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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몽콕 Oct 26. 2024

화려한 ■첨기

행운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꽉 쥐고 있어야 한다

그건 맛집 대기줄이 아니라 팬 미팅 대기줄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많은 사람들이 카페 안에 들어가

려고 길게 줄 서 있었다. 소문의 그 카페다. 미남 바리스타 열 두 명이 커피를 내려준다는 커피 맛집?


 가게 밖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테이크 아웃 잔을 들고 나가는 손님들을 보며 어쩔 줄을 몰라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들이 붐비는 건 딱 질색이다. 인파를 피해 내 갈 길을 가려고 했다. 카페 앞에 서 있는 입간판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거기엔 오늘 근무하고 있는 직원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다른 직원의 얼굴을 알아보기가 힘들었지만, 단 한 사람의 얼굴만은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콘 오닐이었다. 홀린 듯이 대기줄에 가담했다.


 어느 덧 줄이 줄어서 건물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내 앞으로 남은 손님은 네 명 정도였다. 카운터 안 쪽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정말로, 콘이 주문을 받고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사실이라기엔 너무 좋았다. 내 순서가 되면 말을 더듬지 않고 음료를 주문할 수가 있을까 걱정스러웠다. 이제 남은 사람은 한 명, 체크카드를 꽉 쥐었다.


 내 차례가 됐다. 입을 떼기도 전에, 콘은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음란 마귀가 든 손님에게는 주문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내 뒤에 있던 손님을 불렀다. 난 그저 콘에게 커피를 주문하고 콘의 손으로 내린 커피를 받고 싶었을 따름이었다. 그런 의도가 히야까시고, 음란 마귀가 들린 짓이라니. 스스로를 자책하며 카운터 옆에 비껴 서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주문한 커피를 받고 떠나갔다. 저들은 다 순백의 마음의 소유자렸다.


 콘에게 음료를 받아 나가는 손님들을 손가락 빨며 지켜보고 있는데, 콘이 음료가 나오는 카운터로 나

를 불렀다. 카운터 위에 내가 주문하지도 않은 갓 내린 드립 커피 한 잔과 스팀 우유 두 잔이 올려져

있었다. 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커피를 주문할지 훤히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콘은 한국어를 이렇게 잘하지.’


 기상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번쩍 떴다. 어쩐지, 사실이라기엔 너무 좋다고 했다.


 연예인이 나오는 꿈은 금전을 부르는 꿈이라는 속설이 떠올랐다. 커피 한 잔에 서비스로 음료 두 잔을 더 받았으니 복권을 사면 1, 2, 3등 동시 당첨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닐까. 히히 웃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언제, 어디서 복권을 사야 하는가였다. 이전 까지는 복권을 사 본 적이 없었다.


찐따 특징 :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기 직전에 부를 노래 들어 봄.


이라고 하던데, 여기에 한 줄을 더 추가해 보자면


찐따 특징 2 : 복권 사기 전에 지도 앱 켜고 시뮬레이션 함.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복권 판매점은 도보로 20분 거리의 전자 담배 가게였다. 길몽의 효력이 사라지

기 전에 일초라도 빨리 복권을 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근무 시간 중에 복권 사러 나갈 배짱이 있냐고 한다면…… 싸장님을 무서워하는 노동자는 플랜 B를 세운다.


 동대구역에서 내리면 자동화 기기에서 현금 만원을 인출해 아파트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에서 로또를 사야겠다. 그래, 그 편의점 테이블엔 항상 당첨 번호가 적힌 족보와 컴퓨터 사인펜을 쥐고 로또 번호를 비장하게 마킹 하는 아저씨들이 많이 앉아 있었다.


 퇴근 시간은 어찌나 가지 않던지. 또 버스는 어찌나 늦게 오고. 아뿔싸, 신분증을 안 챙겼다. 설마 이 액면가로 미성년자한텐 로또 안 판다 소릴 듣지는 않겠지. 문제의 편의점에 오기까지 많은 상념이 교차했다.


“로또다섯게임자동으로주세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숨도 쉬지 않고 편의점 직원에게 말했다.
“저희 로또 안 팔아요.”
종업원은 우물가에서 무슨 숭늉을 찾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굳어서 카운터 앞에 가만히 서 있으니, 장의자에 앉아서 컵라면을 퍼먹고 있던 아저씨가 아는 체를 했다.


“여긴 일년 전부터 로또를 안 팔아. 로또를 사려면 저기 %$#에 있는 로또방에 가야지.”


 그 아저씨는 일 년 전까지 편의점에서 족보를 쥐고 당첨 번호를 경건하게 마킹 하는 사람 중 하나였
을 것이다. 그런 아라한의 경지에 이른 사람의 말은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편의점에서 나와 폰으로 검색을 해 보니, 곧 복권방이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오늘 당장 부자가 될 기회를 놓친 것 같았다.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저녁상에 오랜만에 구운 돼지 목살이 올라왔지만, 좀체 맛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 오페라 글래스 좀 이상하다. 부엌에 있는 쓰레기통을 당겨 봤더니 코딱지 만하게 보이더라고.”

엄마는 다음날인 토요일 뮤지컬 관람을 위해 산 망원경을 눈에 대 보며 말했다.
“하이고, 지금 눈을 잘못 대고 계세요.”
엄마는 여태껏 대물렌즈를 눈에 대고 오페라 글래스가 잘못됐네 환불을 해야 하네 난리를 치고 있었다. 접안 렌즈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 이제 잘 보이네.”
내일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에 로또를 사야 당첨이 될 텐데. 복권 판매 마감 시간은 여덟 시고, 뮤지
컬 관림 시간은 일곱 시였다.
재복을 부르는 꿈을 꾸고 하룻밤이 지났으니 그 효력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래도 아무에게 도 꿈 내용을 발설하지 않았으니 희망은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당첨 사실이 확정될 때까지 더는 행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틀어쥐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꿈은 물론이고, 복권을 사는 행위조차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오늘따라 아이스크림이 땡기네.”
복권과 전혀 상관없이 나갈 구실을 댔다.
“아이스크림은 얼어 죽을.”
때는 12월로, 엄마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심지어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자 전기 장판 위에 솜이불
을 덮어쓰고 나란히 누워 있던 참이었으니.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겠다고 박박 우기며 패딩을 걸치고 집을 나섰다.
복권방에 가니 긴 테이블에 앉아 신중하게 번호를 고르는 사람들이 한 가득이었다.
“로또 다섯 게임 자동으로 하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해야 해요?”
돈을 받은 가게 주인은 이미 번호가 인쇄된 종이를 내밀었다.
“어렵지 않죠?”
복권 한 장을 사겠다고 전날부터 내적 요란법석을 떤 것에 비해, 복권 구매 과정은 너무 시시했다.

어쨌거나, 나는 로또를 손에 넣었다. 감열지에 찍힌 숫자 서른 개를 손가락으로 주르륵 훑고 지갑에
집어넣었다. 뮤지컬 공연이 끝나고 나면 내 인생이 달라져 있겠지.


 나는 복권을 사러 간 게 아니라,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간 것이다. 로또방 근처 무인 점포에서 산 아이스크림 한 봉다리 들고 집에 들어갔다. 알리바이는 완벽했다.
"아이스크림 사러 간다더니 왜 이렇게 오래 걸려?"

"더블 비얀코 베리베리 맛은 여기 앞 마트에 안 판다."



 송아지 고기로 뺨을 마사지하고 데운 우유로 목욕을 하고 순백색 드레스로 성장한 황후 엘리자벳이 무대 가운데 나타났다. 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주인은 나야 난 자유를 원해 자유! 를 외쳤다. 요식적인 궁정생활과 예법, 시모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던 엘리자벳은 조피 대공비가 강조하는 궁정의 절차대로 극상의 미를 휘감고 있었다.


 입으로는 싫다면서도 몸으로는 착실히 해내고야 마는 당신, 합스부르크도 우리 민족이었어! 19세기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후가 생각할 수 있는 자유는 19세기의 벽을 넘지 못했고, 21세기 한국을 사는 나 역시 21세기가 주입한 자유의 모습 이상을 상상할 수 없었다. 돈에 대한 집착이 모든 근심의 근원인 줄을 알면서도, 더 많은 돈으로 자유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도 난 남의 먹을 것 빼앗아 행복해 지려는 건 아니다? 당첨이 되면 대출을 갚고 남는 돈으로 저축을 하고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러 다니고 휴가 철에 휴가 가는 게 아니라 내가 원할 때 훌쩍 떠나는 삶을 원할 뿐이라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비극이 정점으로 치닫는 가운데, 내 마음은 무대를 벗어나 농협 본점으로 가 있었다.
“그 죽음 역할 맡은 배우 이름이 뭐지. 노민우인가. 걔가 참 날씬하고 훤칠하게 생겼더라. 가까이서
봤으면 좋았을 텐데.”
엄마는 관람이 꽤 마음에 든 듯, 배우를 콕 집어가며 뮤지컬 이야기를 했다. 당첨이 되면 미뤄뒀던 효도도 좀 하고.
“어휴 돈 생기면 무조건 1층 좌석에 가야지.”
아마 인터미션 즈음에 번호를 추첨했을 것이다. 당첨돼 버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다리를 가만두지 못하고 달달 떨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당첨 사실을 확인하기 전에 샤워를 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낮에 산 로또 영
수증을 꺼냈다. 기쁨의 비명소리가 바깥에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으로 영수증의 QR 코드를 스캔했다.
액정에 뜬 글자를 확인하고, 등을 무겁게 누르고 있는 이불을 집어 던졌다. 방문을 박차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효자손으로 등을 벅벅 긁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소파 위로 풀쩍 뛰어올라갔다.
네 시작은 창대 했으나, 네 나중은 심히 미약하리라. 이렇게까지 요란하게 멍청 비용을 쓴 얘기를 하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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