿이라도 없나?”

“네, 오늘은요.”


원하던 초콜릿이 없다는 소리를 듣자, 제피로스는 더욱 시무룩한 표정 일색이었다. 이온은 조금 당황하여 시에나 쪽을 바라보았다. 시에나는 제피로스가 투정을 부리건 말건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섰을 뿐이었다. 그는 테이블에 의자를 슬쩍 밀어 넣고는 성큼성큼 제피로스와 이온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아주 당연하다는 어투로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바닐라 커스터드도 과일 맛인데.”

“나는 상큼한 과일 맛이 먹고 싶었는데.”

“살짝 덜 익은 바나나에서는 새콤한 맛이 나기도 하지.”


시에나는 그렇게 말하며 포크를 들어 바닐라 커스터드 초콜릿 한 개를 제피로스 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럼, 그걸 먹으면 되겠네.”

“여기서는 새콤한 맛이 나는 거야?”


제피로스는 기대하는 눈초리로 초콜릿을 포크로 집어 입에 넣었다. 하지만, 정작 초콜릿을 맛본 그의 얼굴에는 의문 가득한 표정만 떠오를 뿐이었다.


“하나도 안 새콤한데?”

“당연히 안 새콤하지. 본래 향긋하게 단맛이 매력적인 초콜릿인데.”

“뭐야, 날 속인 거야?”

“과일 넣은 초콜릿 타령을 하길래 그 장단에 맞춰준 것뿐이야.”


시에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의자를 빼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본 제피로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뭐, 단 것보다는 새콤하게 단 맛이 좋기는 한데 이것도 꽤 괜찮아. 이전보다 더 맛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는 초콜릿이 맘에 들었는지 하나 더 포크로 집어 먹고는 이번에는 땅콩버터 초콜릿에 포크를 꽂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엇인가 생각난 듯, 재킷 주머니에서 뒤져 작은 유리병 세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각각 보라색, 파란색, 연두색이었다.


이온은 허리를 숙여 제피로스가 꺼내놓은 병을 들여다보았다. 병에는 아름답고 진한 색의 액체가 절반쯤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검은색의 알갱이 같은 것이 둥둥 떠다녔다. 알갱이의 모양은 제각각이라 처음에는 모양을 쉽게 분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직접 병을 들어 올리고 눈을 가까이 가져다 대니 모양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작은 글자들이었다.글자들은 단어별로 짝을 지어 병 안을 동동 떠다녔다. 꼭 어항 속 물고기 떼 같았다.


“이번에 가져오신 이야기는 세 개네요. 세 병 모두 색이 진한 걸 보니 중요한 이야기일 테고요.”

“맞아. 그 이야기들을 다른 이야기와 구별하느라 좀 늦었어. 온종일 수집되는 이야기가 너무 많다 보니 정리가 쉽지 않기도 했고.”

“확실히 그런 것 같네요.”


이온은 병을 내려놓으며 시에나와 제피로스처럼 테이블 앞에 앉았다. 제피로스는 왼손으로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보라색의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그는 병을 한번 흔들어 글자가 잘 보이도록 정렬한 다음, 뚜껑을 열었다.


“자, 이제부터 이야기부터 들려줄게. 차례대로 들려줄 테니 잘 들어봐.”


그의 말에 이온과 시에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제 창밖은 노을은 모습을 거의 감추었고, 하늘의 색도 어둑어둑하게 변했다. 그리고 영업이 끝난 해 질 녘의 초콜릿 하우스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이전 01화 1. 시에나 초콜릿 하우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